플라토
2002년 5월 25일 ~ 2002년 7월 21일
안상수는 1980년대 초반부터 한글 서체 개발과 한글 타이포그래픽 디자인을 이끌어온 디자이너이다. 안상수체를 비롯하여 그가 개발한 서체들은 디자인과 서체 개발에 있어 한글의 태생적 제약으로 일컬어지는 네모틀을 탈피하여 기존의 서체들에 비해 시각적으로 매우 파격적이었다. 그의 서체들에 대하여 가독성과 관련한 비판적 시각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최근 들어 각종 매체에서 탈네모틀 서체들이 적쟎이 활용되는 것을 볼 때 분명 그의 선구적인 실험이 우리 문자 환경의 다양화에 기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깬 것은 네모틀 만이 아니라 경직되어 있는 한글 타이포그래피 자체였던 것이다.
한글 타이포그래퍼 안상수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창제된 한글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탄생의 기원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글자로, 선조들의 지혜가 집약된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문화 유산이다. 한자문화권이지만 중국과 다른 말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글자와 말이 서로 맞지 않았던 상황에서 한글의 창제는 우리가 남(중국)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주체적인 길을 모색한 첫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안상수는 한글을 '당돌'한 글자라고 표현하며 스스로를 한글을 부리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가 말하는 '부리다'는 바로 타이포그래피를 의미한다. 타이포그래피란 텍스트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시각적 효과들을 적용하여 텍스트의 시각성을 높이는 일이며 나아가 글자에 감성과 정서까지 담아내는 일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한글은 아직 타이포그래피를 위한 기반이 취약한 상황이었다. 당시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이러한 한계를 절감한 안상수는 스스로 한글 서체 개발에 나서 '마당체'를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1985년 공식적인 첫 서체인 안상수체를 발표하였다. 안상수체를 비롯하여 이후 그의 서체들은 이제까지의 서체들에 비할 때 무척 실험적이고 파격적이다. 그러나 이 파격은 그가 훈민정음 해례본에 담긴 한글의 제자 원리를 충실히 연구하고 완벽히 이해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파격적인 새로운 서체로 안상수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자유로운 글자의 운용이었다. 편집디자인과 포스터 디자인에서 발휘된 그의 개성 강한 타이포그라피는 이제까지 진흙 속에 감춰졌던 한글의 조형적 가치를 일깨워 단조롭던 우리 한글 타이포그패픽 디자인에 변화를 가져왔고 새로운 서체 개발의 물고를 터주었다.
한글, 늘 새로운 상상력으로...
디자인의 근본을 한글에 두고 있는 안상수에게 한글 타이포그래피는 일이며 공부이며 동시에 유희이다. 자연스럽게 그가 한글에 대해 갖는 관심은 글자의 기능과 시각성에 머물지 않고 다방면으로 확대되어, 문학과 예술과 우리의 전통문화까지 아우르고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이 한글로 디자인한 대문안에 살고 있으며, 넥타이와 셔츠의 멋진 한글무늬도 도안하였고, 때로는 거꾸로, 주변에서 발견한 사물들을 탁본하여 사물 속에 숨은 한글을 찾아내면서 인쇄물을 탈피한 생활 속 한글, 환경 속의 타이포그래피를 실현하고 있다. 자신과 주변 친구들, 시인 이상의 초상을 각자의 한글이름으로 그리는 이른바 글자초상(typo-portrait)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뒷머리에 자신의 이름 첫 글자들을 이발해서 새겨넣는 등 한글과 관련된 흥미진진한 그의 행적과 작업들은 한글에 대한 그의 샘솟는 애정을 확인시켜준다. 안상수의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모든 활동 중에 발휘되는 그의 예술적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한글로 할 수 있는 모든 것, 한글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상상하며 실험해보는 그의 열정은 다분히 예술가적이다. 한글에 대한 거침없는 상상에서 비롯된 자유로운 발상들이 적용된 그의 포스터들은 전달되는 정보와 시각 이미지가 통상적인 포스터의 설명적인 대응을 벗어나며, 창의적 해석과 표현으로 매우 실험적이고 개성적이다. 이는 디자이너로서 그의 감성이 이 순수예술과 커뮤니케이션 사이에서 교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위 '작가주의적' 성향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도 있을 수 있으나, 역사적으로 현대 디자인이 당대 미술과의 긴밀한 유대를 통해 진보적 발전의 자양분을 얻어왔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역으로, 고갈되지 않는 예술적 상상력을 스스로 발휘하는 안상수는 오히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지속적인 생산성 또는 생식능력을 기대하게 한다.
존경하는 인물로 오로지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창조의 모범으로서-과 시인 이상李想-글자 운용의 선배로서-을 꼽을 만큼 디자이너로서 한글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안상수의 이번 개인전은 한글 타이포그래 피의 특성이 잘 나타난 포스터 40 여점과 개성있는 편집 디자인이 돋보이는 도서들, 한글 대문, 탁본, 벽 작업, 자료사진 등 다양한 전시물을 통해 안상수의 디자인 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서체 개발과 디자인의 차원을 넘어 한글에 대한 안상수의 폭넓은 디자인 의식과 다양한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이번 전시가 한글 전용(專用)에 대한 반론과 영어의 일상화 등 세계화의 기치 속에서 끊임없이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 한글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주산국제예술제, 1995-2001, 옵셧인쇄/ 해변의 폭탄고기, 제1회 비무장지대 예술문화운동 작업전을 위한 에스키스, 실크스크린 / 한글 만다라, 한글날 기념 포스터를 위한 에스키스, 실크스크린
일반적으로 안상수의 포스터는 정보를 직설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행사의 본질을 형상화하여 전달하고 있다. <서울건축학교를 위한 포스터>에서는 종이를 접거나 오려 3차원의 공간을 만들어 건축의 입체감을 표현하는가 하면, <죽산예술제를 위한 포스터>의 행위적인 붓선은 축제의 자유로움을 훌륭하게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또한 그의 포스터에는 활자가 적극적인 조형 요소로 사용되고 있는데, <한글 만다라>와 <한국의 이미지-관음 얼굴>은 한글의 자모를 의미와 분리시켜 그 나름의 형태로 재구성하는 안상수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전형적인 예이다.



문자도 ㅅ, 1996 / 자화상:글자얼굴, 1998/문자도 마르셀에의 경의, 2001 옵셧인쇄
원래 문자도(文字圖)는 글자의 의미와 관계 있는 상징물을 그려 넣어 서체를 구성하는 우리의 전통적 그림이지만 안상수의 문자도는 말 그대로 '문자로 만든 그림'들로 그 속에서 한글의 자모들은 자체의 현대적 조형성을 발현할 기회를 갖는다. 흰 바탕에 검은 ㅅ자로 자유롭게 구성된 그림들은 ㅅ자 발음 [s]의 날카로움과도 조응하는 예리한 맛을 느끼게 한다.


자화상: 글자얼굴 1998 / 문자도: 마르셀에의 경의 2001
안상수의 사진들은 그가 한글을 소재로 펼친 다양한 활동과 행적들을 보여준다. 특히, 자화상 사진은 사진 위에 이름의 한글 자모 ㅇㅏㄴㅅㅏㅇㅅㅜ로 구성한 타이포 초상을 겹쳐 인화한 것으로, 이름과 얼굴이 겹쳐져 동일시되는 환상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별 모양으로 이발을 했던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뒷머리에 자신의 이름 첫 글자 oㅅㅅ을 이발해서 새겨 넣은 사진 등 한글과 관련된 흥미진진한 작업들은 한글에 대한 그의 샘솟는 애정을 증명하고 있다.

언어는..별이었다.....의미가 되어 땅에 딸어졌다, 2002
이 짧은 시에는 안상수의 언어관이 담겨 있다. 언어는 원래 하늘의 별처럼 멀리서 빛나는 신묘한 힘인데, 사람이 그것을 언어화함으로써 구체적인 의미를 획득하여 신비의 베일을 벗고 땅으로 내려왔다. 언어가 우리 손에 포착되는 이 과정을 작가는 ㅇ자 형태를 통해 구현하고 있는데 별 모양을 한 ㅇ자들이 한순간 흔들려 땅에 떨어지려는 순간의 아쉬움과 놀라움이 축약되어 있다.

보소서\보고서 1997-1998
<보고서\보고서>는 작가가 만든 실험적 예술문화 무크지이다. 1호에 실린 선언문 내용에 따르면 이 책은 기존의 책이 담아왔던 내용인 문학 뿐만 아니라 음악, 무용 등을 포괄하여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실험하는 이미지의 창출처 역할을 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파격적인 구성과 현란한 타이포그래피가 전달하는 문화생산자들의 이야기들은 '상투적 글자 배열'을 벗어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보고서\보고서>는 책에 담기는 것은 글의 내용이라는 기존관념을 부수고 글뿐 아니라 활자에도 의미를 부여해, 내용전달에 종속되었던 글자들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보여 주고 있다.

글자들, 공백에 맞서 있다, 2002
9. 주련이란 우리의 글자문화를 알 수 있는 자료로 사찰이나 전통 가옥에서 법문이나 좋은 글귀를 나무판에 새겨 기둥에 붙이는 서각예술의 한가지인데, 시구를 연(連)하여 건다는 뜻에서 주련(柱聯)이라 부른다. 주련은 기둥 바깥쪽에 달려 있어서 법당이나 방 안의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으며, 이는 사람보다는 자연이 보고 읽어 달라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그간 주련은 한자로 썼으나, 작가는 이것을 한글 표현의 가능성의 새로운 매체로 사용하고 있다. 주련을 건 육면체 모양 구조물은 한글의 형태 중 가장 은밀한 형상인 ㅁ자의 형상을 빌려 자모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주련을 위한 건축적 구조를 제공하며, 글자 의미와 진리의 텅 빈 공백과 대비를 은유하고 있다. 주련에 새겨진 시들은 성철, 광덕 스님의 글 중에 발췌한 것으로 불교적 깨달음의 말씀이다.
모란 꽃 마노 계단에 피고
백설조 산호 가지에 운다.
성철
수양버들 실끝마다 푸르고
복숭아꽃 송이송이 붉도다.
성철
선지식善知識들 함께 모여 동지를 삼고
무진장 복의 물결 순환하오며
본지풍광本地風光 어느 때나 현전하여서
법의 수레 미묘법문微妙法門 굴려지이다.
광덕

a, 그리고 ㅎ까지, 2002
10. '한글'의 첫 자음이기도 한 ㅎ자는 작가에 따르면 한글의 형태적 특성을 나타내는 '한글 중에서도 가장 한글다운 글자'이다. 직선과 곡선이 모두 들어간 유일한 자모로서 조합의 의미가 강한 ㅎ의 형태는 조형적으로 흥미로운데 작가는 이 글자에서 의미를 배제하고 ㅎ의 꼭지를 늘려 조형성을 극대화하였다. 한없이 늘어난 ㅎ자는 전체적으로 느슨한 포물선을 그리고 있으며, 선의 머리와 꼬리 부분의 형태는 놀랍게도 그리스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파a와 유사하다. 그리스 알파벳의 첫 글자와 한글 자음의 마지막 글자가 만나는 "a, 그리고 ㅎ까지"라는 제목은 "알파에서 오메가까지(처음부터 끝까지)", 즉 모든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서구 알파벳과 한글의 예기치 않은 만남을 상기시킨다.
출처 : 로댕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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