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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6일 ~ 2018년 12월 8일
사랑밖엔 난 몰라―친밀한 우정으로 인해 실패한 에로스에 대해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의 표정이 담긴 낡은 사진을 보고, 그의 오래 묵은 증언을 듣고, 그의 주름진 신체가 다시 분장해도 내가 그에게서 알아내고자 하는 것은 이내 실패해 버린다. 결국 내가 그들로부터 확인하려고 드는 것은 다시 그들을 분류표의 각주로 만드는 것 같다. 좀 더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선택지에 다시 욱여넣는 일이 된다. 사회적으로 공인된 분류표는 예나 지금이나 있었다. 다만 조금씩 더 세분될 뿐이다. 더 엉성한 굵기의 분류표만 있던 때에는 그 분류들 사이의 간격이 꽤 컸다. 스스로를 간격에 위치시킬 수밖에 없는 누군가는 그 공공연한 비밀을 누설하기보다 어디에든 그 스스로를 끼워 맞추는 편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에 속해야만 하는 일을 그만둔, 그래서 보였다가도 이내 숨어버리는 감각들. 그 끼워 맞추기의 부대낌은 늘 새삼스럽다. 게다가 이 부대낌에 대한 감지는 오직 그것을 감응해온 그 자신의 몸으로부터 비롯된다. 그 스스로가 살아낸 것 외에 그 무엇도 이 부대낌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니 도무지 이편에서는 알 수가 없다. 게다가 부대낌이라는 감각조차 고정된 성질이 아니라면? ‘사이’가 있다는 것은 진실이나 가변성이 그 진실의 본성이고, 수행성이 그 진실의 특질이라면 누가 그 ‘사이’에 대해 함부로 단언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의 말처럼 “누구도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아직 규정하지 못했”다. 이 글은 정은영 작가의 <여성국극 프로젝트>의 몇 작품을 통해 감각지의 덩굴손이 뻗쳐온 내력을 만져본다.
멋으로 이루어져야만 해
바지씨에게는 삶의 원칙이 있다. 그중에서도 치마를 대할 때의 원칙이 아주 중요한데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무릇 바지란, 자기 처마(치마)한테 모든 것을 다 해주어야 한다. 첫째 처마가 걷게 해서는 안 되고, 무거운 것을 들게 해서는 안 되고,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 심지어 ‘모든 것이 멋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 바지씨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바지씨는 계속 이탈해버리기 때문이다. 바지씨는 ‘몸의 영구한 되어감 becoming(아무리 미묘할지라도 항상 기존의 것과 다른 것이 되어감)’의 기차에서 뛰어내릴 수 없다. 이 되어감 becoming은 노화라는 선형적 시간 안에서 자꾸만 비선형적 시간성의 복기를 일삼는다. 흑백의 옛 사진들이 담긴 앨범을 넘겨보며 서표를 꽂는 바지씨에게 원칙이란 오로지 그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원칙은 되어감becoming과 되어가지 못함 un-becoming을 동시에 접속하는 몸이 그 무엇과도 말썽을 일으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만들어낸 사회성 가득한 관습의 일종이다. 이 관습은 그 당시의 시대적 요구를 결코 거스를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요구를 더 스테레오타입화 해 만들어진다. 그것만이 바지씨가 바지씨로 존재하며 그 있음을 증명해 낼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바지씨에게서 발견되는 사랑의 태도가 바지씨 외부로부터 강요된 표피모방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모종의 곤란함이 생긴다. 이 곤란함의 정체는 그가 ‘순전히 마음으로 느끼고 정신으로 느껴야 된다’고 말하는 것으로 비롯된다. 바지씨는 ‘가도 마음이 먼저. 눈이 먼저. 이렇게 가서 몸이 따라와야’ 한다고, 그 와중에 ‘반드시 멋이 들어가야 한다’고 거듭한다.
덧올린 세월
고운 발색의 화려한 비단옷을 입는다. 반면 얼굴에는 검은 연필로 구렛나룻을 거칠게 그려넣고 대중없이 문지른다. 붉고 두껍게 그려넣는 입술이라던가 한없이 치켜올린 눈썹, 가짜 속눈썹보다 훨씬 길고 거친 턱수염까지 붙여넣으면 이 일련의 변장이 아름답기 위해서인지, 사내답기 위해서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용맹하면서도 로맨틱한 니마이가 되었다가, 훼방꾼 노릇의 나쁜 가다끼가 되었다가,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삼마이가 되기를 반복한다. 그의 몸에 덧올린 옷과 화장은 아무래도 그의 제스처를 바꾸는 것 같다. 무대 위가 아니어도 분장의 순간은 지속된다. 분장이 덧올려진 몸은 더 적극적으로 누군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리를 꼰 채 비스듬히 앉아 몸집을 키운다. 지향이 불분명한 과장된 덧칠로 어떤 힘이 생긴다. 의상을 벗고 화장을 지워내도 몸의 감각은 쌓인다. 그렇게 ‘분장의 순간’은 ‘분장하는 몸의 영구한 되어감’으로 그 변모를 지속한다.
“나는 한 달로 치면 보름은 남자로, 보름은 여자로 살았다고 해야 옳을 것 같애. 연극할 때만큼은 내가 완전히 남자 같지. 그렇게 안하면 또 안되고. 그 참 신기한 게 남자역할 하는 사람 있죠? 유방이 없어요. 그것이 왜 그러냐 하면 무대에서나, 무대에서는 완전히 남자지 이거는. 집에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게 정신없이 왔다갔다하고 연습해야 되고 나는 경리도 봐야하고. 진짜로 무대에서는 남자가 되니까. 그리고 평상시에도 남자같이 해야 무대에서 남자 같이 나오지 평상시 여자같이 하다가 갑자기 무대에서 그게 되나 안되지. 남자같이 이렇게 걸음걸이도 그렇고. 처음에 애 먹었어요. 바지에다가 스포츠 스타일 같은거, 이런걸 많이 입고. 스커트는 얼마 입은 게 없어요. 어색하고. 야 니가 말이지 남자다 생각을 하고 이렇게 탁 남자같이 끌어당겨라 여자를. 왜 무서워서 이러냐. 그럴 필요 없다. 터치를 해도 과감하게 해라, 남자같이. 그러다보니까 자연 남자같이 되는 거죠.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리고 숨이 가빠진다 말이야. 안으면 역시. 결혼을 안 시키고 그러면은. 다 큰 사람들이. 그럼 어떡하냐고. 서로 형제간 같이 언니동생으로 가깝게 하다보면은 정이 든다는거여. 그건 어쩔 수 없는거여 인지상정이라. 나는 그걸 언니 동생으로만 생각을 했지. 근데 난중에 얘기를 들으니까 내가 결혼했다는 얘기를 듣고 많이 실망을 했다더라고. [...]” 몸의 감각은 덧올린 분장과 의상, 늘어가는 주름과 함께 고유한 세월이 된다. 이를테면 기형도의 시에 등장하는 늙은 사람은 ‘쉽게 들켜버린다’. 동시에 ‘여전히 입을 벌린 채 /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의 육체 속에 /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 무엇이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말을 삼킨다. 이것은 일종의 회한이다. 회한에는 그 대상을 복기하며 애도하다 다시 감응할 수 있는 시간이 소요된다. 이 시간은 오랜 세월에 걸쳐 그릇된 감각이란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에로스 없는 정동
1911년 일본에서 여학교를 같이 다닌 두 여성이 ‘동성연애’ 동반 자살을 했다는 뉴스는 당시 떠들썩하게 언론에 보도되었다. 1920년대에 ‘S관계’로 일컬어지던 동성간 친밀성에는 분명 성애적 관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1950년대 여성국극을 둘러싼 성애적 정동은 때때로 ‘친밀성’ 으로 인해 누락되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여성 간의 공동체에서 발견되는 친밀성은 합리성에 치우친 남성들이 더 나은 남성이 되기 위해 배워야 하는 것 (앤서니 기든스)’으로까지 추앙되었던 적도 있다. 이 ‘친밀성’이 여성성의 전유물로 환원되고, 여성 간의 관계를 다시 ‘친밀성’으로 규정하는 탈성애적 메커니즘은 섹슈얼리티 정치를 무력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이 독특한 우정, 로맨틱한 우정의 관계는 결코 이성애중심주의를 거슬리게 하지 않으므로 충분히 배워 마땅할 태도로 갈음되는 것이다. 물론 “오직 보편적인 생각들만이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들이라야 이른바 그들의 <지성>에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토록 강렬한 사랑의 정동을 가진 팬덤 문화9는 가상결혼식10을 해도 질투를 불러일으키지 않고, 혈서로 된 팬레터도 성애적 사랑은 아니며, 결혼할 때 남편에게 “좋아하는 언니들이 있다. 이해해주겠느냐.” 말한다 하더라도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 규수’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근사한 오독조차 글렀다. 누군가의 삶의 단편을 들여다보며 몇몇 곁가지의 이야기를 꺼낼 수는 있겠지만, 그 저마다의 개별성과 고유성이 사랑의 속성이며 애초에 배타적 앎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의 본성이라면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에게서 이미 발견할 수 있는 것에 그칠수밖에 없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번뇌망상이라 버릴건가. (...) 죽음을 무릅쓰고, 천한 몸도 불구하고,
불길같은 정성으로 나한테다 마음을 줬나. 어리석다 할 것인가. 사내답다 할 것인가.’
/ 박수지
전시: 정은영
기획: 박수지
주최: d/p
협업: 구십구, 새서울기획, 소환사
그래픽디자인: 새서울소사이어티
후원: 우리들의낙원상가, BOAN1942, 한국메세나협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고마운분들: 송주원, 이원호, 최성우
출처: d/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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