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동사진미술관
2015년 8월 1일 ~ 2015년 8월 30일
숨을 몰아쉬게 할 정도로 가파른 언덕과 계단들, 거리 곳곳에 나붙은 ‘시다구함’, ‘객공구함’과 같은 사람 구하는 쪽지들, 그리고 열린 문틈으로 내려다보이는 지하 공간의 공장들, 골목마다 어김없이 버티고 서 있는 오토바이들 …. 이런 모습들이 우리나라 봉제산업의 1번지, 창신동 현재의 얼굴이다.
과거 6, 70년대 변변한 중공업 생산이 없을 당시, 대구나 부산지역의 신발산업과 더불어 서울 동대문 일대의 봉제산업이 우리 경제의 근간이었던 적이 있다. 이곳이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라는 사실로부터 다가온 울림이 사진작업의 시작이 된 셈이다. 말로만 듣던 그 봉제 현장은 어떤 모습일까? 열악한 환경 속에서 40여년을 버티어온 면면은 어떤 모습일까? 또 과거에는 어떤 과정을 거쳐 옷이 만들어졌고,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바뀌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인터뷰와 사진으로 기록한지 3년여 만에 맺은 결실이다.
적게는 3천여 개, 많게는 6천여 개라고 말하는 창신동 봉제공장 중에서 공장주, 종업원, 중국 동포, 네팔 근로자 등 40여 명을 만나 그들의 봉제와 더불어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함께 펴내는 책(『창신동 이야기』눈빛출판사)에는 33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역시 전라도나 강원도 출신이 많았다. 과거 그 지역에 힘을 쓸 만한 공장지대가 없었으니, 그 만큼 일자리가 적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일찍 대처로 나가 돈을 벌어야 했으리라.
특히 봉제의 특성상 많은 수를 차지한 여성 근로자들의 지난 삶에는 더 큰 애환이 묻어있다. 어린 여성 근로자들이 오직 기술을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겪어내야 했던 힘든 과정도 눈물겹다. 그러나 성년이 되고 결혼을 한 이후에도 자식으로서 뿐만 아니라, 아내, 엄마, 직장인으로 1인 4역을 감당해내야 했던 과정은 어린 시절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하고도 당연한 것처럼 취급되던 여성에 대한 우리의 모순된 편견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또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던히도 인내하던 여성 근로자들의 삶에는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이를테면 “처음에는 5,900원 받다가 3개월 지나니까 11,000원으로 올려줬어요. 너무 너무 좋아서 제대로 걸어가질 못했어요.”는 1976년 16살짜리 한 소녀의 이야기다. 그리고 “1월에 가서 2월 10일에 첫 봉급을 탔는데, 기본급 60,000원, 야근하면 주는 특근 수당 64,000원해서 124,000원을 처음 받았어요. 너무 기뻐서 울었어요. 경리 누나들이 왜 우느냐고 달래고 그랬어요.”는 1982년 17살짜리 한 소년의 이야기다. 구술에서 보듯이 어린 나이에 노동으로 얻은 대가에 대한 마음가짐은 요즘과는 사뭇 다르다. 흔히 아르바이트 개념의 용돈벌이가 아니라 가족의 생계와 생존의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시작으로 재봉틀, 또는 재단판과 더불어 살아온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3년여 이어진 이 작업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뿐 아니라, 작업 내내 행복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엄상빈)
출처 - 서학동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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