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의동 보안여관
2026년 10월 3일 ~ 2026년 10월 28일
믿음의 프레스
홍이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유해나의 작업에는 자주 무언가를 더 나은 상태로 만들겠다고 약속하는 사물들이 등장한다. 담금주와 건강보조제, 화장품과 마사지 기구, 요가 매트와 필라테스 기계, 그리고 최근에는 헬스장의 운동기구까지. 이 사물들은 서로 다른 용도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된 전제를 공유한다. 지금의 몸은 충분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관리되고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건강하고, 더 젊고, 더 아름답고, 더 효율적인 몸. 유해나는 이러한 약속을 웰니스 산업의 허구라고 폭로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약속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과 장치들을 작업실 안으로 가져와 해체하고 연결하면서 그것들이 신체와 맺는 관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유해나의 신작 <EX006A>은 이러한 작가의 관심을 신체를 단련하는 기계에서 이미지를 찍어내는 기계로 옮겨놓는다. 헬스장에서 사용되는 운동기구를 분해하고 그 부품을 다시 조합해 일종의 인쇄기(press machine)를 만드는 것이다. 본래 인간의 몸에 저항을 가하고 특정한 동작을 유도하던 기계는 투명한 폴리우레탄 비닐 위에 압력을 가해 흔적을 남긴다. 중요한 것은 운동기구가 단순히 인쇄기의 외형으로 변신한다는 데 있지 않다. 프레임과 케이블, 도르래와 무게추가 만들어내던 힘은 유지되지만 그 힘이 닿는 대상은 달라진다. 서로 다른 기능과 규격을 가진 부품을 재조립하는 만큼 그것은 일반적인 인쇄기의 완결된 형태에 이를 수 없으며, 두 기계 사이의 어딘가에 놓인 불완전한 형태를 갖는다.
<EX006A>에서 ‘press’는 추상적인 ‘압박’의 은유보다 힘을 가해 물질을 다른 표면으로 옮기는 인쇄의 물리적인 행위와 관계한다. 신체에 저항을 가하던 운동기구의 부품은 투명한 폴리우레탄 비닐을 누르는 장치로 다시 조합되고, 그 위에는 일반적인 잉크 대신 마그네슘 파우더와 유산균, 칼륨 파우더, 히알루론산액을 혼합한 물질이 흔적을 남긴다. 이들은 신체를 구성하거나 그 기능과 관계하는 성분인 동시에 건강과 미용을 위해 상품으로 생산되고 판매되는 물질이기도 하다. 영양제의 성분으로 섭취되거나 피부에 바르는 형태로 소비되는 물질들이 작업 안에서는 몸으로 들어가는 대신 비닐의 표면에 압착되어 이미지의 재료가 된다.
운동을 위해 만들어진 부품을 다시 조합한 장치는 일반적인 인쇄기처럼 균일한 압력을 전달하기 어렵다. 압력의 차이와 마찰, 재료의 양과 점도, 기계의 움직임에 따라 물질은 밀리고 번지며 얼룩과 같은 불균질한 흔적을 남긴다. 투명한 비닐 위에 놓인 물질은 종이에 스며드는 잉크와 달리 표면에 그대로 남아 색과 농도, 물질의 상태를 드러낸다. 정확한 형태를 복제하기 위한 인쇄와는 달리 이미지는 기계와 재료가 매번 만나는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몸을 변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기계와 몸을 위해 판매되는 물질이 만나면서 신체를 향하던 힘과 물질은 이미지의 표면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양가성은 유해나가 건강과 치유를 다뤄온 방식에서 반복해서 발견된다.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사물은 한편으로는 실제로 몸을 편안하게 하고 회복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의 몸이 충분하지 않다는 판단을 끊임없이 환기한다. 그래서 그의 작업에서 돌봄은 통제와, 치유는 교정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작가가 자기관리의 욕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욕망을 자신 역시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은 채, 우리가 기꺼이 몸을 맡기는 사물과 기계의 동작을 조금 과장해서 보여준다. 몸을 위한 행위가 어느 순간 몸을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에서 생겨나는 유머 역시 여기에서 비롯된다. 기계에 내장되어 있던 힘이 어디로 향하고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EX006A>에서 신체를 구성하고 관리하는 물질의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유해나의 작업에서 기계는 이처럼 주어진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도구로 머물지 않으며 점차 중요한 조각적 방법론으로 자리 잡아온 과정과 연결된다. 그의 기계는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효율적인 자동화 장치와는 거리가 멀다. 냄새를 퍼뜨리고, 액체를 이동시키고, 몸이나 표면을 누르고, 진동을 전달한다. 때로는 과도하게 움직이고 때로는 쓸데없는 일을 반복한다. 효율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의 논리는 빌리면서도 그 목적을 비껴가는 셈이다. 이때 기계는 어떤 개념을 대신 설명하는 상징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움직이고 누르고 흘리면서 공간과 신체에 물리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기계와 신체의 관계 역시 한 방향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유해나에게 해체와 재조립은 사물의 형태를 바꾸는 조형적 방법인 동시에 사물에 이미 주어져 있던 기능과 목적을 다시 묻는 방식이다.
이러한 태도는 작가가 오랫동안 다뤄온 ‘믿음’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유해나가 선택하는 사물에는 몸이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가 투영되어 있다. 건강과 치유, 아름다움과 젊음에 대한 욕망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은 상품과 서비스, 기술의 형태로 유통된다. 운동기구에서 화장품과 영양제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상품들은 현재의 몸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고, 단련하고 보완함으로써 더 나은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상품의 효능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몸이 계속해서 변화할 수 있고 또 변화해야 한다는 믿음이 함께 놓여 있다. 그러나 유해나는 그 믿음이 진짜인지 거짓인지를 판별하지 않는다. 효과를 의심하면서도 약을 먹고, 화장품을 바르고, 운동을 하는 것처럼 믿음과 의심은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충분히 믿지 않으면서도 계속 구매하고 실천한다는 점에서 웰니스의 세계는 더욱 복잡해진다. 그의 작업에서 신체는 자본이 만들어낸 욕망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대상이라기보다 그 약속을 의심하면서도 기꺼이 참여하고 수행하는 장소에 가깝다. 작가가 관심을 두는 것은 바로 이 모순적인 상태, 신체와 관계된 물질이 상품이 되고 그 상품이 다시 몸을 관리하는 행동과 감각으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이러한 점에서 유머는 유해나에게 하나의 정치적 태도가 된다. 더 건강하고 아름답고 효율적인 몸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하기보다, 그 요구를 수행하도록 만들어진 사물의 기능을 조금 비틀고 기계가 향하던 목적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는다. 몸을 단련하던 기계는 이미지를 만들고, 몸속으로 들어가거나 피부에 발리던 물질은 투명한 표면 위에 흔적을 남긴다. 각각의 사물과 물질은 여전히 원래의 성질을 지니고 있지만 더 이상 예정된 방식으로만 사용되지 않는다. 주어진 질서의 바깥을 선언하는 대신 그 안에서 작동 방식을 어긋나게 하는 것. 유해나의 작업은 우리가 믿고 소비하며 몸으로 수행하는 것들을 잠시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을 갖는다.
주최 및 주관: 유해나 @haenayooo
글: 홍이지
공간 설치:: 데칼코마니 @_decal_comanie_ (박재연 @_jaeyeon_park, 안윤기 @giahn.art)
기술 지원:: 이시은 @leesieun
제작 도움: 이시은 @leesieun, 김승현
전경 촬영: 이동웅 @woodonn
후원: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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