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래예술공장
2024년 6월 24일 ~ 2024년 6월 30일
윤영호, <The Card Players>, 캔버스에 유채, 100 × 80.3cm, 2024
조용한 위로
고결
주어진 일을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 다양한 관계 속 역할에 대한 책임감. 현대인은 수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그 누구보다 위로와 공감이 필요한 시간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한탄해도 답은 없고 피하려 해도 벗어날 수 없기에 도망치기보다는 그 안에서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답답한 현실 속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그 해답이 혼자 조용히 명상을 즐기거나 산책하는 시간일 수 있다. 또 어떤 이들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돌본다.
윤영호(b. 1987)의 《Pool = 숲 Blue Forest》은 이처럼 오늘날 지쳐있는 관람객을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수영장과 숲이 작가에게 치유의 공간으로 작용하는 것에서 비롯된 전시명은 문자 그대로 읽으면 ‘풀은 숲’이 되고, 소리 나는 대로 적어 보면 영문 제목인 ‘Blue Forest’를 뜻하는 ‘푸른 숲’이 된다. 영문, 특수기호, 국문이라는 세 가지 서로 다른 문자를 조합하여 만들어 낸 전시명을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듯이, 우리는 작가의 화면에 다양한 층위를 투영하여 접근해 볼 수 있다. 윤영호는 자신이 마주하는 이미지를 수집하여 회화의 형식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수행한다. 올 초 선보인 개인전 《으스름 달 Gloaming Moon》에서 그가 이방인의 시각으로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이국적인 풍경, 특히 동서양 문화가 공존하는 장소에 집중했다면, 이번 전시는 작가 개인의 온전한 시각으로 바라본 장면을 제시한다.
작가가 문래예술공장에서 선보이는 20여 점의 회화와 드로잉은 크게 세 개의 주제로 구성된다. 먼저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 하는 〈하얀 버드나무 White willow tree〉(2023), 〈위로자 Comforter〉(2023), 〈차가운 달 Cold moon〉(2023)과 같은 작품을 볼 수 있는데, 화면 속 달과 나무가 등장하는 것 또한 공통된 특징이다. 이들은 우리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지나치기 쉬운 대상이다. 그러나 윤영호의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두 가지 소재는 작가에겐 조금 특별한 존재이며 그의 삶을 설명하는 기호로서 역할도 감당한다. 오랜 유학 생활로 외로웠던 작가에게 달과 나무는 위로가 되었고, 그래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자아가 불안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과거를 떠올리고 노스탤지어는 이러한 부정적인 상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감정이다. 즉, 노스탤지어는 단순히 과거 그 자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결핍과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선택적으로 불러들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때 소환되는 과거는 특정한 어떤 것이기보다는 현실에서 결여된 부분이 충족된 형태로 재탄생한다고 볼 수 있다. 익숙하기에 쉽게 간과할 수 있던 풍경을 담은 작가의 화면은 지지와 공감이 필요한 현실의 모습을 반영하여 무심한 듯 위로를 건넨다.
익숙한 화면에서 자신만의 프레임을 구축하기 위해 작가는 이전보다 좀 더 다양한 이미지를 접하고자 노력했다. 작업을 처음 시작했던 초심으로 돌아가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부터 다시 시도한 것이다. 그리하여 앞서 살펴본 작품과는 결이 조금 다른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 The card players〉(2024), 〈예술가의 초상 Portrait of the artist〉(2024)과 같은 작품이 등장하게 되었다. 작품의 제목과 이미지를 재현한다는 두 가지 조건으로 미루어, 그의 화면과 조우하기 전 우리는 어떤 모습을 마주하게 될지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윤영호는 프랑스 인상주의, 입체주의를 대표하는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 영국 팝아트의 대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1937-)와 같이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를 조망했다. 사조를 불문하고 다채로운 작품을 모방하며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고자 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주변에서 쉽게 마주했던 풍경을 화면에 사실적으로 구현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살짝 비틀어 낯선 방식으로 캔버스를 채워나간다. 작가는 흰색 두터운 선을 활용하여 인물의 윤곽을 표현함으로써 인물과 배경을 분리하거나, 또 다른 시공간에 인물이 들어선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다시 말해, 윤영호는 새로운 실험을 일삼으면서도 일상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잃지 않으며, 그의 색을 완성한 것이다.
나아가 구상이지만 비재현적인 작업은 완벽히 펼쳐진 작가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생경한 그래서 때로는 당황스럽고 몽환적인 그의 화면은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나는 자작나무 숲에서 굶주린 사자를 만났다 I met the blood thirsty lion in the birch tree grove〉(2024)는 캔버스 두 개를 이어 붙여 만든 200호짜리 대작으로 관람객을 압도하는 크기의 화면이다. 작품 앞에 선 우리는 호수를 앞에 둔 황량한 자작자무 숲 사이로 뼈가 앙상하게 드러날 정도로 굶주린 사자와 눈이 마주치게 된다. 인간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는 사자 또한 영문은 알 수 없지만, 긴장된 시선으로 화면 너머 관람객을 바라본다. 윤영호는 13세기 이탈리아의 작가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가 저승 세계 여행을 주제로 집필한 『신곡 La Divina Commedia』을 재해석하여, 관람객이 기존의 서사를 따라가는 것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려 한다. 소설과 작가 개인의 경험을 뒤섞어 다중적이고 모호해진 의미들은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끊임없는 위기와 절망 속에서도 언제나 한 줄기 희망이 존재하는 것처럼, 결국 작가의 이 화면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습을 압축한 형태로 제시한다.
이처럼 윤영호는 개인적 서사에 켜켜이 풀어낸 참조를 더 해 관람객을 치유하는 매개체로서 회화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작가 자신이기도 하고, 나아가 불특정 다수의 누군가로 다양한 내러티브를 부여하여 관람객을 상상하도록 만든다. 그의 화면 속 풍경은 어려운 인간관계나 일상의 스트레스처럼 현실에서 피하고자 하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다만 전형적인 캔버스에 가끔은 낯설고 이질적인 것을 덧붙여, 잠재되어 있던 우리의 심리상태를 파고든다. 그 결과, 우리 앞에 놓여 있지만 다루기 힘들어 어쩔 줄 몰랐던 구체적인 감정을 극복할 수 있도록 내면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에 힘을 실어준다. 작가의 캔버스를 마주하는 것은 지금 각자가 처한 막막한 현실을 직시하라고 떠미는 것이 아니다. 그가 물속에서 힘을 얻었듯이, 관람객 또한 화면을 응시함으로써 나아갈 채비를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번 전시가 우리 모두에게 작가의 수영장 그리고 푸른 숲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기대한다.
참여작가: 윤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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