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토
2002년 3월 22일 ~ 2002년 5월 5일
로댕갤러리가 2002년도 첫 전시로 기획한 <이불 개인전>은 1980년대 말 이후 신세대 미술의 대표주자로 세계무대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여성작가를 소개함으로써 한국현대미술의 첨단을 제시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대학졸업 직후 미술계에 첫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자신의 신체와 괴물형태의 역겹고 우스꽝스런 천 조형물로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시도했던 작가 이불은 남성본위의 사회에 페미니스트로서 맞섬으로써 모더니즘과 민중계열로 양분되었던 80년대 말의 경직된 미술계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후 썩어가는 물고기나 반짝이 시퀸, 풍선과 실리콘 등 과도한 장식성과 냄새, 촉감 등 미술계에서는 낯선 감각의 비관습적인 재료를 이용하면서 그는 몸의 정치학과 대중문화, 테크놀로지와 미래사회, 더 나아가 엘리트 문화와 미술사 등 현대미술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이슈들을 섬세하고도 치열하게 다루어 오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우리사회의 대표적 놀이문화인 노래방의 메카니즘을 비디오 작품에 도입함으로써 시간과 기억,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내재한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일에 도전, 현대문화에 대한 비평적 시각을 더욱 확장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그간 세계 미술계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소개될 기회가 없었던 근작들로 구성되어 있다. 관객이 참여하여 모뉴먼트 조각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될 초대형 풍선작업 <히드라 Hydra>와 노래방 비디오 3부작인 <아마츄어><송가 頌歌><리브 포에버> 및 노래방 부스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 그리고 사이보그와 몬스터 조각의 최신 버전이 그것이다. 이들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휴고 보스상 후보작가전(1998)을 비롯하여 베니스 비엔날레(1999)와 상하이 비엔날레(2000), 그리고 유럽과 미국의 유수 미술관 전시에 초대된 바 있다. 상충하는 이율배반적인 가치의 공존을 현대적 삶의 속성으로 파악하고 작품으로 형상화해 온 이불의 최신 작업은 한국사회의 단면은 물론 포스트모던한 동시대의 세계관을 담아 낸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특히 이번 로댕갤러리에서의 전시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거부하고 인체의 부분들을 조립함으로써 조각의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한 19세기 조각의 거장 로댕의 작품세계와 인간과 기계의 결합체인 사이보그를 통해 완벽함을 향한 인간의 욕망과 인공적인 것에 대한 공포를 융합해낸 현대미술가 이불의 미래적 신체가 상호 비교되어 관객의 흥미를 유발할 것이다.

사이보그 W6, 2001
제목에서부터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읽을 수 있는 <사이보그>는 여성신체의 절단된 일부를 제시함으로써 디스토피아적 공포가 결합된 미래의 인간상을 보여준다. 구등신에 잘록한 허리, 긴 다리를 가진 <사이보그>는 실제 인간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이상적인 비율이 반영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 한계를 극복한 미래 전사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소녀와 성숙한 여인을 결합한 남성중심의 성적 대상물이라는 점에서 결코 전통적인 성 모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매끈한 표면과 정제된 형태는 공장에서 찍어 낸 듯이 완벽하지만 사실은 하나하나 작가의 손 작업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서양미술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흰 대리석의 고전적 조각상에 비견된다.

몬스터, 2002
작가가 종이 위에 붓으로 그려 낸 섬세하고 복잡한 스케치에서 비롯된 몬스터들은 현실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괴물 생명체의 모습을 보여 준다. 과학의 발전에 따른 유전공학과 성형수술의 발달로 인체는 마음내키는 대로 변형시킬 수 있는 포스트 휴먼의 유동성을 드러내며, 그 결과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치명적인 몬스터들이 탄생한다. 많은 촉수와 절을 가진 갑각류같은 그것은 미래를 배경으로 한 공상과학 영화 속의 괴물-에일리언을 연상시키며, 인간과 에일리언 사이의 교합종같이 보이기도 한다. 인간은 신의 형태를 본딴 단일하고 고유한 인류의 영장이 아니라 그 자체가 변화하고 변태하는 생명체인 것이다.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 2000
끼리끼리 모여서 마이크를 부여잡고 소리지르는 노래방 문화가 일반화된 나라에서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은 이상한 체험을 안겨 준다. 이것은 대중이 함께 하는 놀이 공간이 아니라 개인이 분리되어 혼자서 겪어야만 하는 이세계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매끄럽고 단단한 표면과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내부를 가진 밀폐된 공간은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홀로 들어가야 할 방인 관을 연상시킨다. 이 속에서 타인의 시선없이 혼자 부르는 노래는 자기만의 공간에서 의식을 집중하여 관조하는 기회가 된다.

아마츄어들, 1999, 스틸사진
깊은 숲속의 공터에서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놀이에 열중해 있다. 단정한 제복차림에서 돋보이는 젊음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놀이는 폭력적인 결말을 암시한다. 자신들만의 규칙과 오락에 빠져 있는 소녀들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숨은 시선은 관람자들에게 관음적 쾌락을 주지만, 임의로 흔들리는 카메라의 시선 속에서 보는 이와 보여지는 이가 묘하게 하나가 되는 경험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 동양의 소녀들은 아시아 대중문화의 일면인 로리타 콤플렉스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이국적인 베일을 통해서 서구인이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의 향기를 강렬하게 풍긴다.

송가, 2000
성가나 찬가등 그것을 부르는 이들의 집단적 의식고양과 뚜렷한 목표 지향을 의미하는 제목과는 상반되게 이 작품은 낡고 더러운 서울의 구시가를 보여준다. 미래적인 비전에 의해 건립된 청계천의 건물들은 몇백년을 버틴 유럽의 고도와는 다른 의미에서 오래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며, 이미지만을 보았을 때는 아시아의 여러 도시에서도 볼 수 있는 다른 구시가와 차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 한밤중에 촬영된 상가의 쇠락한 이미지는 애국가를 배경으로 한 아시아의 고속 경제발전의 부산물로 경멸과 연민을 자아내지만, 저속촬영의 잔영은 나름대로 향수를 자극한다.

리브 포에버, 2001
호텔 라운지나 공항의 라운지는 수많은 타인들이 스쳐 지나 가면서 잠시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어딘가 다른 차원에 속한 듯한 이 곳에서 이국적인 밴드의 연주에 따라 춤추는 이방인의 군상들은 몰핑 기법에 의해서 서로 섞이고 녹아 들고, 이 짧은 시간 동안 시간은 중지하고 역류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아시스의 노래 제목에서 차용한 "영원한 삶 live forever"이라는 제목은 찰나의 춤과 노래 속에서 역설적인 의미를 가진다.
모든 작품의 배경으로 펼쳐지는 노래들은 1950년대의 전형적인 팝송인 사랑의 노래가 주종을 이룬다. 이 시기는 전후의 폐허 속에서 불안을 잊기 위해 낭만적인 로맨스로 현실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보여 주었는데, 이런 경향은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암울한 분위기가 지배하는 현재의 상황과도 비슷하다.
일반 노래방에서 경험할 수 있듯이 노래와 비디오 이미지는 상호 연관성이 없으며, 다만 그런 가라오케의 메카니즘과 문화적 장치들만이 이 작품들에 차용되었을 뿐이다.

히드라(모뉴멘트), 1998
단단하고 귀한 재료로 만들어서 영구히 보존될 수 있도록 제작된 기념비를 비웃듯이 괴물의 모습을 한 모뉴멘트 <히드라>는 바람이 들어가고 나옴에 따라서 빵빵하게 부풀었다가 꺼진다. 풍선 가운데 전사된 사진 속에서 구슬과 비단으로 동양인형처럼 치장한 작가는 오리엔탈리즘의 관능미와 함께 촉수를 잘라내도 분리되어 증식하는 히드라의 끔찍한 생명력을 내보인다. 고전적인 기념비와 이상적인 여인상의 의미를 동시에 전복하는 이중의 전략을 가진 이 작품은 또한 관객의 참여로 생명을 부여받는 최근 미술의 경향을 보여 준다.

퍼포먼스 비디오, 수난유감-내가 이 세상에 산책 나온 강아지 새낀줄 아냐?
이불이 처음 명성을 얻은 것은 직접 연출하고 공연한 퍼포먼스를 통해서였다. 작가는 나체로 천정에 매달리거나 괴물같이 분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여 관객의 눈을 잡아끄는 신선한 감동과 역겹기까지 한 충격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이 작품들은 관습적인 여성상을 비판하는 형이하학적이고 풍자적인 시도로 여성의 현실적인 신체를 보여줌으로써 부권중심의 사회에 페미니즘적 대응을 한 것이다. 직접 만든 괴물 의상 등 퍼포먼스와 관련된 소도구들은 현재까지 지속되는 부드러운 재료에 대한 작가의 관심의 단초를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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