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스페이스휴
2019년 11월 27일 ~ 2019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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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경에 나오는 하나의 몸통에 머리가 두 개 달린 공명조는 현재 한국의 상황과 닮았다. 남과 북. 두 체제의 대립. 좌우 두 진영의 대립과 갈등은 결국 한 머리가 다른 머리에 독을 먹여 같이 죽게되는 공명조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조선에 자리한 그 무엇이 두 머리를 가진 비극의 피조물을 탄생시킨 것일까. 조선 그대는 무엇이고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상현 작가는 1980년대 프랑스와 독일에서 퍼포먼스, 설치를 기반으로 하는 실험적인 작업을 시작으로 빅뱅과 별의 여행, 인공위성, 사하라 사막에 태양광으로 작동하는 외계통신용 인공달 기지를 세우는 작업 등, 공상과학 기반의 설치미술을 하며 현대미술의 떠오르는 작가로 주목을 받았다. 1999년 장선우 감독의 영화 <거짓말>에 출연하면서 작가로서의 그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작가로서의 그의 평가는 그야말로 일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당시 보수적인 화단의 입장에서 영화에 대한 비판은 배우였던 그가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작가가 경험한 한국사회는 배타적인 하나의 조직집단 이었다. 그 뿌리의 번민과 성찰, 현재 그가 작업하고 있는 조선 시리즈가 나오게 된 배경이다.
이번 전시는 2000년대 이후 조선 시리즈가 나오게 된 배경에 주목한다. 2011년 개인전 이후 8년 만에 갖는 개인전을 통해 드물게 소개되었던 그간의 영상작업과 이와 관련된 아카이빙 자료들을 통해 작업의 이면을 보다 면밀하게 살펴본다. 그는 근현대사를 헤집어 정치 체제의 갈등 속에서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인물들에 관심을 갖는다. 고종의 친손자인 이건, 제3인공위성을 쓴 백석, 중립국을 선택한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명준처럼 정치 체제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한 한 개인의 비극적인 삶에서 작가는 공감과 위로를 구하고자 했을지 모른다.
작가의 글
#1 공명조-두 개의 머리
공명조는 불경 속 에 나오는 상상의 새이다. 같은 어머니에서 태어나 한 몸통을 가졌으나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공명조는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밤낮으로 으르렁 거리며 끝없는 갈등과 분열 속에서 하루하루 상대가 파멸할 날을 노리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머리가 다른 머리의 먹이에 독을 탔다. 죽어가는 다른 머리 역시 복수의 독을 뿌렸다. 1950년 6월 25일, 6.25가 그날이었고, 2019년 오늘은 더 진화한 좌우 두 머리가 서로 독을 먹이려고 노리고 있다.
#2 6.25 일기- 남과 북 그리고, 도강파 비도강파
해방공간, 서울대학 사학과 교수였던 김성칠이 쓴 1950년 6월 25일의 일기를 보면, 불과 얼마 전에 북한은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 이름으로 <남반부 전체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와 전 조선인민에게 보내는 조국통일 추진 호소문>을 보낸다. 북한은 1950년 8월 15일 남북총선거로 구성되는 최고입법기구를 서울에서 여는 것을 제의 하면서, 우선 6월 15일에서 18일 까지 개성에서 예비회의를 열자고 제안하는 문서를 지닌 밀사를 파견한다. 이 문서를 지니고 38선을 넘던 밀사는 체포되고, 밀사는 전향하여 대북방송에 출연하며 반공선전에 동원되었다. 그런데 북한은 이승만등 남한의 실제적인 정치인들은 배제하는 조건을 달았으니, 이 호소문은 애시 당초 비현실적이었고, 북한특사가 단시간에 전향을 한 것은 필히 고문에 위한 강제 전향 일 것이라고 김성칠은 적고 있다. 당시 구금 상태인 조만식 선생과 김삼룡 이주하를 38선에서 맞교환 하자는 북한의 주장과 또 그를 받아치는 남한의 역 주장이 계속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당시 웬만한 식자들에게는 빤히 보이는 거짓연극으로 보였을 것이다.
1950년 6.25 당일 쌀값은 소두 한말에 3천원을 넘었고, 민생고는 극에 달해 사회는 피폐한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 6.25가 터지자 이승만과 주요 인사들은 한강다리를 끊고 서울을 빠져 나갔다. 서울에는 한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들이 남게 되었다. 김성칠도 피난을 못가고 서울에 남아 북한점령 삼 개월을 보내야 했다. 9.28 수복이후 서울로 돌아온 이승만은 남아 있던 사람들을 이른바 비도강파라고 불렀다. 남한 사회는 도강파와 비도강파로 나뉘었다. 비도강파가 부역자 심사를 벌였다. 이때 한강을 건너지 못했던 노천명도 감옥에 갔다. 김성칠은 1951년, 고향 영천에서 총을 맞아 죽었다. 그는 1946년 <조선역사>등을 저술했고, 펄벅의 <대지>, 강용흘의 <초당>을 번역했다.
#3 현충일- 두 개의 진영, 웃는 사람 우는 사람
지난 초여름 현충일이 며칠 지난 오후, 활터, 화살을 주우러 무겁터(과녁이 세워진 장소) 갔다가 오는 길에서 노궁사 말씀, “국립묘지 갔다 왔어 요즘은 현충원이라 하데... 참 많이 죽었어!”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노궁사 말씀을 이었다. “김원봉이가 국군의 창시자라니! 완전히 항복 선언인데...북한의 건국공신이 남한의 애국자가 되는 세상이 되었네!” 현충일 행사에서 대통령의 김원봉에 대한 연설을 듣고 국립묘지에 갔다 왔다고 한다. 노궁사 말씀 이어진다.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네! 비가 오면 우산장수가 웃고 해가 나면 나막신장수가 웃는다! 오늘은 해가 나니 우산장수가 우네! “나라를 완전히 두 쪽으로 갈라놓아!”
전시 작품

조선신연애, 49분, 2014
조선신연애는 1913년에 발표된 대표적 소설인 장한몽(일명 이수일과 심순애) 을 통하여 한국의 근 현대사를 객관적 시각으로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이다. 일제 식민시기를 거쳐 1960년대 이후 고도 경제 성장으로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비약한 한국경제기적의 뒤안길에 남은 우리 개개인의 인생은 무엇이고? 지금 어디에 서있나? 그리고 우리가 이룬 이 공동체는 무엇인가? 를 성찰하는 내용으로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갖게 한다.


조선 문답, 39분, 2017
조선문답은 영,정조 때의 실학자인 홍대용이 쓴 의산문답에서 제목을 따왔다. 홍대용의 제자인 화자가 250년을 살아남아 스승이 남긴 화두를 푸는 서사구조이다. 나는 홍대용이 살았던 18,9세기 조선 실학파들이 가졌던 한계를 생각하면서 이 작업을 시작했다. 조선실학자! 그들 역시 성리학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인생설계도에서 탈피할 수는 없었다. 중국이란 대국과 소국인 조선 사이에서 방황했다. 아마 지금이 진보엘리트들의 딜레마와 비슷할 것이다. 말로는 미국을 제국주의라 비난하면서 자신의 자식들은 미국영주권을 따게 하고 미국물건을 좋아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조선의 의식구조는 두 가지, 현실과 이상이 충돌하고 배신하는 이중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실학의 한계는 있었으나 조선의 주류가 이들을 받아 들였다면, 조선의 19세기와 20세기가 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해별곡, digital print, 55×43cm, 2014
서해별곡은 1954년 2월 마릴린 먼로가 백령도에서 미군 의문 공연하는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만들었다. 먼로는 동경에 신혼여행을 왔었다. 의문공연 요청을 받은 먼로는 동경 도착 당일에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대구비행장에 내렸다. 영화 나이아가라의 성공과 전설적 야구선수 디마지오와의 결혼으로 먼로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최은희가 대구비행장에 마중 나갔다. 두 사람 다 1926년생으로 28살이었다. 최은희는 153년에 <젊은 그들>에 출연했다. 2월의 추위 속에서도 여름드레스를 입고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임시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먼로는 자서진에서 그녀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한국에 있었던 4일 이었다고 했다. 지리산에서는 아직 전투가 계속 되던 때였다.

제복의 눈물, digital print, 70×105cm, 2014
이건은 융희3년 서기로는 1909년생이다. 의친왕의 맞아들이자 고종의 친손자이다. 만일 대한제국이 망하지 않았다면 왕위계승서열 두 손가락 안에 들었을 사람이다. 1919년, 의친왕이 상해로 망명을 기도하다가 일경에게 압록강에서 체포되었다. 일제는 의친왕의 작위를 어린 이건에게 강제상속 시킨다. 이때부터 열 살짜리 소년 이건은 소위 공전하라 불리었다. 영친왕과 마찬가지로 이건도 12살 때 일본으로 보내져졌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맥아더 사령부는 히로히토 일왕을 제외한 일체의 군국 화족작위를 박탈했다. 이건도 평민이 되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의 부인 요시코는 모모야마 댄스홀에 나갔다. 이혜원이 마지막으로 이건을 보았을 때 “나에게는 돌아갈 나라도 가족도 없다. 그저 여기저기 다니다 죽겠다” 한다. 당시 이승만은 친일파를 중용하면서도 구황실은 자신의 잠재적 정적으로 간주 하고 친일파라 공격하며 적대시 하였다. “검은해협”에서 이건은 “천왕의 명령으로 일본군복을 입었지만 나는 조선 사람이다”라고 진술했다. 그는 모모야마 겐이치로 개명을 했고 일본에 귀화했다. 2005년 영친왕의 아들 이구가 죽자, 친왕계의 장자인 이건의 자손들이 뒤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건의 자식들은 “아버지에 대하여 아는 바도 없고, 관심도 없다”라며 “이건” 존재 자체를 거부하였다. 1990년, 그의 장례는 천왕가의 주관으로 치러졌다. 이렇게 그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작가 소개
1953년 경기도 강화에서 태어났다. 1982년, 파리에서 국립장식미술학교를 다닐 때 타키스(Takis)의 Trois Totem을 보고 현대미술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동서냉전의 장벽이 있고, 독일신표현주의가 탄생한 베를린으로 간다. 베를린 국립조형미술대학(Hoschuler der Kunst) 입체조형과(Bildende Kunst), 동대학원에서 멀티미디어 클래스를 졸업하고 마이스터 슐러(Meisterschuler bei Rebbeca) 학위를 받았다. 1986년 베를린의 Galerie Horst Dietrich에서 Cobra 멤버였던 Shinkichi Tajiri 오프닝에서 <꿈 여름밤 동양>이라는 퍼포먼스를 하였다. 베를린에서 만난 Tajiri 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인생과 예술의 스승이 되었다. 같은 해, 베를린 영국군 점령지역인 GATO에서 폐기된 공군작전지도에 의거하여 대형 애드벌룬을 하늘에 띄우는 <겨울비행가를 위한 지대>를 설치하였다. 1987년, Haus am Luzopf Platz에서 퍼포먼스 <살해된 물고기>를 준비 하던 중 수조가 터져 전시실에 손상이 갔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였으나 퍼포먼스에 감동했다는 이유로 디렉터가 소송을 취하하였다. 여기서 Bettina Hoffman이 살해당하는 물고기로 출연하였다. 이 시기, 인생을 여행과 모험으로 살겠다고 생각하며 <잊혀진 전사의 여행> 시리즈를 만들었으며, Duncan Mecader, Nobuho Nakase, Dunja Everse를 만났다.
1988년 토탈미술관에서 <안드로메다에서 운명의 여신과 만남> 설치 퍼포먼스를 하였다. 이후 지질시계, 바람의 마음 등의 설치작업을 했고, 1995년 프랑스 Fluxus 기지였던 파리 바스티유에 있던 Gallerie Donguy 에서 Earth Moon Rising Project, 그리고 Arles Photo Festival에 퀸을 출품했다. 그해 피가로가 뽑은 차세대 작가 중 한명으로 선정되었다. 프랑스 국영 TF1tv, euro2 라디오에서 레즈비언 사회운동가이자 전위음악가인 Catherine Lara가 하는 토크쇼 La lune sur les Lune에 출연하였다. 이 시기 특히 Pioter Kowalsky와는 친하게 지냈다. 1996년 삼성호암미술관의 중앙국제설치조각비엔날레 Contemplation, 일본 사이타마현대미술관에서 <Moon Walker Installation>을 했다. 1997년 서울 올림픽 10주년 기념 국제조각심포지엄에서 <Nirvana>를 올림픽공원에 만들었고, 서울 지하철 공사의 <옐로우 메신저>가 서울시 소재 10대 조형물에 선정되었다. 1995년 김세중 청년조각상을 수상했다. 레지던시는 1985년에서 1989년 까지 베를린 Waldenser Aterier, 그리고 1994년부터 4년간 파리 Cite International des Arts에서 작업하였고, 뉴욕 iscp에 갔다. 1980-90년대에는 빅뱅과 별의 여행, 인공위성, 사하라 사막에 태양광으로 작동하는 외계통신용 인공달 기지를 세우는 작업 등, 공상과학 기반의 설치미술을 했다. 1999년, 장선우가 만든 영화 <거짓말>에 주연남자 배우로 출연하였다. 베니스영화제, 몬트리올 판타스틱 영화제등 을 다니며 뉴욕의 인터뷰지, 보그, 라디오 캐나다 등의 언론매체와 인터뷰 및 영화선전을 하였다.
이후 사회 개인 환경의 변화 속에서 몇 년간 도서관에 다니며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책과 자료들을 보았고, 전국의 문화유적지와 풍수를 찾아 다녔다. 2005년부터 조선역사 연작을 시작하여 제국과 조선, 구운몽, 조선의 낙조, 선인기우도, 삼천궁녀, 낙화의 눈물, 노스탤지어, 조선비너스, 평양 타임즈, 현대 정 회장 고향방문기, 취유부벽루기, 꽃과 나비의 세월, 평양타임스, 조선선비로켓유랑기, 조선신연애, 조선문답 등과 같이 비디오, 디지털 이미지, 영상설치를 하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 2007년 독일 칼스루헤 ZKM의 아세아의 새로운 물결, 2008년 포즈난 메디테이션 비엔날레에서 영상설치. 2013년 다큐멘터리 <조선의 낙조>가 리움 미술관과 뉴욕 Anthology Film Archives에서 상영 되었고, 2010년 서울 G 20 Summit 워커힐 W 호텔, 2012년에는 뉴욕 Big Screen Plaza에서 낙화의 눈물, iscp Vip Video Collection에 심포니 9번, 광주비디오 아트 페스티발, 2012년 여수 엑스포 서울관에 한양선비 인왕산 호랑이 영상설치를 하였다. 2014년 서울 소마 미술관의 Retro 86-88 한국다원주의 미술의 기원전 에서 1988년 토탈미술관에서 전시되었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장한 퍼포먼스와 설치작업 <잊혀진 전사의 여행>을 복원 전시했다. 2014년, 서울국립현대미술관과 시드니 현대미술관이 공동주최하는 New Romance에서 <조선 신연애>를 2015년 실학박물관에서 <조선문답>을 상영했다.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개관30년전에서 <잊혀진 전사의 여행>과 <문워커>가 복원되어 전시되었고, 2017년, 서울시립미술관의 90년대의 한국현대미술에서 대림미술관 소장 <Earth Moon Rising>이 복원 전시되었다. 2019년, 파주출판문화단지 내 아트스페이스 휴에서 <조선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를 열고 있다.
출처: 아트스페이스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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