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가변크기
2020년 2월 9일 ~ 2020년 2월 15일
「TV에서는 매년 기록 경신이라도 하듯 몇 년 만에 찾아온 폭염이니 하는 보도를 수차례 방송한다. 건물 안팎으로 가만히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이 날씨에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무심히 걷는다. 진초록색 방수 페인트가 칠해진 옥상 바닥에 땀이 물처럼 흥건히 흐른다. 어디에도 스미지 않는 그 바닥의 페인트 성능은 왜이리도 좋은지 땀 줄기는 노인을 따라 일정한 선을 그리며 흔적을 남긴다.
노인의 무거운 발걸음이 더위로 인한 영향인지 장애로 인해 힘겨움 때문인지 잘 모르겠으나 단지 살짝 옷깃 사이로 보이는 나무껍질 같은 목살과 축 늘어진 뒷모습이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힘겨워 보인다. 사람은 생긴 대로 산다고 했다. 깍 마르고 갓 죽은 시체 같은 이 노인은 날 때부터 박복했을까?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이런 이가 주변을 훑고 지나갔을 때 즐겁고 행복한 미소를 지을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있기는 한 걸까?
바람을 쐬러 나온 것인지 얼마 안 되는 이 높이에 자살이라도 하러 온 것인지, 내가 사는 옥탑방의 작은 창문 틈으로 몇 번이나 그 노인을 관찰해 왔다. 항상 위태롭게 서 있는 노인을 말리고 싶어도 방음도 안 되는 이 얄팍한 현관문을 여는 것이 보기보다 힘들다.」
윗글은 올해 이사하던 중 첫 페이지만 발견된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 시나리오 일부이다. 치매, 암, 당뇨 등 노인이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질병으로 투병 생활을 하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시작하게 된 이야기이다. 그는 6·25전쟁 참전용사로서 나라를 지켰지만, 주변은 결코 지키지 못했다. 그를 중심으로 가족이 와해 되었지만 왜인지 나는 그의 곁을 지켰고 경제적으로 무능한 20대의 나에게는 가장 큰 시련이며 갖가지 딜레마만을 양성하는 존재가 된다.
작가를 추구하는 이들이 그러하듯 먹고사는 생업과의 사투를 벌이게 되고 돈을 벌기 위해 여러 작가의 작업을 도우며 현장경험만 줄기차게 해오기도 하고 나와 관련되지 않은 전혀 다른 일을 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경험이 작업에 양질의 살이 붙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아버지의 병처럼 현재와 과거를 착각하며 수없이 초기화될 뿐이라는 걸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체감하게 된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결심이 들 때마다 그간의 작업에 대한 기록을 거의 삭제 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쓰는 과정에서는 자전적 내용조차 작가 본인을 전지적 시점에서 관찰하기에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누구보다 분석적으로 객관화시킨다. 어쩌면 심적 거리를 두고 구조적으로 쌓아 올린 결과물은 본인에게만 익숙했던 사실들을 재가공하게 되고 마치 타인의 이야기에 공감하듯이 독립적인 힘을 얻게 된다.
그림책은 단순한 언어와 시간적 표현으로 복합적이지만 주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기에 쉽고 함축적이며 효율적인 표현수단이다. 나는 단기적이고 언제 버려도 괜찮을 낙서에 가까운 드로잉 작업을 해왔고 그것을 엮을 수단으로 시나리오와 만화 등을 통해 표현해 왔다. 그림책은 그간의 작업과 동일 선상에 있지만 익숙하지 않은 매체를 통해 조금 더 먼 거리에서 자전적 이야기의 재가공이 가능해진다.
이번 이야기 ‘살아남은 날’은 자살하려는 시도를 매번 잊는 치매 노인과 공황장애로 집 밖을 나서지 못하지만 결국 계획을 실천하려는 노인을 구하기 위해 나서는 청년에 대한 하루 동안의 이야기이다. 실제 소외된 이들의 살아남은 날은 단지 또 다른 어제의 반복이며 특별히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작업을 통해 살아남아 보려는 아이러니를 투영한다.
출처: 공간가변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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