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메시스아트뮤지엄
2015년 9월 5일 ~ 2015년 9월 29일
전미래, ˹발효파티Fermentation party˼ 부분, 2015
발효, 그 잔혹성 있는 감각-정신의 모험_전미래 작가의 <삼합[三合]: 발효의 연식술>
#1. “폭력의 응축은 냉정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폭력은 영감이나 충동에 따라 낭비되어서는 안되며, 폭력이 주는 쾌감에 부속되어서도 안된다.” (들뢰즈, <매저키즘> 중에서)
#2. “’삭이다’의 의미망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1) 옷가지 따위가 오래 되어 삭게 하다 2) 묽어지게 하다 3) 음식을 소화시키다 4) 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다 5) 김치, 술, 땡감 따 따위 삭게 하여 맛이 들게 하다, 등등의 뜻을 포괄한다.” (천이두, <한의 구조연구> 중에서)
(글쓴이 주: 이 글은 바타유 같은 내밀한 체험의 공유라는 차원이 주제넘게(!) 개입해 있기 때문에 마치 악어가 물고 있는 토끼를 구하려고 재촉하다가 악어가 통째로 홀랑 뒤집어지듯 안과 밖이 뒤집히는 면이 있다.)
유라시아 뇌과학 여행
전미래 작가는 ‘그로테스크 삼인조’라는 정체불명(?)의 급조된 아트콜렉티브의 일원으로서 2014년 가을 만주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의 목적 중에 하나는 만주라는 오픈 스페이스를 반달 모양으로 둘러싼 대흥안령 산맥에서 이루어진 감각의 흔적들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이 산맥이 아시아의 문명적 게이트인 것은 물론이고 숲의 권능으로 ‘발효’라는 특별한 감각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미학자 조요한 선생이 일찍이 주장한 “추운 북방의 삼림지대[Taigar]를 통과하면서 형성된 무교[巫敎, Shamanism]적 체질”이라는 것이 이 ‘발효’ 감각의 탐사여행을 이끈 주요한 동기였다. 숲을 통과하면서 무엇인가 감각과 마음의 생태학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전미래 작가가 만주 하얼빈과 송화강 일대에서 발견한 것은 아시아 북방의 음식문화가 ‘만두’라는 포괄적인 싸개의 방법론과 ‘만두피’로써 400여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발효적 시간의 전이를 이뤄낸다는 문화적 탐구였다. ‘싸개’라는 독특한 종합의 형식은 아무리 복잡한 내용물이라고 해도 이 일종의 문화적 피부만 있으면 감싸는 감각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 문화적 피부의 원초적 감각을 제공하는 ‘만두피’는 만주에서 생산된 세계 톱클래스 품질의 밀가루로 제조되어 식감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사람의 피부처럼 야들야들한 촉감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수백년의 시간 동안 생명력을 이어온 효모들이 작용하여 그러한 식감과 촉감에 과거-현재-전미래의 시간 감각이 부여되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이러한 문화연구의 발견은 전미래 작가를 격동시켰고, 그 결과 거의 매일 하얼빈 특제의 만두를 점심과 저녁으로 먹도록 부추겼다.
명분은 ‘유라시아 뇌과학’이었다. 유럽의 문명적 게이트로서 헝가리의 카르파티아 산맥이 이쪽의 대흥안령 산맥과 매우 흡사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 산맥에서 훈족 혈통의 드라큘라 백작의 전설과 기마궁시의 마자르족, 라인강에 ‘헨젤과 그레텔’ 잔혹동화 같은 고딕 이야기의 원천이 잔뜩 제공되어 왔다. 이처럼 유럽과 아시아가 양대 거대한 숲의 권능이란 배경 하에서 좌뇌와 우뇌처럼 대칭적 구조로 결연하여 오랫동안 상호작용해왔다는 가설적 담론 ‘유라시아 뇌과학’이 그 여행에 깊이 개입해 있었다. 이런 것도 감각을 분할하는 세계사적 구도라고 할까.
잔혹성의 미학
그 유라시아의 우뇌적 성향 중에 하나가 ‘발효’ 감각인데, 이것은 전미래 작가가 2014년 경기창작센터 레지던시 입주할 때 가져온 <숭고한 삼합>이라는 작업 속에서 ‘홍어’라는 “그로테스크한 맛”(시인 송수권)의 스펙트럼과 일찌감치 연결되어 있었다. 실제로 그는 그해 같은 제목의 퍼포먼스 속에 인도의 쿤달리니 요가, 도교, 기독교, 샤머니즘이라는 다양한 종교적 레시피를 한데 종합하여 숭고한 타입의 무형적 ‘만두피’를 스스로 제공한 바 있었다. 숭고한 것은 그 내용물이 아니라 싸개이자 피부였던 셈이다.
이 공연에서 전미래 작가가 실제로 냄새가 얼큰하고 싸하며 어느 순간 톡 쏘는 감각으로 충만한 홍어를 관람객들에게 선물하여 그러한 감각의 공격을 공유하였다. 스스로는 3점의 홍어를 먹고 암모니아 화학에 의한 하이퍼그라피아[Hypergraphia, 인공간질에 가까운 창조적 발작 상태]를 직접 체험하였다. 선물처럼 다가오는 감각의 폭력, 도스토예프스키라든가 헉슬리에 가까운 뇌의 수직적 솟구침과 아득함. 동시에 모국어와 더듬거리는 모종의 언어라는 바이링구얼로써 종교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변환시키고 알 수 없는 신경자극의 영역으로 관객들을 인도하였다. 이것이 작가 스스로 제공한 무형적 음향적 ‘만두피’의 정체였다! 이 작가는 왜 그런 어찌할 수 없는 사건의 행위를 감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혹자들에게는 역겨운 감각이 되는 홍어 먹기의 자극과 자신의 정신적 발작을 묶는 작업에 몰두하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2010년 나는 한번 죽을뻔한 경험을 한다. 그 후 나는 죽음과 삶이 가까이 맞닿아 있는 곳에 있음을 느꼈다. 어쩌면 나는 그때 죽었는지 모른다. 한번 흐트러진 시공감[時空感]은 묘하게도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내었다. 살면서 죽어가는 시간을 끊임없이 느낀다.” (전미래, <작가노트> 중에서)
홍어를 먹는 체험을 하면서 그는 “흐트러진 시공감”에 부착된 ‘에고’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고 술회한다. 순수와 오염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하에서 결벽에 가까운 신경증적 삶의 괴로움을 겪다가 우연히 접한 ‘발효’된 홍어 한 조각이 그의 “몸을 (폭력적으로) 감염시켰다”는 것이다. 무질서와 혼란으로 점점 즐거워지는 역설적인 경험, 일종의 실존적인 앱젝트[abject] 즉 싫으면서도 좋은, 묘한, 변태적인 강렬성의 감각에 전인격을 던지는 것에 물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통과 쾌감간의 마조히즘적 경험이 한계적인 양극단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면서 반감과 호기심, 금기와 위반이 새롭게 제3의 어떤 것으로 합성되는 감흥에 젖어들었다. 이것이 어쩌면 그를 ‘극도의 감각주의’를 표방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감각적이면서 강렬한 내적 체험을 겪은 전미래 작가가 기존에 해왔던 퍼포먼스의 계열과 유다른 혹은 불연속적인 타입의 퍼포먼스 작업을 한다는 것으로 항간에서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한다. 실제로 만주여행 시에 그가 SNS상에 뿌린 일련의 샤머니즘적 제의의 이미지라든가 <숭고한 삼합> 이후의 작업들은 그런 시선에 노출된 바, 그러나 전미래 작가는 이러한 이미지나 작업에 구속되기보다는 단지 자신의 작업의 재료로 사용할 뿐이었다. 그는 이번 미메시스 미술관 전시에서 ‘발효’라는 스스로 부여한 감각적 코드가 어떻게 강렬한 체험이 될 수 있는지, 그 ‘삭히는 시간’의 권능이 신체적 소멸과 재생의 기[氣, forth]로 표현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늘’이 있는 소리, ‘그늘’이 있는 춤, ‘그늘’이 있는 삶으로 변형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여기에는 만두피의 피부자아적 감쌈, 썩어가는 시체들의 만다라 향연, 탐미적인 현대무용의 댄서 조르주 동의 모티브에 감응된 탱고의 안무 그리고 “만두=사람의 머리통”이라는 중국 전통에 기댄 환각적 변형의 작업과 퍼포먼스 등등이 시간적 발효 작용과 그 발효로부터 열려지는 ‘틈’의 작용으로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여성적 마조히즘, 자신에게로 역전된 마조히즘의 냉정함이 폭력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전미래 작가는 미메시스 미술관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마주 눈을 마주치는 벽면에 <발효파티>라는 6m 높이의 거대한 목탄화를 배치한다. 이 그림은 “휴머니즘 기준의 적정한 썩음”이라는 ‘발효’의 범위를 훌쩍 벗어나 시체들이 물질적으로 해체되다 못해 기화되듯이 풀풀 밀가루처럼 날리기 시작하면서 서로의 항문들끼리 볼트와 너트처럼 공격적으로 접속되어 있다. 명백히 죽음을 넘어서는 상호모계적인 빈 공간을 창출하기 위한 작가의 극단성이 엿보이는 만다라 작업이다. 죽음충동을 유발하는 신체 이미지의 순수한 부정성이라고 할까.
“괴롭다. 악취. 지독한 악취가 풍긴다. 속이 썩어 문드러져 눈물이 난다. 그래도 살아있는 몸. 그래서 썩으며 나오는 소리. 썩으며 나오는 춤. 이것이 ‘틈’이라는 것. 흐느끼는 소리. (귀신 우는 소리) 그렇게 견뎌진다. 그렇게 견뎌지며 이런 틈이 흥이 된다. 그늘을 동반한 흥.” (전미래, <작가 노트> 중에서)
이런 상태는 보통의 샤머니즘에서 “신이 내리는 순간을 일종의 깨달음의 순간으로 치환할 수도 있지 않을까”(김풍기, <시마, 저주받은 시인들의 벗>, 122쪽)라는 감각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지난한 시간, ‘삭히는 시간’, 절대적으로 속을 끓이며 기다리는 시간이 있는 것이다. 강신의 순간이 벼락같이 깨달음을 부여한다는, 일종의 장세니즘적 은총과도 같은 순간의 미학이 여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발효파티>는 ‘시김새’ – 이 용어의 유래는 ‘삭혀지는 모양새’ – 라는 묘차원[妙次元]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거나 제의로써 쉽게 ‘풀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몸으로 내적 썩음의 시간을 겪어내야 하는 것임을 깔고 있다. 마치 저 남도의 청산도에 설치되어 있는 풍장[風葬] – 들판에 시체를 버려두고 비바람에 썩도록 하는 전통적인 장례 풍습 – 처럼 인욕과 정진이 고도의 충전된 정신의 지속으로, 정신의 뼈로 표상된다는 것을 아이러니하게 보여준다. 거기에 소리의 환청과 틈의 개방적 환각이 있다.
‘한[恨]’ – ‘시김새’ – ‘흥[興]’이라는 정서적 발생의 순서는 무지막지한 폭력, 그러나 그 냉정함으로 이루어지는 잔혹의 시간 작업이기도 하다. 전미래 작가는 한에서 나오는 삶의 리듬을 그 죽음충동의, 죽음과 삶을 끊임없이 오고가며 만들어내는 리듬으로부터 이끌어내고자 한다. 그것이 어떻게 구현되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무의식이 안과 밖을 뒤집듯이, 즉 무의식이 이 현실을 현실화하고, 현실은 무의식에 육화된 형체를 부여하듯이, 그렇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발효파티>의 모티브가 되는 풍장의 전통적 풍습에 대한 분자생물학자들의 과학적 견해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갖은 유익을 도왔던 미생물들이 그 사람이 죽으면 갑자기 태도돌변하여 “자, 이제부터 발효파티를 벌이자!” 라고 외치듯이 그들이 평생 봉사하여 획득한 전리품(?)에 대해 물질적 분해 및 해체 작업에 들어간다는 것이다.(http://www.ediblebrooklyn.com/2015/03/16/for-both-novices-and-experts-brooklyns-free-fermentation-party-returns-this-sunday/) 이 기간이 정확히 1년에 걸친다고 한다. 풍장의 기간과 일치한다고 하니, 여기에도 보이지 않는 혜안의, 익명의 과학이 있는 셈이다.
#3. “구신과 사람과 넋과 목숨과 있는 것과 없는 것과 한줌 흙과 한점 살과 먼 옛조상과 먼 훗자손의 거룩한 아득한 슬픔을 담는 것.” (백석, 시 ‘목구’ 중에서)
싸개의 설치와 춤의 안무
극단적인 한계점에 선 작가는 몸이 썩고 급기야 마음이 썩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특이한 감각의 첨점에서’
물극필반! 즉 “극에 달하면 반대의 성질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미래 작가가 구사하는 잔혹성의 정체이다. 자궁의 이미지를 가진 상호모계적인 빈 공간 – 실제로는 항문 게이트를 통한 유사-자궁적인 뱃속 공간 – 의 연결과 오이디푸스적인 어머니 사이라는 이중구속을 스스로 깨버리려고 하는, ‘발효’라는 굉장히 퀴퀴하고 얼근하며 배척한 냄새가 진동하는 작업에 그토록 몰두해온 것은 이유가 있었다.
“나의 어머니 아버지가 아닌 죽은 가족까지 모두 – 가족계가 하나의 유기체로 보이기 시작한다.” (전미래, <작가 노트> 중에서)
하나의 유기체, 상징적 질서이자 자연화된 공동체로 작용하는 유기체라는 조건의 세계에 미생물이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완성된 유기체 내부에 다시 공동이 생기면서 그 내부의 빈 공간을 새로운 몸으로 환각한다고 할까. 빈 공간 그 자체를. 이것은 <발효파티>의 핵심이 탈성화[desexualization]된 몸체의 물질적 기화와 그 기화들끼리의 연결에 있다기보다 구멍과 그 구멍들의 연대에 있다고 하겠다. 구멍으로서의 새로운 신체관이라고 할까. 전미래 작가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그럴 때, ‘문지방’[joint, 발터 벤야민과 빅터 터너가 말하는 전이 영역]이 요청되는데, 그는 홍어, 만두피, 탱고, 구멍, 의자 같은 것을 ‘문지방’이라는 인터페이스 – 1) 불연속 2) 경계 3) 전이 등의 작용이 일어나는 영역 – 로 제안한다. 썩어서 문드러지고, 발효의 극단에서 냄새를 풍기는 지점에서 ‘문지방’이 발생한다는 것은 마음의 형질이 극단적으로 변화한다는 인식인데, 그 극단적 한계 상황에서 ‘문지방’이 열리면서 싸개가 설치되고 비로소 안무가 스르로 풀려나가기 시작한다. ‘시김새’가 하나의 ‘삭히는 시간’의 유한성을 견뎌내고 비로소 자기조직된다는 것이다.
<너와 나는>이라는 설치는 “발효된 만두반죽” 모티브의 흔들의자로서 그 의자에 앉는 이의 몸을 포근히 감싸주는 일종의 싸개이다. 싸개가 연출하는 그 구부러진 곡선의 우묵한 공간, 그 빈 공간은 이제 살아있는 이에게 ‘나-너 관계’(마르틴 부버)를 제안하며, 그 내부에 무심히 앉아서 몸을 맡기는 이는 발효된 감각의 푹신한 쿠션을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개념적인 차원일 수도 있지만, 전미래 작가에게는 기본적으로 자기치유적인 싸개로서의 차원이기도 하다. 즉 묘차원[妙次元]인 것이다. 가족-유기체로부터 받는 오이디푸스적 자아상실은 이중구속의 다른 이름인데, 결국 피부자아의 회복으로서 홍어의 신경자극 혹은 만두의 쾌감이 이처럼 전신감각의 피부로 변형되는 것이다. 뼈들이 다시 부드러운 조직으로 바뀌다가 급기야 피부로 출현한다고 볼 수도 있다.
#4. “바람과 햇빛과 달빛을 받으면서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두개골은 연골로 변하게 되며, 그런 상태에서 이끼가 두개골 밖으로 퍼져 나와 피게 되는 것이다.” (자키 피죠, <몸의 시학>, 89쪽)
시체의 현상학을 시간적 차원에서 자연화시키면서 출현시키는 것, 그로부터 홍어가 발효되듯이 인간 신체를 죽음충동 너머로 보내기 위해, 그리하여 인간 신체로부터도 하이퍼그라피아의 사운드와 기화되는 시각 이미지 그리고 안무 이미지를 뽑아내기 위해 전미래 작가는 이러한 변형생성을 추구한다. 피부라는 싸개의 역할은 변형생성의 육화된 형체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며, 동시에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전체를 조감하는 이성적인 것을 재발명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정신의 조형이라고 할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내 살인지 네 살인지” 알 수 없이 썩은 몸들끼리 서로 이해하려는, 그리하여 상호접속하려는 몸짓을 보인다고 할까. 싸개는 이미 그런 태도를 지닌 채, 감싸오기 시작하는 셈이다. 같은 기운끼리 감응한다.
‘시김새’는 이러한 감응의 전이,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이성적인 것이 나오는 것에서 가능한 정신의 어떤 경지일 테다. 전미래 작가는 이러한 ‘시김새’를 안무의 한 시도로부터 추구한다. 만두를 빚는 행위를 박수 사운드로 표현하면서 ‘만두피’를 음향화하고, 그 배경하에서 두 명의 댄서가 탱고춤을 추는 것이다. 탱고는 아르헨티나 가우초 – 일종의 카우보이 – 라는 순정적인 마초가 ‘한’의 정서가 복수극으로 표출되다가 극단적인 절제로 브레킹 감각을 띠는 사랑과 죽음의 정서가 가득한 춤이다. 전미래 작가는 복수의 정념이 주는 신경증이 어떻게 괴로움과 쾌감이 뒤범벅된 채, 엇박자의 춤과 귀곡성의 사운드로 ‘나-너 관계’의 순간적인 ‘만두피’가 허공에 부조되는지 보여주고자 한다. 흰 밀가루로 칠해진 얼굴은 공허감이 견인해가는 매체인 동시에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감도는 마조히즘의 매체이기도 하다. 발효가 소리로 표현되고, 소리가 도상으로 전환되는 이 마니에리슴[Manierism]은 안무를 고도의 결합술[ars combinatorial]로 이끈다. 이 결합술에 의해 고통과 쾌감의 변증법적 지그재그는 ‘시김새’의 껴안음으로 종합되는 셈이다.
이처럼 ‘발효’라는 코드는 전미래 작가에게 개인적 트라우마와 신경증을 극복하기 위한 예술 작업의 효모로써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시김새’와 ‘흥’의 영역으로 나아가려는 안간힘에 가까운 시도이다. 여기에는 작가 스스로 의식하는 시간성의 문제가 깔려 있기도 하다.
전미래 시제의 재발명
발효, 홍어, 썩어가는 시체, 만두, 만두피, 싸개, 탱고, 안무 등등 일련의 키워드는 전미래 작가가 자신의 이름에서 유래하는, 그래서 더욱 강하게 의식하는 ‘전미래 시제’와 강하게 결연되어 있다. 이 작가는 프랑스 유학 시절 익힌 불어 문법 중에서 ‘전미래 시제’에 유독 꽂힌 상태였다. 이 시제는 “내가 외출에서 돌아오기 전에 내 여자친구는 뜨개질을 모두 마쳤을 것이다”(데리다)라는 문장 속에서 ‘~했던 게 될 것이다’ 라는 일반형의 유예이자 평가로서 정평이 나 있다. 불어 문법에서는 이것이 미래가 도래하기 전에, 그보다 한 발 앞선 템포에서 이미 완료된 것이다. 데리다는 거기에 현재가 된 미래 시점에서 이제 과거가 된 전미래 시점을 사후재구성하는 셈이다. 즉 미완의 혁명으로 만드는, 메시아적 조감의 행위이다.
전미래 작가는 ‘발효’라는 ‘삭히는 시간’ 인식의 불가능성을 강하게 의식한다. 동시에 그 시간의 객관적 도래를 정확히 수확한다. “파국을 맞이하기 전에 ‘발효’는 이미 완성되었을 것이다”라는 문장이 주관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홍어는 덜 삭혀졌거나 더 삭혀져 있으며, 만두피의 효모는 어제 떼어내져 대갓집 불씨처럼 보관되어 있거나 이미 만두피 끓인 물이나 익힌 만두로 존재하고 있다. 싸개 역시 에로티즘의 촉감을 발휘하는 강도나 타이밍이 지나갔거나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탱고는 늘 복수하고 있거나 이미 죽은 상태이다. 전미래 작가는 안무가였거나 아직 안무가로 입문하지 못한 상태이다. ‘발효’는 기준이나 중심의 부재에서 나오는 시간적 카오스이다.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에서 어떤 관찰자도 없을 때 한없이 유예되는 것처럼 전미래 작가의 ‘전미래 시제’는 시간적 중심의 부재가 낳는 효과이다. 시간은 편재하기 시작한다. 여러 시간(들), 시간대(들)이라고 할까. 그러한 상태로서 긍정하는 것, 실존적 앱젝트의 시간을 그대로 수확하는 것이 이 발효 코드의 시간을 ‘전미래 시제’로 보내는 길이다. 한번의 미결정과 한번의 수용. 이 ‘한’-‘시김새’-‘흥’은 끝없는 시간의 흐름처럼 장구하며, 언제나 발효는 도래하지 않는 장기지속의 시간이다.
/ 김남수(안무비평)
<발효 연식술 ll> 9월 5일(토) 오후 2시
<숭고한 삼합(발효 연식술 l) >, <발효 연식술 ll> 9월 12일(토) 오후 2시
<너를 위한 구멍>, <숭고한 삼합(발효 연식술 l) > 9월 19일(토) 오후2시
크레딧
<발효 연식술 ll> 안무: 전미래 / 음악: N2 남상원 / 의상: 전미래 / 드라마투르그: 김남수, 출연: 김혜경, 전미래, 서일영(9월5일), 정완영(9월12일)
<숭고한 삼합(발효 연식술 l)> 출연: 전미래
<너를 위한 구멍> 출연: 전미래 외 두 명
출처 - 미메시스아트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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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시간
월요일 09:00 - 18:00
화요일 09:00 - 18:00
수요일 09:00 - 18:00
목요일 09:00 - 18:00
금요일 09:00 - 18:00
토요일 09:00 - 18:00
일요일 09:00 - 18:00
관람료 성인(만 19세이상) : 5,000원 학생(초/중/고, 8-18세) : 4,000원 단체 (20인 이상 사전예약시) : 4,000원 65세이상 노인, 군인, 국가유공자, 장애인(복지카드 소지자) : 4,000원 미취학아동(3세-7세) : 무료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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