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도스
2017년 3월 15일 ~ 2017년 3월 21일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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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에 감응하다
김정윤/갤러리도스큐레이터
우리는 이름 외에도 각자를 표현해주는 수식어들을 갖고 있다. 누구의 딸(아들)임과 동시에 누군가의 엄마(아빠) 그리고 아내(남편)와 같은 수많은 역할들이 내 이름을 대신하곤 한다. 시간이 지나고 다양한 경험들이 쌓일수록 이러한 수식어는 하나 둘 늘어나며 그만큼 책임과 의무도 자연스레 늘어난다. 이처럼 자신의 일을 하면서 꾸려나가야 할 가정이 있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해야 할 일들이 많음을 의미한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남성들도 집안일을 분담하여 도와주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가정에서 해야할 일의 중심에는 여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여성이면서 동시에 예술가로 살아가기 위한 삶의 무게는 대단히 무겁다. 정지현에게 있어 작품 활동은 우선적으로 해나가야 하는 다른 역할들로 인해 빈번히 우선순위에서 제외되지만 특유의 소재와 기법을 활용해 이러한 제약들을 극복하고자 한다. 작가에게 작업은 다양한 역할들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며 그 결과로 드러나는 작품은 여러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다.
정지현의 작품은 일상에서부터 시작된다. 특이하고 자극적인 소재들이 넘쳐나는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그녀의 작업은 자칫 평범함과 소박함으로 인해 시선을 끌어당기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때때로 거센 비바람보다 한 두 방울 보슬보슬 내리는 비가 다양한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듯 그녀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소재들이 가진 힘을 믿는다. 작업에 소재가 되는 이미지들은 작가 개인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지만 이는 곧 관객들과의 소통과 공감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채워져 나간다. 비록 화면은 작지만 그 안에는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으며 작품을 마주한 이의 마음 속 깊이 자리하게 된다.
화면 위로 바늘과 실이 뚫고 지나간 자리에 담백하고 따뜻한 선율이 흘러나온다. 화려하거나 세련된 리듬은 아니지만 누구나 쉽게 흥얼거릴 수 있는 익숙한 리듬이다. 형체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수놓은 바느질 선들은 그 사이에서 규칙적인 공간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생겨난 여백은 관객들에게 고른 숨쉬기처럼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숨 가쁘게 흘러가기보다는 바느질 사이에 숨어든 쉼표 안에는 미세한 감정의 흐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가 특유의 매력이 숨어있다. 손과 바늘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흔적들은 단순한 선에서 형체의 일부분이 되어 화면 안에 고스란히 담긴다.
이번 신작에서 작가는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의 흐름에 특히 주의를 기울인다. 따스한 햇살이나 봄바람, 들판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등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것들이 주변에 수없이 존재한다. 이처럼 물질적인 것만 추구하는 현 세태에서 놓치기 쉬운 소중한 것들에 가치를 두고 이를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크기, 모양, 색상 등의 조형요소로 이를 시각화하기란 쉽지 않지만 묵묵한 바느질이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작가의 강한 의지는 그 어떤 단어보다도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반복된 일상에서 지나치기 쉬운 자엽의 섭리와 우주의 흐름을 작가는 정성을 기울여 우리 곁으로 붙잡아 두려고 한다. 그리고 작가의 바람대로 작품을 보는 이의 마음에도 보이지 않는 중요한 가치에 대해 서서히 집중하게 된다.
예술에는 작가가 겪은 상황이나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마련이다. 정지현은 사회가 부여한 여러 역할들과의 갈등 안에서 느꼈던 사유를 작은 크기의 화면 안에 꿋꿋이 담아내고 있다. 여성적인 재료와 기법인 바느질을 통해 여성 작가로서의 고충을 해소하고 있는 역설적인 상황 안에서도 그녀는 삶의 행복과 진정한 가치를 작품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망설임 없이 꺼내어 놓는 작가 본인의 이야기는 곧 나와 내 가족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기에 관객들 또한 그녀의 작품을 친숙함을 느낀다. 또한 작품 속의 소재나 주제는 하나의 이미지나 정해진 이야기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보는 이의 감정과 경험이 덧붙여져 전혀 다른 새로운 이미지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지현 작품의 화자는 작품을 바라보는 누구나 될 수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작품에서 흘러나오는 리듬에 맞춰 잊고 지냈던 자신 만의 추억과 감정들로 작업들을 채워 나가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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