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크갤러리
2019년 10월 11일 ~ 2019년 1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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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길
곽현정(독립 큐레이터)
정직성의 스물 두 번 째 개인전 ‘바람의 길’은 작가가 최근 이년간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제작한 회화와 나전칠기 작품으로 구성된다. 제주 귀덕리의 바닷가 작업실에 머물며 목격한 그 곳의 기후와 독특한 생태 환경을 특유의 추상 조형 감각으로 해석한 신작들은 매화 시리즈로 시작된 자연물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더욱 넓은 영역으로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현무암 사이사이를 비집고 자란 넝쿨과 잡목, 눈 속에서 꽃잎을 터뜨리는 동백, 긴 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을 알리는 매화 등 제주의 자연이 뿜어내는 기운은 거친 환경 속에서 기어이 살아남은 생명들에 깃든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작가에게 다가왔다. 특히 식물들에게는 척박한 삶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검은 현무암 대지와 사납기로 유명한 제주의 바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제주의 생명들에 내재된 강한 생명력의 근원으로비춰졌다. 안정적 기후 속에 크고 화려하게 자란 열대 식물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제주 자연만의 생명력. 바람의 결을 따라 누워서 자란 오름의 팽나무를 보며 작가는 지금껏 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드러내고자 했던 주제를 다시금 투영시켜 보았다. 척박하고 제한된 삶의 조건 속에 존재하는 의연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고통을 고통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태도는 제주의 자연을 소재로 한 이번 전시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난다.
정직성은 도시, 연립주택, 공사장, 기계 등 이전 시리즈의 소재에 따라 그에 맞는 화면 구성의 논리를 정립하여 작가 특유의 개성이 느껴지는 추상의 세계를 구축해 왔다. 사실, 정직성은 필자가 아는 사실적 재현 능력이 가장 뛰어난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런 기량을 의도적으로 발휘하지 않고 군더더기가 제거된 최소한의 붓질만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추상성을 드러내는 것은 작가가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회화적 성취일 것이다. 경험하는 어떤 사건이나 상황 속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나 기운의 핵심적 특징만을 추출하여 붓질에 임하는 작가의 태도는 때로는 단순하게 느껴질 만큼 단호하게 명료하다. 주로 작가의 작품이 담고 있는 것은 구체적 대상이 품고 있는 어떤 기운인데, 제주의 자연을 소재로 한 이번 전시에서 주요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현무암의 대지와 돌담 등이 가진 검은색의 세련된 기품이다. 이전 매화 시리즈에서 작가는 특히 밤 매화의 매력에 빠져 다수의 연작들을 제작하였는데 마치 촛불을 연상시키는 꽃의 모습이 어두움, 밤이라는 배경을 통해 더욱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사실과 검은색의 배경색 위에 꽃을 그렸을 때 드러나는 세련된 색조 구성에 매료되어 검은색에 대한 실험과 고민을 이어가던 터였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신작 중 특히 주목하게 되는 작품들은 나전칠기 기법을 차용한 작품으로 작가의 회화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다소 낯선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회화 작업과 나전칠기와의 연결성은 작가에게 일어난 우연한 사건들과 앞서 언급한 검은색에 대한 고민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설명되어야 할 부분이다. 우연한 기회에 자개 장롱을 생활 공간에 두게 된 작가는 골동에 취미를 갖게 되면서 적극적으로 자개 가구들을 수집하게 되었다. 낡고 고루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으나 작가의 눈에는 더없이 아름다운 조형 질서를 가진 오브제로서 자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작가에게 매력 있는 매체로 인식되었다. 제주 현무암의 검은색을 보면서 평소 익숙한 자개 가구의 검은색 옻칠을 떠올리게 된 것,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작가의 머릿속 이미지를 자개와 옻칠로 구현해 줄 수 있는 공방을 만나게 되는 과정은 우연 이라기엔 신기하게도 필연적으로 느껴진다.
전통 나전칠기 기법을 이어 가고 있는 한 공방에서 작가는 몇 달에 걸쳐 회화의 방식을 나전칠기 기법으로 변환하는 시도를 감행한다. 떠오른 심상을 안료와 붓질로 즉각적이고 즉흥적으로 표현하는 회화와 달리 일정한 프로세스를 거쳐 제작되는 나전칠기는 오히려 판화와 비슷한 성격을 보인다. 반복적인 칠과 갈아냄의 과정 속에서 의도한 옻칠의 색을 얻고 자개를 쪼개 파편을 만들어 부분의 순서대로 형태를 만들어 나간다. 색과 형태를 운용하는 회화에서의 경험은 진주패, 색패, 뉴질랜드패 등 원산지와 종류에 따라 다양한 색을 내는 자개 원료와 끊음질, 타찰법 등의 나전 기법을 이용해 변환되고 이를 통해 매화, 괴석, 파도, 번개 등의 추상적 이미지들이 탄생하였다.
정형화된 전통 공예의 패턴에서 벗어나 현대미술의 추상성이 접목된 화면은 깊고 순수한 검은 색조 옻칠 배경 위에 오묘한 색채를 뿜어내는 형태가 겹쳐져 화면 자체가 아름다운 발광체로서 다가오는 신선한 시각적 경험을 안겨준다. 나전과 옻칠이라는 소재와 기법을 빌었을 뿐 작가에게는 여전히 회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 작업의 결과물이 관객과 미술계의 눈에 어떻게 평가될지 필자는 자못 궁금해진다. 현대 미술의 의미 있는 일탈 혹은 매체의 확장, 혹은 공예의 현대화, 새로운 대중성과 시장성 획득에의 시도 등 다양한 해석들이 있을 수 있을 텐데, 정직성의 이 대담한 신작들로 인해 많은 논란들이 일어나고 그것이 작가의 앞으로의 활동에 고무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면 좋겠다.
작가약력
정직성(b. 1976) 은 서울대학 서양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으며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까지 22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기획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2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문화체육관광부)과 김종영 미술관의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제주도립미술관, 서울대학교미술관등 여러 주요기관에 작품이 소장되어있다. 현재 경기도에 거주하며 작업 활동을 하고 있다.
출처: 누크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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