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원미술관
2016년 2월 17일 ~ 2016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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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 맨티>의 제목 아래 106명의 작가들이 모였다. 반은 가르치는 이고 반은 배우는 이다. 사제(師弟)가 함께 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이 다 일수는 없다. 기획의 주체가 대학미술협의회니만큼, 그 저변엔 ‘예술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의 고뇌가 없지 않을 터이다. 그런 맥락에 기대어 당찬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다. ‘당신은 어떤 예술가인가?’, ‘당신은 어떤 예술가를 가르치고 배우며 갈망하는가?’
“오늘날 사심 없이 오로지 헌신으로 임해야만 가능한 직종들의 기초’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말이다. 합심, 공동선, 협력, 헌신 같은 가치는 보기 드문 것이 되었다. 지키고 보호해야 할 가치영역이 파국을 맞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
예술이 인간성의 고유한 발현인 것은 나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실존에서 출발하고, 그 출발로 인해서만 빛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바로 이 부분에 심각한 오류가 발생했다. 어느 시점부터 예술은 위대함의 욕망과 값비싼 것의 소비에 귀속되었다. 예술도 결국 널린 감옥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렸다. 예술가들은 이제 배부르고 거만하며 잘 통제된 사람들의 행렬에서 목격된다. 완장을 두른 예술가들이 그 선두에서 나팔을 불고 무리를 이끈다. 그들에 의해 빵의 복음이 힘을 얻고 널리 전파된다. 그들의 예술은 헤게모니의 도구로 전락한 채 시체처럼 널부러진 예술이다. 이익에 영혼을 내다 판 예술가는 자신이 만든 것이 만들어낼 사회적 위험이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런 정신에서 신문 사설에도 못 미치는 선동이나 B급 디자인 만도 못한 장식성이 나오더라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예술은 삶의 고유성 안에서 꿈틀거리는 미의 잠재태를 발굴해내는 기쁨, 이곳의 실존에서 오는 고백으로서의 표현과 무관하다. 언젠가 콘라드 하이어스가 감탄했던 세계, “섬광을 발하는 온갖 사물들과 관념들과 사건들이 무수한 방향에서 온갖 형태와 크기로 분출하는 이 세계”가 소멸됨에 따라, ‘와우’라고 감격에 외쳤던 기억도 가물가물할 뿐이다.
자본의 신화가 기세등등하게 작동 중이다. 돈의 맹렬한 순환이 사건들을 만들고 역사를 조율한다. 예컨대 부르클린에서의 전시기간 동안에만 참여 작가들의 작품 가격이 네다섯 배나 뛰는 것이 사건의 오리지널리티가 된다. 그러면 한국의 공영방송인 KBS까지 달려들어 YBAs 작가들을 창사특집으로 다룬다. 대학가에선 그들의 전시 카달로그가 공유되고, 현대미술관은 기념비적인 기획전을 서두른다. 미디어가 전시를 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선 관객들의 사진을 실는 때부터, 학회가 그것을 ‘공인된 미적 가치’로 수용하는 데 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다. 순서가 바뀔 수는 있지만, 하나의 패턴화된 코스를 타고 원샷으로 진행된다. yBa가 그렇게 다뤄질 만한 현상이며 작가들인가는 전적으로 해석의 문제다. 그럼에도 추종과 순응이 강력한 인지적 틀을 형성하고 있기에, 신화의 후기 현대적 기제인 붐, 트랜드, 유명세 이외의 다른 해석적 담론은 조직되지 못하며 조직되어야 할 필요성조차 인식되지 못한다. 우리 미술의 의미생성과 담론 조직의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잠재된 탁월성을 개발할 정신의 혁신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학위를 소지한 예술가들, 이 시대가 훈장을 수여하고 조명을 비추는 예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 일은 고상한 가치의 부름, 일상의 안락이나 특권을 위해 권력을 탐하거나 헤게모니에 중독되지 않는 존재, 억압받는 약자에 등 돌리지 않는 인식에 의해 가능한 일이다. 그런 내적 자질을 갖춘 한 인물에 대해 말하면서 말컴 머거리지(Malcolm Muggerridge)는 말한다 : “마더 테레사로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모든 더러움과 질병과 불행 가운데서 살기로 선택하도록 한 것은 전혀 굴하지 않는 영혼, 결코 흔들리지 않는 믿음, 넘쳐흐르는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그 때문에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예술창작을 종교적 헌신에 비유하는 것이 거북스럽다면 놀라운 일이다. 잭슨 폴록과 요셉보이스는 자신들의 작업이 샤머니즘의 일환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칸딘스키는 신지학과 강신술에, 로스코는 유대교 신비주의에, 볼프강 라이프는 힌두교와 자이나교, 12세기 유럽의 신비주의에 심취했다. 임마누엘 레비나스(Immanuel Levinas)의 표현을 빌자면, ‘당당한 주체’ 는 ‘겸손하고 경건한 주체’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껴야만 한다. 대상을 정복하는 절대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는 대상에 애정을 가지며 그것으로부터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태도를 지닌 주체 앞에서 수치심을 느껴야 마땅하다. 이런 주체야말로 대안적인 주체로서, 사람들의 잠재적 탁월성을 개발할 자격을 갖춘 주체다. 이런 예술가는 타인의 더러움이 자신 안에도 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고쳐야 할 대상은 외부세계가 먼저, 아니 오로지 자신의 영혼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들은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을 고칠 수 있을 뿐이며, 전쟁이 주는 유일한 교훈은 타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이라고 고백한다. 그런 겸손한 주체로서만 타자로 향할 수 있으며, 타자로 향할 수 있을 때에만 자신으로 되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들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경험이 우리의 마음을 부수어 열리도록 해야” 비로소 그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굴하지 않는 영혼’, ‘흔들리지 않는 신념’, ‘세계와 인간에 대한 사랑’의 미덕에 의해 긴밀하게 보완되지 않는 한, 예술은 타자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동덕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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