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정지구
2024년 4월 2일 ~ 2024년 5월 10일
저기 크고 하얀 구멍들
글: 박지수
보스토크 매거진 편집장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서면 하얀 구멍들이 빛난다. 그 어두운 방에서 그 하얀 이미지를 피할 방법은 없다. 온통 사방에서 내뿜는 하얀 빛은 우리의 눈에 무차별적으로 침투한다. 건물들이 밀집한 도심의 빌딩 위에서, 고속도로나 자동차 전용도로 등 대로 옆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자리 잡은 옥외광고판은 언제부터 왜 저렇게 하얀 구멍이 나게 되었을까. 광고 이미지가 채워져 있어야 할 자리가 비워지고 하얀 속을 드러낸 옥외광고판의 모습은 낯설게 다가온다. 언제나 광고 이미지에 향했던 눈길은 처음으로 옥외광고판 그 자체를, 그 직육면체의 몸집을 이루는 면과 선을 더듬게 된다. 거대한 구멍을 머리에 이고 있는 건물의 낡음과 초라함도, 하늘에 하얀 구멍이 뚫린 아스팔트 도로 주변의 황폐함과 무미건조함도 끈적거리며 시선에 달라붙는다.
우리가 바라보는 도시 풍경의 일부분처럼 자리 잡은 옥외광고판은 고대 이집트에서 노비매매를 위한 공고로 사용됐을 만큼 역사가 깊다. 이탈리아 폼페이 유적에서 간판광고로 추정되는 것이 발굴되기도 했다. 국내에서 옥외광고판은 1970~80년대 경제 고성장과 함께 도심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게 되었다. 특히 1980년대에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한 기금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정부 주도하에 설치되기도 했다. 88올림픽을 기점으로 평균 20퍼센트 이상 성장을 지속했던 옥외광고는 1990년대 말 IMF 시기를 거치며 하락세로 접어들게 된다. 그리고 온라인과 SNS 등 다양한 플랫폼이 등장하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부터 매체효과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기피되면서 사양산업으로 취급받고 있다.
조재무의 개인전 《Front and After》에서 마주하게 되는 텅 빈 옥외광고판은 대부분 2007~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로 생겨난 것들이다. 작가는 당시에 여기저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광고 이미지가 지워지고 빈 간판이 생겨나는 모습에서 불황의 징후와 현실 경제의 불안을 감지했다. 한때 경제 호황과 고성장의 상징이었던 옥외광고판이 불황과 저성장의 지표로 전락한 장면은 씁쓸하고 애잔하다. 옥외광고판의 텅 빈 얼굴을 증명사진 찍듯 담아낸 조재무의 <Front and After>은 침체된 우리 현실의 증명사진이기도 하다. 저기 크고 하얀 여백은 무엇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 또다시 광고 이미지가 들어서면 이 헛헛함을 다시 채울 수 있을까. 경기에 따라 채워지고 비워지는 저 거대한 여백은 우리가 끝내 벗어날 수 없는 자본이 드리우는 하얀 그림자가 아닐까.
십여 년 전 불황의 지표, 불안의 징후로 다가왔던 그 하얀 그림자에서 이제는 또 다른 그늘을 읽는다. 화려한 빛이 움직이며 쉴 새 없이 이미지를 쏟아내는 디지털 전광판이 즐비한 요즘의 도심을 떠올리면, 저 미련한 구식 옥외광고판에서 묘하게도 아날로그적인 향수와 낭만이 느껴지기도 한다. 바이럴과 PPL 그리고 인플루언서와 결탁된 SNS의 마케팅 방식, 디지털 발자국을 집요하게 따라붙는 스토커 같은 온라인 광고 등에 견준다면 저 옥외광고판은 자신의 쓸모와 작동 방식, 흥과 망의 생애주기를 얼마나 정직하게 드러내는가. 몇 개월 또는 몇 년 단위를 주기로 다분히 인간적인 호흡과 연동되어 광고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교체되며, 또한 투명하고 가시적인 방식으로 전시되는 옥외광고판 같은 순진한 매체는 이제 곧 멸종될 것이다. 이미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건, 어떠한 징후와 불안을 느끼기도 전에 쉴 새 없이 무한히 증식되는 SNS 피드와 같은 속도 그리고 우리의 선택과 가치관을 지배하는 불투명하고 비가시적인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저 낡고 텅 빈 광고판이 대신 말해주는 것 같다.
기획: 박지수
그래픽 디자인: 물질과 비물질
영상: 황성빈
진행 및 도움: 이제, 이창민, 전그륜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산실
출처: 합정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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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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