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아트플랫폼
2026년 8월 13일 ~ 2026년 10월 18일
화해의 기록: 차기율의 고고학적 상상력
“계(界)—문(門)—강(綱)—목(目)—과(科)—속(屬)—종(種), 우리는 어디에 닻을 내리려 하는 것일까? 강가에 앉아 돌을 보는 나는 인간이 진정 가야 하는 오디세이의 종착을 상상한다.”— 차기율, 작가노트
차기율의 작업에는 오래 걷고 머물며 세계를 관찰해 온 시간이 있습니다. 물가에서 만난 사물과 풍화된 돌과 나무, 갯벌의 작은 생명이 남긴 자국을 살피고, 눈앞의 흔적에서 한 존재와 장소가 지나온 시간을 짐작합니다. 남아 있는 것이 알려주는 만큼 헤아리되 알 수 없는 부분까지 섣불리 채우지 않는 태도, 작은 흔적에서 출발해 인간의 생애를 훨씬 넘어서는 자연의 변화와 문명이 남긴 역사까지 시야를 넓혀 가는 방식이 차기율의 고고학적 상상력을 이루어 왔습니다. 발밑의 깊은 곳을 향하는 발굴과 아직 알지 못하는 장소를 향하는 방랑은 작업을 이끌어 온 두 방향입니다. 작가노트에 나란히 적힌 분류의 체계와 ‘닻’에 관한 물음은 세계를 이해하고 질서를 부여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그 기준만으로는 온전히 헤아릴 수 없는 존재 사이에서 이어져 온 사유를 압축합니다.
‘인천미술 올해의 작가’는 독자적인 작업 세계를 형성해 온 인천 연고 작가를 선정해 신작 제작과 개인전 개최를 지원하는 인천아트플랫폼의 전시 제도입니다. 2025년 중견 부문에 선정된 차기율은 설치, 조각, 드로잉, 회화, 사진을 오가며 인간과 자연, 생명의 순환과 공존을 다루어 왔습니다. 인천의 도시와 섬, 강화와 서해 갯벌에서 지속해 온 현장 관찰과 채집, 발굴, 소성, 집적은 작업의 주요한 방법이 되었습니다. 개인전 《화해기 和海記》는 서로 다른 시기와 장소에서 시작된 주요 연작과 신작을 한자리에 모아, 간과 크기의 차이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살핍니다. 갯벌의 미세한 생명에서 대지와 바다, 돌과 사물, 인간의 얼굴에 이르는 시야의 변화 속에서 자연과 문명, 인간과 다른 존재가 맺어 온 관계도 함께 읽힙니다. 무엇을 이해하고 분류할 것인지, 무엇을 선택하고 이름 붙일 것인지, 인간의 손은 세계에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도 이 관계 안에서 이어집니다.
이번 전시에는 드로잉과 스케치, 작가가 채취한 오브제 등 아카이브 자료도 소개됩니다. 형태와 비례를 가늠하고 재료와 공간을 검토하며 생각을 수정해 온 흔적에서 하나의 작품이 지금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거쳐 온 판단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영상을 제작한 노기훈은 차기율의 작업을 다른 예술가의 거리에서 바라봅니다. 작가의 말과 작업하는 몸, 물질을 만지는 손을 각각 기록하고, 세로 화면의 전신과 확대된 손을 크기를 달리해 제시합니다. 돌을 초상의 자리에 두어 온 시선은 방향을 바꾸어 작업하는 차기율 자신에게 향하며, 아카이브와 영상은 작품과 작가의 시간을 서로 다른 시점과 거리에서 살펴보게 합니다.
전시 제목 《화해기 和海記》는 화해(和解)의 ‘풀 해(解)’를 바다 ‘해(海)’로 바꾸어 쓴 데서 시작합니다. 차기율의 관찰과 작업이 오래 이어져 온 서해는 전시의 구체적인 지리적 출발점입니다. 서해에서는 조수에 따라 육지와 바다의 경계가 달라지고 여러 강에서 흘러온 토사는 쌓이고 깎이며 지형을 바꿉니다. 수많은 생명의 이동과 인간의 노동과 개발, 섬과 도시의 삶, 분단의 현실도 같은 지형에 각자의 흔적을 남깁니다. 유년의 기억과 인천에서의 삶, 강화와 서해에서 지속해 온 현장 경험 또한 이 지리 안에 겹쳐 있습니다. 차기율에게 서해는 익숙한 풍경인 동시에 생명과 물질, 인간의 역사가 저마다의 속도로 변화하고 맞물리는 모습을 오래 바라보게 한 장소입니다. 인간이 그어 놓은 선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조수와 생명의 흐름은 하나의 경계와 질서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기준을 거듭 흔듭니다.
《화해기》에서 화해는 이미 깊이 얽힌 자연과 문명의 관계를 살피고, 인간이 행사해 온 힘의 크기와 속도를 돌아보는 데서 시작합니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남길지, 어디에서 속도를 늦추고 얼마만큼 자리를 내어줄지를 판단하는 일입니다. 서로 다른 크기와 속도의 시간이 한 공간에서 만날 때 인간의 삶 역시 자연과 물질, 수많은 생명이 지나온 시간 가운데 하나로 자리합니다. 동시에 유한한 생을 지닌 인간이 다른 존재와 세계의 조건을 얼마나 크게 변화시켜 왔는지도 선명해집니다.
작가노트의 ‘닻’은 움직이는 바다 앞에서 세계 안에 인간이 어떤 위치를 취할 것인지 묻는 말로 다시 읽힙니다. 어디에 머물 것인지, 무엇을 기억하고 남길 것인지, 다른 존재와 어떤 거리를 이루며 살아갈 것인지가 이 물음 안에 함께 놓여 있습니다. 《화해기》는 여러 존재와 시간이 공존하는 가운데 인간이 자신의 위치와 힘을 어떻게 가늠할 것인지 살핍니다. 화해의 기록은 그 관계를 하나의 답으로 닫지 않은 채, 계속 쓰여 갑니다.
참여작가: 차기율
출처: 인천아트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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