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두들
2015년 5월 22일 ~ 2015년 5월 29일
채현정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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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늘 새로운 낯설음
필자가 기억하는 20대의 그녀는 세련되고 도도한 아가씨였다. 냉철한 지성, 넘치는 자신감, 도전적이고 도발적인 매력과 함께 한편으로는 까탈스러움까지도 느껴지는, 다가가기가 쉽지 않은 도시의 아가씨. 졸업 후 그녀는 퍼포먼스를 더 연구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다른 사람을 통해 간간히 듣는 이야기들로 아주 단편적인 소식을 접할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22년 만에 타지에서 다시 만났을 때, 반가움 다음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내가 기억하던 20대의 그 이미지가 아니었다. 한 남자의 사랑스러운 아내이자, 매일같이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두 사내아이의 엄하고도 다정한 엄마. 처녀 적의 날 선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세월이 우아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 얼굴과 현명한 지혜와 넉넉한 마음을 가진 매사에 일사불란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끊임없는 욕망, 포기할 수 없는 예술
“언니, 이젠 (저도) 아줌마에요, 아줌마!”
예술가 지망생들 중 여성의 경우 흔히들 그렇듯, 결혼을 하면 젊은 시절의 열정을 뒤로 하고 가사와 육아에 매달리게 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예술 활동에 경제적, 시간적 에너지를 우선적으로 쏟아 붓기란 쉽지 않다.
“작업은...?”이라고 필자가 물었을 때, 그녀는 ‘작가’라는 대답보다 ‘아줌마’라는 대답을 했다. 그래, 그랬겠지. 누가 도와주는 사람도 없는데 타지에서 아이 둘 키우며 작업하기가 쉽진 않았겠지. 짧은 재회에서 그 동안의 이야기를 다 나누기란 불가능했다. 그 후로 지구 반대편에서 SNS를 통해 서로의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알게 된 건, 그녀의 예술에 대한 열정은 그 사이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오랫동안 익숙했던 환경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멀고 먼 타국에서 이루어 가는 삶이 쉬운 일은 아니다. 꿈을 안고 떠난 유학길, 그 도중에 이루게 된 가정, 자기 자신 외에는 그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환경, 영원한 이방인 신분... 그녀는 자신의 야망보다는 가정을 보듬었다. 그러나 예술가라면 거의 누구나 동감하는 말,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그녀는 무서우리만큼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그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 그 무언가에 핑계를 대지도 않았다. 남들처럼 똑같이, 아니 그 이상 훌륭하게 아내, 며느리, 엄마 역할을 해내면서도 그저 묵묵히 하나씩 하나씩 자기 작품을 해나갔다. 그녀는 자신의 제한적인 조건 안에서 가능한 작업방식을 택했다. 크기는 작아졌고, 언제든지 그리던 것을 놓거나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했다. 작품을 위해 구상하는 시간도 당연히 길 수 없었다. 짧게 토막 나는 시간 안에 그녀는 생각하고, 구상하고, 그려야 했다.
전업 작가들처럼 대형작업을 하기도, 정기적인 전시회를 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그녀는 기본적인 가정생활을 희생하지 않고 그에 충실하면서 예술의 끝자락이라도 붙들고 있고 싶었다. 이것저것 소품을 만들기도 하고, 동네 아이들을 모아 그림을 가르치기도 했다. 미술서적 번역도 했다. 그러던 중 시작한 것이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이다.
작은 엽서만한 크기의 그래프트지에 연필로 그린 드로잉은 그야말로 누구나 공감하는 가족과 일상에 대한 기록이다. 재료에서 느껴지는 포근함에 더해 아기자기한 캐릭터로 묘사된 일상은 육아의 분주함, 작은 일상의 행복, 그날그날 느끼는 소소한 감상 등등을 덤덤하면서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그녀의 작업은 그야말로 틈새 작업이다. 아이들이 잠든 사이, 학교에 간 사이, 놀이를 하는 사이 틈틈이 일러스트 작업을 하고 가족과의 여행, 잠깐의 외출 사이사이에 눈에 띄는 풍경들을 간단히 드로잉 하여 회화작업을 한다.
또 다른 곳으로... 새로운 적응
짧은 틈새틈새 작업을 하면서 그녀의 예술에 대한 철학도 거대한 세계정신보다는 일상에 대한 애정이 반영되어 있다. 오히려 바쁘고 정신 없는 삶이 예술에 대한 욕구를 일깨우고 자신의 작업에 애정과 활력을 불어넣게 된다. 늘 눈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이들과 끊임없이 몰려드는 일을 해치우는 자신의 모습, 화단의 무심한 화초와 길거리의 나무, 건물, 하늘 등등 누군가에게 짬짬이 쓰는 편지처럼 그녀는 자신의 가까운 것들을 그림 속에 묘사하고 설명하고 그 느낌을 담는다. 그런데 자신을 포함한 가족을 그린 드로잉과 주변 풍경을 그린 회화작품의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녀가 가족과 일상을 묘사한 드로잉은 소소하고 풋풋한 따뜻함이 느껴지는 데 반해, 그녀의 풍경은 멀고, 차갑고, 건조하며, 낯설다. 한 사람이 그린 작품인데 왜 이렇게 정반대의 느낌이 나는 걸까?
20대의 나이에 시작한 타국생활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늘 불안과 긴장의 연속일 것이다. 불타는 학구열로 새로운 학문을 득하고자 먼 길을 떠난 강력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속한 새로운 환경에서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소통하며 이방인으로 지낸다는 것은 불안하고 외로운 것일 수밖에 없다. 다른 것은 언어와 피부색만이 아니다. 자라나는 나무도, 하늘도 고국의 그것과는 다르고 사람들의 행동, 사고방식, 먹는 음식도 다르다. 기본적인 인간 조건 외에 거의 모든 것이 다른 상황에서 언제 어디서 또 내가 모르는 새로운 것이 튀어나와 나를 당혹하게 만들지 모를 일이다. 늘 긴장하고 대비하고 경계할 수밖에 없다. 그런 그녀가 뉴욕의 유학생활에 익숙해지고 ‘Dear Grandma(2001)’, ‘Pain Rain(2001)’ 등 굵직굵직한 퍼포먼스로 왕성한 활동을 하며 꽃을 피울 무렵, 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두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그 보금자리의 보호자가 되었다. 먼 타국에서 이룬 가정의 보호자는 주변 환경에 더 예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녀의 삶은 낯선 곳에서 낯선 곳으로의 이주의 역사로 이루어져 있다. 태어나 자란 고국에서의 삶만큼이나 이제는 타국에서의 삶이 같은 양의 시간이 되었다. 처음엔 유학으로, 그 다음엔 유능한 애니메이터인 남편을 따라 미국의 동부에서 서부로, 한국으로, 이젠 프랑스로... 익숙해져 정이 붙을 만하면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하는 이방인의 눈에 새롭게 펼쳐지는 풍경이 늘 신기하고 신나는 것만은 아니다. 또 다른 시스템에 적응해야 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교우하고 새로운 날씨, 새로운 풍경... 그녀가 풍경을 그린 회화작품이 가족을 그린 포근하고 따뜻한 드로잉과 달리 건조하고 차갑고 낯설고 멀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보아야 보이는 것들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가정, 그 항상성 안에서 자라나는 아이들, 일상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변화들. 반면에 계속되는 이주와 크게 변하는 물리적 환경 속에서 항상성을 보여주는 자연. 흔들리기 쉽고 늘 새로운 적응에 힘들고 외롭지만 사랑스런 가족의 온기로, 그리고 책임감으로 그 낯선 풍경들을 견뎌내고 그들과 친해지고자 한다. 그녀가 그리는 차가운 풍경이 이국적인 도시 풍경보다는 나무, 화초, 꽤 자리를 차지하는 여백·하늘에 닿아 있는 것은, 그녀가 늘 낯설고 경계의 대상인 외부세계에서 그래도 따뜻한 빛과 숨 쉴 공간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빠르게 바뀌고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삶 속에서 잠깐의 자투리 시간마다 그녀는 주변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그 순간이야말로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는 하루하루, 인생의 어지러운 속도 속에서 잠시나마 멈추어 대상에 침잠하여 세상을 깊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 사색의 시간, 길고 깊은 호흡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녀는 작업노트에 이렇게 썼다.
“강해져야 한다. 이제 나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관찰해야 한다.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그것이 나의 일이다. 그렇게 해도 괜찮다.”
괜찮다는 말. 그것은 그녀가 예술가로서 새로운 용기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그 새로운 용기로 인해 예술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커져서 내 눈에 꽉 차게 보이기 시작한다. 너무나 흔하고 너무나 당연해서 쉽게 지나치는 소소한 것들이 채현정 작가의 눈에 들어오고 그녀의 호흡의 시간을 통해 새로움과 공감의 감탄을 일으키는 작품이 되어 펼쳐진다.
어찌 보면 불안하고 외로울 수 있는 평범하지 않은 삶, 그렇지 않다면 가정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많은 부분을 희생시키는 삶일 수도 있는데, 채현정 작가는 그 모든 것을 마치 수퍼우먼인 듯 해내고 있다. 그것도 긍정적으로, 균형 있게, 재미있게, 행복하게!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운 그림들을 전시하게 되면서 필자에게 전시서문을 부탁해 왔다. 그녀가 프랑스에 막 이주한 후였다. 서로 지구반대편에 있으면서 작품에 대해 소통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가능한 한 많은 자료를 보내달라고 했다. 그 이후, 그녀가 보낸 메일이란... 며칠 간격으로 필자의 메일함을 채현정 작가가 거의 채우고 있었다! 그 부지런함과 열정에 감탄과 감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히려 이런 열정에 필자의 글이 부족하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이들이 커 가고 있다. 이제 그녀에게 점점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고군분투하며 발동을 걸은 작품 활동, 다른 사람은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삶을 사는 그녀가 우리에게 보여줄 앞으로의 작품들이 자꾸 기대되는 것은, 마치 재미있는 연재소설의 다음 차례가 기다려지는 설렘과 같다. 그녀의 한국에서의 개인전을 축하하며 이 전시가 그녀에게 또 다른 기회와 열정을 선사해주길 바란다.
2015. 봄
미술학 박사 이승신

출처 - 갤러리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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