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가변크기
2016년 12월 15일 ~ 2016년 12월 29일
최요한 개인전 : 볼멘소리
스러져가는 흔적을 애도하는 ‘달큼한’ 채집의 언어, 볼멘소리
개인의 사적 경험이 공적 공간에 놓였을 때,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가능하게 할까.
사진은 과연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게 하는가.
최요한은 자신의 사적인/공적인 기억을 작업의 모티브로 사진과 텍스트 작업을 이어온 작가이다. 이번 <볼멘소리>에서는 아버지와 관계하는 사적인 사물들을 채집했고 그것이 보내는 신호들과의 정서적인 관계 맺기를 시도했다. 이 과정은 총 네 개의 파트로 구성되었다. 아버지들이 머문 노동의 환경을 수집한 잔여물(2016), 그 공장에서 사용된 수-공구들에 대한 관찰기록 달보드레한 채집(2015), 불의의 사건으로 인해 수감된 아버지의 행적을 추적한 2006년 가을(2016),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이어져 온 것을 드러내는 사진-수공예 작업 뿌리(2016)까지.
<볼멘소리>는 아버지와의 노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날’ 작가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그가 명명하는 공구들을 건네주었다. 오래된 쇠망치, 각종 렌치, 볼트, 가위와 기어 등 흠집 나고 휘어진 공구들. 아버지에게 있었던 연속된 ‘그 날’들은 공구를 닳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말해 아버지가 보내온 시간에 대한 시각 정보로 기능한다. 닳은 공구를 통해 아버지의 노동과 그 세월을 목도한 것이다.
작가는 사진이 무언가를 절단시키고 고립시키는 민첩한 매체라고 말했다. 개인의 감성에 따라 채집되는 움직임과 밀도는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 작가는 차라리 아버지를 늘어놓는 방식을 택했다. 100여 장이 넘는 이미지는 그 자체로 완결된 이야기가 되기보단 연속된 이야기의 파편으로 자리 잡았다. 개별 사진 속 사물들은 한 명이면서 동시에 여럿인, 아버지를 표상한다. 여기서 채집된 ‘달보드레한(달큼한)’ 것들은 아버지의 삶에 대한 증거이며 곧 애도가 된다.
아버지가 머문 공간을 기록한 잔여물에서 각각의 사물들은 아버지, 그리고 그와 함께 노동한 누군가의 ‘아버지들’을 은유한다. 사진에 등장하는 것들은 대개 여전히 익숙하게 사용되어 오는 물건이거나, 쓸모를 다 하였음에도 거기에 남아있는 것들이다. 기록의 방식 역시, 익숙하게 보아왔지만 낯선 것들(이를테면 근현대로부터 시작되어 가까운 근미래에도 남아있을 무언가)을 바라볼 때의 감상적인 채집과 닮아있다. 그것은 일상적으로 사용됐지만 현재의 것들과는 유리되어 있고, 한때 개인을 지탱해온 것들이었으나 점점 그 결속력, 밀도가 느슨해지고 있는 작업 환경을 반영한다.
닳아가는 도구들처럼 주름진 아버지의 신체에 대한 목격이 담긴 달보드레한 채집에서 이는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사진 속 공구와 주름진 손과 맨발의 장면은 휘고 흠집이 난 아버지가 그 자체로 도구가 되어 보내온 시간과 병치 된다. 이는 동시에 아버지가 날마다 마주한 풍경이 어떠했는가를 연상하게 한다. 사진 속 사물은 아버지의 시간을 대변하는 각각의 설명이 되었다. 정지된 그것은 한숨처럼 내리쬐는 빛이 비칠 때만 거기 있음이 드러날 뿐이다.
그리고 2006년 가을. 이는 내가 그를 처음 만난 해 이기도 하다. 보고 싶고, 갖고 싶은 이미지가 끝도 없이 많았던 예민한 감수성의 나이였다. 가난한 자의 라이카라 불리는 야시카 일렉트로35 GSN을 함께 구매했고, 그려나가던 저마다의 청사진으로 가슴이 뜨거웠던 나이. 우리는 같은 도시에서 만났으나 작고 고요했던 그 도시에 대한 기억은 저마다 다르다. 내게는 어쩐지 아픈 구석으로의 태생지에 대한 감정이 우선이라면, 유년기의 지배적인 키워드가 ‘이주’였다 던 그에게 김천은 어떤 도시였을까.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장은 큰 소리를 내던 제조 공장이었다. 주변에서 소음에 의한 민원이 높아지면 그 도시를 떠나 다른 도시로, 또 다른 도시로 이사를 다녔다는 작가에게 그가 머물렀던 곳은 늘 언젠가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 가변적 고향이었을 것이다. 속해있던 도시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언제나 떠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보냈던 십 대의 어느 날들은 그를 더욱 이방인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날 중 어느 날, 납품일의 문제로 부채를 떠안은 채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장은 가동을 멈추고 그 아버지마저 수감될 수밖에 없었던 시기가 그에게 있었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는 몇 번의 큰 문을 지나야 했다고, 그것은 그가 속해있던 세계와 다른 곳으로 가는 입구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던 그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돌이켜보면 내게도 세계가 크게 요동쳤다고 느껴지던 때가 몇 번 있었는데, 그 가을이 작가에게는 그런 계절이 아니었을지.
그로부터 10년. 작가는 아버지가 수감되었던 교도소를 찾았고 지난 아버지의 흔적을 추적했다. ‘법과 질서의 확립’을 위한 감시의 도구, 공허하게 남은 희망찬 표어들과 접근이 금지되어있기에 몰래 넘겨다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방. 본 파트에서는 질서와 감시에 최적화된, 그래서 상상으로밖에 채울 수 없는 조직화된 공간에 대한 조소와 공권력 앞에의 무력감이, 허무가 곳곳에 드러난다.
이윽고 <볼멘소리>에서 가장 마지막에 제작된 뿌리는 앞선 세 작업 시리즈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아버지로부터 내게로 온 것을 드러낸다. 본 작업을 위해, 작가는 어린 시절 그의 부친과 찍은 사진들을 스캔-재인화하였다. 시간의 결을 드러내기 위해 부러 입자가 드러나는 형태로 인화의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붉은 실로 작가와 아버지 사이의 경계를 바느질 해 나갔다. 붉고 분명하게 자리 잡은 작가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그의 아버지는 그을린 형태로 사그라졌다. 헌신은 이토록 그 자신을 삭히고 지움으로써 완성이 되어간다. 이로써 작가는 아버지의 유산이 되었다.
퉁명스럽게 건네는 말투(볼멘소리)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외면할 수도, 외면되지도 않은 부모에 관한 달큼한 애도가 아니었을지. 여기에는 한국 사회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부모-자식의 관계에서, 끌어안기에는 버겁고 내려놓을 수는 없는 헌신과 효의 강요 또는 세습된 교육에 대한 작가의 질문과 연민이 교차한다. 이는 “부모처럼 되기-살지 않기”와 “그들을 슬프게 하지 않기” 사이에서 어떤 것도 명확히 할 수 없는 자녀세대의 어떤 초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족 앞에서 자유로운 이가 몇이나 있을까. ‘가족들이 나오는 꿈은 늘 불안하지.’ 하고 노래하던 루시드 폴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이는 듯했다.[1]
<볼멘소리>에서 묘사된 바래져 가지만 남아 있는 것들, 그리고 가늘게 숨을 내쉬며 멈춰있는 공장과 채집의 대상물은 손에 잡힐 듯 촉각성을 가지지만 채도 높은 푸른 빛에서조차 물기가 만져지지 않는다. 말이 없고 건조하며 녹이 슬어있거나 정지해 있다. 온도로 표현하자면 이미 끓는점에서 한참을 내려온 미온의 상태. 그래서일까, 최요한의 사진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겨울 냄새가 난다. 만지면 바스락 소리가 날 것 같은, 그러나 동시에 소리 없는 장면 너머로 작가는 피사체와의 거리를 숨기지 않고 다가선다. 클로즈업. 그는 그가 보는 것을 명확히 “본다”. 개별 대상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사진 전체에 가득 차 있다. 이미지 조작으로 실제를 구분하기조차 어려운 이미지 과잉생산의 시대에 사진을 통한 “보기”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혹은 가져야 할까)? 가시적 세계의 것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사진의 기계적 특성상 ‘본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 것은 불가피한 질문이 된다. 보는 것은 결국 작가가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이는 다시 말해 작가의 삶에 대한 태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요한은 ‘무엇을’ 보고 있나.
먼지가 내려앉은 공장 기계, 창틀 위 죽은 벌, 물기 없이 바싹 마른 수건, 기름때에 절은 옷가지들, 뜯어진 벽지, 마른 하수 구멍, 철창 너머로 보이는 먼 먼 교도소 건물, 나무 너머로 가리어진 순찰 탑, 문틈으로 새 나온 철판 위의 빛줄기, 녹이 슨 거울, 미처 끝내지 못한 설거짓거리들, 흐트러진 쌀알, 주름진 손,…
그의 사진은 미끈한 것, 광택이 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손가락으로 따지면 예쁜 약지보다는 연필 근육이 붙어있는 중지이거나 짧고 조용한 새끼손가락에 가깝다. 차라리 생채기가 나 있는 것들. 최요한에게 매끈한 것은 되려 부정이다. 잘 정렬된 자본주의적 스펙터클이 아니라 그것이 생성되는 과정의 거친 단면과 개인적 서사에 주목함으로써 이에 대한 양가적인 해석을 끌어낸다.[2] 그것은 작가가 통과한 시간의 결이 어떠했는지를 상상해보게 한다. 사진을 보고 있으면 지나칠 수 없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다가가 찍었으리라 생각되는 장면들이 많다. 남은 것들은 버려진 것도 아니고, 제자리를 잃은 것도 아닌 데 거기 있는 것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그의 눈길이 머물러 있고, 그리하여 선택한 것들은 대게 쓸모를 다한,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 유효한 채집 대상물이다. 쓰임을 다 하고 남은 것들이 가지는 연약함과 으스러진 시간들이 거기에 있다.
이처럼 작가는 아버지의 연대기를 되짚어가며 한 개인(작가)의 서사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지에 대하여 시각적 언어로 서술한다. 그리고 작품과 관객이 대면하는 때에, 해석이 아닌 관찰과 개별 상상력을 요하는 순간을 소원했다. 이러한 감상법은 그의 최초 작업들과도 닮아있다.
최요한의 사진을 처음 봤던 때를 기억한다. 그의 사진은 우회하지 않고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한다. 지극히 사적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동시대와 닿아있는, 공공의 영역을 다루지만 내밀한 자신의 오늘에 대해 말하기를 시도하는 사진들. 나는 그 ‘말하기’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툭 하고 불거져 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지금과 공명하여 사회의 틈들을 고발해주기를. / 안성은 (아트센터 나비)
미주_
[1] 루시드 폴, 6집 ‘꽃은 말이 없다’ 수록곡, 가족, 2013
[2] 이 점은 동시대의 자본주의적 아름다움이 부정성과 낯섦이 제거된 채, 매끄럽게 다듬어지고 향락적 향유의 대상으로만 축소된 것을 비판하는 한병철의 시선과 그 맥을 같이 한다. ;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이재영 역, 문학과 지성사, 2016
작가 노트
시작은 아버지와의 노동에서부터였다. 가져와 달라는 공구를 전해주었다. 일이 끝났을 시간에 그 공구의 흠집과 휘어있는 부분들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었다.
‘그 날’의 노동 탓이었을까, 왠지 모르게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고 차갑게 느껴졌었다.
노동의 연속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공구들을 갉아 먹어갔다. 공구들의 흠집은 그의 삶에 관한 시각적 정보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 공장은 멈췄다.
정지된 삶이 된 것이다.
그곳을 거쳐 간 그리고 그곳에 머물렀던, 아버지와 함께 일을 했던 사람들의 공간을 휘저으며 아버지의 흔적을 채집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라는 인물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은 다양하다. 소스라치는 순간도 있었고, 묘하게 아버지와 오브제가 겹쳐지는 모습에 시큰함도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잔망스러운 모습을 찾았다.
더불어 맹목적인 부모의 헌신에 대한 의문을 떠올렸다. 난 못 할 것이라는 가설도 함께.
순간, 난 그의 등에 지독하게 달라붙어서 칭얼거린 것이다.
자녀를 향한 날 선 교육과 헌신은 모순을 낳았고, 당연하다는 식으로 기이한 사회현상을 구축해 나갔다.
스스로 무언가를 준비하지 않는다면 힘들어진다는 것이 분명한 노후가 걱정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난 정말 오랜 시간 그의 등에 업혀 있구나.
스스로 설 수 있고 걸을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걸까.
헌신도 교육이 되나요
난 아직도 볼멘소리를 내뱉으며 그와의 관계를 더듬고 있다.
opening 2016년 12월 15일 오후 7시
출처 : 가변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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