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로미늄
2025년 6월 6일 ~ 2025년 6월 30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옷을 살펴보고 구매하기 위해 할로미늄을 찾은 당신에게, 이 공간은 조금 낯선 모습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정상 운영 중인 쇼룸에서 미술 전시를 하려고 모인 우리의 목적은 말하자면 이상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데 있습니다. 욕망의 대상이 되는 사물과 그렇지 않은 사물이 뒤섞여 아슬아슬하게 공존하는 장면을 기대하며 이 전시를 꾸렸습니다. 물론 당신의 의식 혹은 무의식 속에서 무엇이 진정한 욕망의 대상이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전시 제목인 《페도라》는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인용한 가상의 도시 이름입니다. 도시 ‘페도라’는 투명한 유리 공들 안에 가능한 수많은 페도라의 모형들을 배치하여 전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든 페도라 시민은 “자신의 욕망에 들어맞는 도시를 선택하여” 유리 공을 들여다보는 일을 중요한 활동으로 여깁니다. 유리 공 속 숱한 페도라의 가능성들은 누군가에게는 가능한 미래, 지나가 버린 꿈, 혹은 실제보다 중요한 가상으로 작동합니다. 당신은 이곳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나요? 욕망에 들어맞는 무언가를 찾으러 온 당신에게, 쇼룸 사이사이에 놓인 미술이라는 이름의 미묘한 사물들은 어떤 말을 걸게 될까요?
어떤 작업들은 다른 공간의 기억을 중첩하는 방식으로 이곳의 풍경에 개입합니다. 이를테면 송민정의 〈터뷸런스〉는 창가에 남겨진 장식의 흔적들과 이국의 향을 품은 쿠키 타일들, 그리고 공간 내에 놓인 소설의 조각들로 존재합니다. 곳곳에 놓인 흔적들은 어쩌면 과거 혹은 미래의 기억일지도 모를,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집을 여기에 소환합니다. 낯선 도시를 배경으로 쓰인 문장들이 낯설지 않은 것은 ‘집’에 관한 공동체적 기억을 가로지르며 연대의 가능성을 제안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이경의 〈어떤 비밀들〉과 〈입김〉은 일상적인 사물의 재료와 맥락을 비틀고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서 ‘익숙함과 낯섦 사이 어딘가’의 풍경을 연출합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공간의 틈을 비집고 나오는 모양은 뭔가 다른 상황임을 직감하게 하고, 쪼그라든 모양은 부재하는 입김을 떠올리게 합니다. 쇼룸의 깊숙한 곳에서 맥락을 이탈하는 풍경을 마주하며, 당황과 즐거움이 교차하는 순간을 경험해보기를 바랍니다.
한편, 관계 맺음을 기반에 두는 고요손의 작업은 쇼룸의 주인과 전시의 기획자, 두 사람의 이름을 제목으로 가시화합니다. 이는 공간과 전시를 만들어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독해하고자 하는 시도로, 쇼룸에 늘 있었던 옷걸이를 재료로 공간을 변주하는 작업 〈유미의 옷장 속〉, 기획자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등장한 도시를 구현하려 시도한 〈김명진, 꿈속 도시〉로 구성됩니다. 앞선 작업을 위해 작가는 할로미늄에서 쓰는 옷걸이를 다시 주물로 떠서 같은 모양의 알루미늄 옷걸이로 만들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똑같기만 한 옷걸이, 그러나 작가에게는 ‘같지만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걸려 있지만 뭔가 달라 보이는 수상한 옷걸이들과 그 흩어진 모양은 공간 전체를 해석하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공간 중앙을 가로지르며 세트를 이루는 듯한 두 작업은 사실은 서로 다른 이름을 하고, 가짜 옷걸이와 가짜 올리브, 혹은 진짜 옷걸이와 진짜 올리브로 구성되며 가까이 들여다보아야만 알 수 있는 차이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개별적인 세계를 꺼내 보이는 드로잉들 또한 이 공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김춘미의 드로잉에 나타나는 형상들은 출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기억의 조각으로부터 비롯합니다. 그는 고정된 사물을 붙잡으려 하는 대신 시간의 흐름과 함께 가는 데에 마음을 두고, 오래된 기억으로부터 계속해서 떠오르는 바다를 소환해 냅니다. 한편에는 이와 다르지만 어딘가 서로 닮은 모습으로 ‘나무가 되어가는 여자’가 놓여 있습니다.
한편, 이해선의 드로잉은 기존 할로미늄의 제품들과도 연결되어 있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목소리를 조금 더 개입시키고자 했습니다. 어렸을 때 했던 게임 속 요소들을 현재의 미감으로 재해석하여 전시 포스터, 우산 등으로 자리를 옮겨 다니는 그의 드로잉은 결국 개인의 세계관에 기반을 두어 이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문득 자신의 작업을 일러스트, 도안, 디자인이 아닌 ‘그림’이야 말해야 빛난다던 그의 편지가 떠오릅니다.
전시에 앞서 기획자는 세 번의 편지를 참여작가들에게 전송했고, 때때로 답장을 주고받았습니다. 이번 전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각자가 할로미늄이라는 장소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이자, 그보다 먼저 날것의 생각을 담은 편지로 기획자와 작가가 관계를 맺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를 엮은 『편지들: 페도라를 엮기』에서는 흩어졌다가 모여드는 글자들이 개인적인 편지를 간신히 해독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듭니다. 지금 쇼룸에서 흘러나오는 사운드도 가까스로 읽히는 편지들과 함께 작동하는 일종의 메시지입니다. 다양한 감각을 동원해 쇼룸의 이상한 상태를 즐겨주시길 바라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기획·글 김명진
작가 소개
고요손은 ‘누가 어떻게 감상하느냐에 따라 변화하는 조각’을 만든다. 직접 손으로 깎아낸 비정형 형태의 조각을 비롯하여 음식과 같은 사라지는 재료로 소재에 변주를 주거나 시, 퍼포먼스 등을 활용해, 조각을 고정된 대상이 아닌 시간을 기반하여 경험하도록 만드는 실험을 이어나가고 있다.
김춘미는 추상회화를 중심으로 작업을 하는 회화 작가로, 런던과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 중이다.
송민정은 보이지 않는 감정의 기류와 일상의 미세한 흔들림 속에서 생동하는 것들을 발견하고 전송해 내려 한다. 소외된 감각, 비가시적인 존재들과 호응하며 힘의 형태를 전환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이해선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일러스트레이터로 드로잉을 통해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탐색하며, 주로 ZINE을 매체로 자신만의 시각 언어와 세계를 구축해왔다. 현재는 게임적 상징성과 동시대적 감각을 결합한 작업을 통해 자신의 시각적 서사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한이경은 일상 사물의 물성과 그에 얽힌 관습적 인식을 탐구한다. 주로, 사물의 물질적 변형과 언어적 전환이 어떻게 교차할 수 있는지 실험하며, 언어와 이미지가 상호작용하며 관습적 시각을 재구성하는 다층적인 경험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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