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션서울
2025년 3월 7일 ~ 2025년 3월 18일
하늘을 보고 사는 자들은 숨이 멎은 후 땅에 묻힌다. 이들은 지하地下를 보지 않는다. 땅 아래에는 눈이 감기고, 숨은 막혔으며, 소음과 무음을 구분하지 않는 무엇들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지하에 있는 무엇들은 이상한 괴물들이다”―. 그러므로 탄압받아 마땅하며 생을 박탈당해도 본래 그러한 곳에 있었다가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것뿐이니 저의 잘못은 없는 것이다. 지하에 있어 보이지도 않던 것들이 가끔씩 눈에 뜨이거든 잘해주기도, 동정하기도, 욕하기도, 무시하기도 하며 기분에 따라 행동하고서는 까먹어 버리면 될 일이다.
보이지 않는 자들의 고통1)에 조소하는 자여, 슬픔에 무관심한 자여. 이곳은 지상의 지하이다. 여기서 바닥은 천장이 되고 지하는 하늘이 된다. 머리는 뒤집히고 시야는 가로막혀 소음과 무음을 구분하려 드는 건 무용하다. 삶은 언제라도 그렇게 고꾸라질 수 있는 것. 제 것이 아니라 여겼던 무능한 공포2)가 덮쳐오거든 그것은 보이지 않았을 뿐 늘 곁에 도사리고 있던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신성과 잔해와 믿음과 배신이 공존하는 곳, 이곳은 카타콤이다.
―카타콤은 지상의 질서로부터 몰려나온 자들,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존재로서 ‘비인간 inhuman’의 삶(으로 내던져진/을 선택한/이 주어진) 자들의 공간이다―. 이들은 지상의 네트워크 바깥에 존재하며, 그들의 방식으로 소통하고 살아간다. 서현지는 카타콤을 삶과 죽음이 뒤엉켜 어떠한 수직적 위계도 없이 존재하는 곳이라 말한 바 있다.3) 박해받는 기독교인은 ‘하늘에 계신 고귀한 신을 섬기는 인간’인 동시에 ‘지상의 인간’들에게는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다. 존재의 위계는 지상과 지하라는 수직적 위치 관계 속에서 언뜻 명확해 보이나, 실상은 그저 믿음이라는 모호함으로 침묵을 지키며 간신히 질서를 지탱하는 것이다. 그 침묵으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자-여성, 장애인, 퀴어, 난민을 비롯해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모두-를 향한 폭력은 묵과되고 승인된다.
서현지는 지속적으로 인간의 무심한 폭력과 그를 가능케 하는 믿음의 다면성에 대해 다루어 왔다. 종교는 그러한 복합적인 성격이 잘 드러나는 다분히 인간적인 체계일 테다(종교로 촉발된 수많은 전쟁과, 종교가 구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듯이 말이다). 작가는 인간의 창조물인 종교에서 인간 자체를 소거하고자 풍교Fungyo라는 ‘버섯 종교’를 만들고, 풍교에 존재하는 버섯‘만’을 위해 어둡고 습하며 그늘진 성전을 구축한다. 어떠한 믿음을 가진 인간이든 풍교에서는 ‘비-버섯’이므로, 어둑한 시야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 동선에 걸리는 조형 요소로 하여금 시시각각 불편함4)을 느끼게 된다. 요컨대 이곳은 풍교의 성전이자 풍교에 침범한 인간의 카타콤이며, 지상에 위치하지만 지하의 성격을 일부 띠는 경계 공간으로 기능한다. 이곳은 일시적인 카타콤이자 그저 조금 성가신 정도의 불편함만을 제공하겠지만 이 문밖에 역시 수많은, 진짜의, 너무나 길고 비가시적인 카타콤이 존재하며 우리는 단지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미자믹으로, 전시를 준비하며 작가는 비인간non-human과 일말의 소통을 시도해 보고자 버섯의 언어를 전기 신호로 치환한 연구를 토대로 사운드 작업을 협업하거나(<Absence in Tongue>, 2025) 애니멀 커뮤니케이터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텔레파시 테스트를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취했다.5) 그것은 혼란과 오해를 유발하고 소통의 감각과는 다소 거리가 있던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거기에서 발생하는 확장과 유대가 있다. 그로부터 자신의 세계를 다시 돌아보아 알지 못했던 것들을 포착하고 관찰하게 된다. 그 관찰의 과정에서 새롭게 발견한 것들은 분명하게 존재한다. 어쩌면, 감각할 수 있는 세계는 그런 방식으로 늘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놓치지 않는다면 세계는 영원히 확장될 수 있다.6) 땅 위로 보이는 버섯의 자실체는 아주 작은 개체이지만, 균사체는 얽히고설켜 지하에서 그 크기를 불려 나가는 것7)처럼, 카타콤에서 영원히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것처럼.
[괄호]안의 단어는 글 작성자가 임의로 변경한 것으로, 이번 전시의 맥락에서 재해석 혹은 오독한 흔적이다.
1) 반면 바로 자신의 고통이라는 절대적이고 단순하며 압도적인 사실 때문에 죄수에게는 그 어떤 질문의 중요성도, 나아가 질문이 지시하는 세계의 중요성마저도 무미건조하고 보이지 않게 된다. 심한 고통은 세계를 분쇄한다. 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메이 역, 45.
2) 동물은 그를 집어삼키는 내재성에 별 저항 없이 순응하는 반면 인간은 신성의 감정에 빠지면 거기에 대해 일종의 무능한 공포를 느낀다. 조르주 바타유, 종교이론, 조한경 역, 45.
3) “카타콤은 장소마다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제가 방문했던 카타콤은 방이 구분되어 있었어요. 네모난 벽돌로 막혀있는 층들이 마치 아파트처럼 쌓여있었는데, 그것들이 전부 카타콤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방이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냥 구멍을 판 뒤 시신을 안치했는데, 시간이 지나 악취가 나고 전염병이 돌자 벽돌로 구멍의 입구를 막아 두었다고 했어요. 그중에는 아주 작은 방들도 있었는데,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의 무덤이었어요. 저는 카타콤을 방문하기 전에는 죽음의 이미지가 좀 더 제 머릿속에 박혀있었는데, 오히려 방문 후에는 그곳이 삶의 공간이기도 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아주 큰 카타콤의 일부이자 무덤이 주가 되는 공간을 본 것이었지만 사람들이 계단을 오가고 여러 방들을 다니며 살아갔던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 죽고 나서의 자신의 몸 또한 카타콤에 있지만, 살아있을 때의 그들이 있는 곳 또한 카타콤이라는 게 공간의 군데군데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 다른 카타콤들은 온전히 무덤으로 쓰인 경우가 많다고 하지만 제가 들렀던 카타콤에는 사람들이 실제로 거주를 했고, 그곳에서 먹고 자고 미사도 하며 지냈다고 했어요. 그들에게는 삶의 공간이었을 이 카타콤이 미래에 그저 무덤의 용도인 카타콤과 같은 이름으로 묶여 분류되는 게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현지가 문희에게, 2024년 10월 2일, 오전 3시 30분
4) 폭력 자체는 자체적으로 정당하지 않지만 인간다운 삶을 가능케 한다는 측면에서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 인간적[버섯적] 위상에 대한 위협에 대응하는 최후의 수단은 폭력일 수밖에 없다. 즉 언어 행위가 유효하지 못할 경우 인간성[버섯-성]을 유지하는 최후의 수단은 폭력이기 때문에, 폭력은 오히려 인간적[버섯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한나 아렌트, 혁명론, 홍원표 역, 26.
5) “수업을 듣는 교수가 애니멀 커뮤니케이터 초대해서 세미나를 열어 줬어요. 참여했는데 동물 사진을 가져와서 보여주면서 상상해 보라고, 그걸로 소통한다는 거예요. 식물이랑 해도 된대서 식물 가져왔는데 식물에 내 생각을 덧씌우는 걸 소통이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 전시를 보는 것도 좀 이런 식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현지, 2024년 10월 19일. 미팅
6) 그러나 개개인이 세계로부터 도피할 때 세계는 거의 명백하게 손상됩니다.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홍원표 역, [e-book] 제 1장 어두운 시대의 인간성: 레싱에 관한 사유
7) “꿀버섯이 지구상에서 제일 큰 생명체이기도 해요. 균사체가 하나의 버섯[세계]이라 자실체[세계]가 여러 개여도 큰 얽힘은 하나라서요.” 현지, 2024년 10월 19일, 미팅
작가: 서현지
사운드 디자인: erinleehong
그래픽 디자인: zozo
기획/글: 한문희(아모)
촬영: 한보경
설치 도움: 김민선, 김동민, 김지우, 이채원, 이해빈, 원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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