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롱드에이치
2015년 10월 15일 ~ 2015년 11월 27일

타불라 라사 (‘Tabula rasa’, 라틴어로 ‘깨끗한 석판’을 의미)는 영국의 철학자 로크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함축적인 단어이다. 로크는 이전의 ‘본유관념’, 즉 인간이 탄생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생득적 관념에 부정하였는데, 의식 세계의 출발은 ‘빈 방’, 혹은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하얀 종이’의 상태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것은 외부로부터 받은 영향과 경험으로써 채워진다고 했던 것에서 기인하였다. 그는 사물-대상과 현상-실체의 관계에 있어서 ‘감각’에 의해 형성된 관념과 더불어 이를 지각하고, 사고하며, 의심하고 깨닫는 일련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반성’을 통해 관념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대상과 실체와의 간극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작품을 통해 ‘관념 형성’에 대한 고찰을 꾸준히 이어온 작가 한경우는 Uncommon Sense 전시에서 이와 같은 맥락의 ‘감각’과 ‘반성’을 상징적으로 담아 보여준다. 작품들은 표상과 개념을 원천으로 한 외적 대상으로써의 역할을 지니고 궁극적으로 객관적 본질을 전하고자 한다. 더하여 인간을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로 보았던 타불라 라사가 미학적으로 발현된 작품을 통해 목적 의식 너머에 자리잡고 있는 작가의 철학 -주관적인 이해와 상대적 관념의 차이를 포용하고자 하는 관용의 태도– 을 엿볼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
작품 속의 당구공이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실제 당구에서는 정밀하게 맞춰지는 수평이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경기가 중계되는 동안 시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편집으로, 화면상 수직으로 된 당구대 위를 가로지르는 당구공들을 볼 수 있다. ‘Senseless Sense, 2015’ 작품으로 돌아와보자. 영상 속의 당구공은 방송에서 보았던 것과 다르게 중력의 법칙에 의해 떨어져 내린다. 가상 현실 같은 작품의 영상이 본질이고, 지극히 자연스럽게 여겼던 장면은 존재 할 수 없는 이미지라는 것이 모순되는 지점이다. 한경우 작가는 범람하는 미디어 시대를 살며 무분별하게 가공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자, 이제 어떤 것이 더 자연스럽게 보이는 가.
3대의 카메라가 똑같은 화면을 찍고 있다. ‘Beginning without End, 2015’는 실시간 카메라를 통해 면과 면이 만나는 3차원 공간의 모서리를 화면으로 보여주는 설치 작품이다. 전체 공간의 규모가 확장되거나 축소되어도 ‘모서리’는 그 비율과 형태가 동일하게 유지된다는 점에 착안한 이 작품은 주변 성질을 배제한 공간 자체의 구성에 주목한다. 또 다른 작품 ‘Pretending walls-I, 2015’ 를 살펴보자. 모두 같은 공간을 찍은 듯한 사진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사진의 실체는 처음 스치듯 마주했던 그것과 확연히 대비된다. 서로 다른 것이 특정 시점에서 같게 보여지는 이들 작업은 관객 스스로 내린 결론의 실체를 파악하게 만들어 주는 최소한의 실마리를 통해 지금까지 인식의 기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결코 절대적일 수 없음을 여실히 깨닫게 한다.
Uncommon Sense 에서 보여지는 한경우의 작품은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고 대안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물-대상 그리고 현상-실체, 이들을 구분 짓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관념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전하며, 일상적인 편견과 오류를 작품을 통해 환기하고자 하는 단순한 역할로 작용한다. 작품에는 실체만 있고, 착시 효과와 같은 시각적 유희와 장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시지각의 오류’를 범한 원인은 관객 스스로의 일상적 태도 안에 있으며, 관념으로 형성된 주관적인 시선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할 뿐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끝에는 또다시 실체가 자리할 것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형성된 관념을 넘어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경우 작가는 ‘과연 우리가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를 객관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인가?’ 에 대한 질문을 건네며 조금씩 단단한 벽을 허물고 있다. 이 전시가 세상을 향한 순수한 시선과 사유로 이끌어주는 매개체가 되어 새롭게 써 내려갈 타불라 라사를 기대해본다. (글. 손하영)

Senseless Senses, Video Installation
Various Dimensions, 2015

Beginning without End
Live Video Installation
Various Dimensions, 2015

Beginning without End Live Video Installation
Various Dimensions, 2015

Pretending Walls_ll, Digital C-print, 100x100cm, 2015

Pretending Walls_l, Digital C-print, 100x100cm, 2015
출처 - 살롱드에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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