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갤러리
2015년 11월 4일 ~ 2015년 11월 26일
오세경, 사냥2 Hunt2, 80x116cm, Acrylic on Korean Paper(Hanji),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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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망과 냉소의 사이에서
우리는 오세경과 박정원의 2인전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우리는 두 작가의 작품들이 단순히 한 공간에 나열되는 수준을 넘어서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며 공명하는 상황을 기대해볼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에서 두 작가의 작품들이 주제에 관한 측면으로 긴밀하게 공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두 작가가 주로 다루는 주제가 특정 요소로 자연스럽게 묶일 만큼 연관성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제적인 측면 보다는 두 작가가 작품 활동에 임하는 태도를 다루는 것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두 작가를 살펴봄에 있어서 주제와 태도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적절한지 고려하기 위해서라도 우선 두 작가의 작품들이 전반적으로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 살펴보자.
박정원은 평소에 자신의 관심을 끄는 대상들을 가능한 비슷하게 모방하거나 조합하는 과정을 통해서 대상의 외면과 속성을 은근히 변주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가 단순히 대상의 외면을 변주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속성까지 변주하고자 하는 것은 변주를 통해서 개인과 사회에 관한 다양한 현상들을 관망하기 위함이다. 박정원이 개인과 사회를 작품을 통해 관망하는 과정은 주로 적바림과 유사한 그림들로 시작해서 사진이나 입체, 설치로 마무리된다.
박정원의 이러한 경향을 염두에 두고 그의 작품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 번째로 살펴볼 박정원의 작품은 <빠르게 살자>다. 바르게살기운동 협의회에서 지역마다 세우는 ‘바르게 살자’ 석제 조형물에 흥미가 생긴 박정원은 우선 석제조형물의 외관을 종이에 간략하게 베꼈다. 우리는 평소에 어떤 사건이나 대상을 보고 종종 흥미를 느낄 수 있지만 흥미를 느끼는 이유를 말과 글로 설명하려고 하면 쉽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말과 글로 구체화 되지 않은 느낌들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박정원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경험을 통한 느낌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그 느낌들이 휘발되기 전에 단단히 붙잡아 두기 위해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박정원은 대상의 외관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변화를 줘서 전혀 다른 속성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는 ‘바르게 살자’ 석제 조형물을 베낄 때도 ‘바르게’를 ‘빠르게’로 바꿔치기했다. ‘바르게’가 ‘빠르게’로 바뀌면서 공동체의 윤리를 지향하던 의미는 맹목적인 가속과 성장을 골자로 한 자본주의적 의미로 전환된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서 완성된 박정원의 그림은 차후에 사진, 입체, 설치로 구현되기도 하는데 <빠르게 살자> 그림은 후에 입체로 재현되었다.
<빠르게 살자>와 견주어 보기 좋은 박정원의 또 다른 작품은 <숨 쉬는 건물>이다. 이 작품도 <빠르게 살자>와 마찬가지로 그림이 입체로 구현된 경우에 속한다. <숨 쉬는 건물>은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지고 세워지기를 반복하는 건물들에 관련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건축공사 현장에서 작업자가 높은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발판 역할을 하는 비계(飛階)와 공사장 천막으로 제작되었다. 공사장 천막 뒤로는 바람이 불어서 비계에 고정된 천막이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울렁이게 된다. 그래서일까. 비계에 걸린 천막이 바람에 울렁이는 모습은 급작스레 철거되었거나 재건축되었던 수많은 건물의 흔적처럼 보이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평소에 무심코 지나가는 건물들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아로새겨져 있다. 건물에 직접 살을 부대끼며 살았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여러 해 동안 건물을 스쳐 지나간 사람들도 건물을 자기 삶의 일부로 부지불식간에 인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단순히 경제적 이득 때문에 이뤄지는 잦은 철거나 재건축은 그 건물과 직접 관여되어있던 사람뿐만 아니라 건물을 자신의 주변 환경으로 인식하던 사람들에게도 큰 상실감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숨 쉬는 건물>을 <빠르게 살자>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빠르게 살자’ 구호는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사회적 신뢰를 담보로 경제적 이득만을 향해 달려온 우리의 궤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빠르게 살자>와 <숨 쉬는 건물>에 이어서 도 눈여겨 볼만한 작품 중 하나다. 은 촛불시위에 사용되는 촛불과 스타벅스 로고를 조합한 그림에서 시작되어 설치로 귀결된 경우다. 촛불시위는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효순, 미선 양을 애도하던 행사가 기점이 되어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정국과 광우병 반대 운동을 거치면서 점차 구체화 되었다. 표피적인 측면만 보자면 일반적으로 2008년에 본격화된 촛불시위는 비폭력을 외치며 국민과 국민, 국민과 정부의 대화를 지향한 자율적인 공론의 장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촛불시위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들을 살펴보면 비판적인 시각도 없지 않다. 이를테면 촛불시위를 위험사회와 마주한 중간계급의 정상국가와 치안에 대한 욕망으로 본 이택광과 촛불시위에 참여한 대중은 자율적이고 혁명적인 다중이라고 본 조정환의 논쟁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런데 박정원이 촛불시위에 관심을 둔 것은 촛불시위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와 같은 선상에서 발생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박정원은 단지 을 통해서 촛불집회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의미가 이전과는 좀 달라진 것이 아니냐고 스스로 질문을 던진 것이기 때문이다.
는 한때 된장녀라는 신조어와 더불어 허세와 사치의 상징이었던 스타벅스 로고와 촛불이 조합되었다는 측면에서 촛불시위가 무기력하게 소비되고 있음을 꼬집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박정원의 이런 시선에 대해서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이택광이 지적한 바 있듯이 촛불시위는 중간계급의 정상국가, 치안에 대한 욕망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촛불문화제가 드러낸 의제들은 중산층이나 중산층을 갈망하는 이들이 신경 쓸 만한 범위인 개인과 가정의 안전 같은 문제를 크게 넘어서지 않았다. 이러한 측면은 촛불문화제에 참여했던 이들이 노동문제와 관련된 집회로 직결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촛불시위를 움직였던 주된 동력은 중간계급이었지 10대나 좌파가 아니었다. 단지 무기력해진 좌파진영이 갑자기 파열해 나온 촛불시위를 전유하고자 했던 욕망이 이따금 있었을 뿐이다. 만약 박정원이 촛불시위의 성질을 조정환이 말하는 자율적이고 혁명적인 다중의 힘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면 충분히 지금의 촛불시위를 냉소적으로 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촛불시위에 참여한 대중의 특성을 되뇌어보면 혁명적인 다중보단 이택광이 이야기한 중간계급이 촛불시위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더 적합하다. 따라서 우리가 최근 촛불시위에서 느끼는 회의감은 촛불시위의 성질이 변화된 탓이기보다는 단지 그 열기가 이전보다 식은 탓이 크다.
앞서 언급한 세 작품 외에도 박정원의 다른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는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것들을 시각적으로 변주하는 과정을 거쳐서 외부로 드러낸다는 것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그가 자기 생각을 외부로 드러내는 관점과 방식이 타인에게 새로운 차원의 경험과 인식으로 다가서게 할 정도는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박정원이 자신의 의문들을 외부로 드러내는 관점과 방식은 그다지 새로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존의 것을 깊게 파고들어가 재맥락화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박정원에게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이유는 그가 작가로서 내적인 안정감을 찾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3자의 시점으로 사회를 꽤 먼 거리에서 관망하는 입장에 그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박정원의 작품은 미묘한 재치를 추구하지만, 그 뒤에는 미묘한 냉소가 자리 잡고 있다.
오세경은 박정원과 다르게 관심사와 직접 관련된 도상보다는 은유의 과정을 거친 도상들을 주로 사용한다. 그러나 오세경도 작품 활동을 통해서 개인과 사회를 3자의 시점으로 관망한다는 점은 박정원과 동일하다. 오세경은 은유의 과정을 거친 도상들이 평면 위에서 공허한 상황을 연출할 수 있도록 재구성해 개인과 불화하는 사회를 시적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개인과 사회의 불화는 개인이라는 범주가 무한하기 때문에 국가가 개인을 항상 ‘규정’하거나 ‘특정한 지위’를 부여하려 하고 이 과정에서 모든 개인은 반드시 특정하게 규정되어 있는 집단으로서 국가와 조우한다는 이택광의 말과 비슷한 맥락 위에 있다. 우리는 사회 안에서 불확실한 갈등이나 혼란이 심화되거나 파열하는 상황과 빈번히 마주한다. 사회와 개인이 어긋나며 빚어내는 갈등과 혼란이 거듭될수록 개인은 정지우의 말처럼 사회와 자신의 관념이 결코 일치될 수 없음을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한계를 인지한 개인은 대부분 자유를 무기한 유보해서라도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자신의 관념을 삶 속에 충만히 채워보기도 전에 뒤틀어 버린다. 오세경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공허함의 특이점은 작품마다 공허함의 온도가 미세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오세경이 재구성하는 화면은 대부분 어둠 속에서 플래시가 터져 백화된 사진처럼 표현되어 음울하고 차갑게 느껴진다. 그래서 오세경의 작품들이 품고 있는 공허함을 굳이 온도로 따져보자면 영하(零下)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세경의 작품들은 단순히 영하라는 큰 범주 하나로 뭉뚱그려 설명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오세경의 작품들이 서로 연결된 방식을 고려해 봤을 때 그의 작품들은 영하와 영도(零度) 사이에서 미세하게 오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은 오세경이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제작한 작품의 내용과 구성이 변화하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오세경의 <동맹>이나 <사냥>을 살펴보면 약탈적 폭력을 상징하는 하이에나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공간에 배치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폐허는 지역성이 없는 불특정한 공간이다. 이 두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하이에나들은 폐허 속에서 욕구를 투사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 때문에 하이에나가 품고 있던 약탈적 폭력은 이따금 하이에나의 육체를 비집고 나와 유령처럼 작품의 표면을 떠도는 것처럼 보인다. 하이에나의 욕구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지 간에 이들의 욕구가 어떤 작용도 만들지 못하고 폐허 속에서 잉여로 떠돈다는 점에서 이 두 작품은 영도에서 꽤 먼 곳에 있다. 그런데 <번식>과 <8학년 소녀>에서 하이에나는 나체의 소녀에게 약탈적 폭력성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이에나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소녀를 그린 <번식>과 하이에나에게 내장을 뜯긴 와중에 눈을 뜨고 감상자를 응시하는 여학생이 그려진 <8학년 소녀>는 하이에나의 약탈적 폭력성이 소녀에게 투사되는 참혹한 사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동맹>, <사냥>에 비해서 조금은 영도에 가까운 곳에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오세경은 <번식>과 <8학년 소녀> 전후로 운동장 한가운데로 소환되는 소녀의 하반신을 그린 <환생>과 붉은 하이힐을 신고 성인남성의 커다란 외투를 걸친 소녀가 축구 골대 앞에 서 있는 <어른아이>를 통해서 작품의 공간을 지역성을 가진 공간으로 전환하고 동시에 하이에나의 자리는 주로 의무교육을 받을 시기에 해당하는 소녀로 대신한다. 하이에나의 자리를 소녀가 대신하는 것은 약탈적 폭력에 휘말려 내적인 상흔이 남은 인물의 출현을 의미한다. 그리고 폐허가 지역성을 가진 공간으로 전환되는 것은 내적인 상흔이 남은 소녀의 상실감과 현재의 우리를 잇는 역할을 한다.
작품 속 화자와 공간이 변하면서 오세경의 작품들은 개인과 불화하는 사회를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오세경의 최근 작품들은 우리의 현재와 심리적으로 먼 화자와 공간을 다루던 예전 작품들에 비해서 더 강렬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러한 강렬함 때문에 최근 오세경의 작품들은 여전히 영하권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영도에 꽤 가까워진 것 같다. 사실 오세경의 2013년도 작품 중에는 하이에나의 약탈적 폭력을 적나라하게 그린 것도 있지만, 이렇게 적나라한 폭력을 그린 장면은 오히려 우리의 현재를 섬세하고 침착하게 응축한 최근의 작품들만큼 강렬하지 않다. 예를 들어, 어둠이 짙게 깔린 해안가에 서 있는 사물함 안에 여학생이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숨바꼭질>과 호수 위에 띄워진 나룻배에서 불타는 우산을 들고 있는 두 여학생을 그린 <짝궁>은 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를 연상케 한다. 그래서 아파트로 둘러싸인 건물 옥상에서 왼손으로 엄지와 소지를 치켜들고 오른손으로 파란색과 노란색이 뒤섞인 연막을 피워내는 여학생을 그린 <하얀나비>나 천체관측용 대형 위성 안테나들 아래 누워서 밤하늘을 바라보는 여학생을 그린 <접속>도 세월호 참사와 연관지어 살펴보게 된다. 물론, 오세경의 최근 작품들을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측면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만으로도 오세경의 최근 작품들은 예전 작품들과 다르게 우리의 현재와 매우 가까워졌다.
생각해보면 세월호 참사는 청소년을 특정 가치로만 규정하고 통제하려는 권위적 체계 때문에 생긴 비극이기도 하다. 만약 세월호에서 목숨을 잃은 청소년들이 침몰 직전에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방송의 권위를 의심하고 배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었다면 결과는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분명 세월호 참사는 청소년들이 체계의 권위와 정당성을 강하게 의심할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2009년 이후로 처음으로 10대 사망자 통계치와 사망 원인 순서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사회의 전 영역이 경제적 가치 확장이라는 단일논리로 봉합되어버린 상황에서 청소년들의 분노가 자신들을 옥죄는 권위적 체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만큼 구체화되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가 청소년들의 내면에 깊은 상흔을 남겼기에 이들의 유보된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다.
오세경의 2013년 이후 작품들을 세월호 참사와 관련지어 해석해 본다면 청소년들에게 내재된 유보된 가능성은 나 <하얀나비>에 등장하는 여학생의 냉정하면서도 도발적인 눈빛에서도 보이는 듯하다. 는 대형국기 앞에서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고 있다는 점에서 마치 권위적 체계의 총합인 국가에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협박하는 것 같다. 안에서 발신자는 여학생이고 수신자는 국가로 볼 수 있다. 한편 <하얀나비> 안에서 발신자는 왼손으로 엄지와 소지를 치켜들고 오른손으로 연막을 피워내는 여학생이지만 수신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얀나비>의 화자인 여학생의 왼손과 오른손이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수신자는 세월호에 갇혀 있던 학생들로 해석해 볼 수도 있겠다. 와 <하얀나비>의 화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론을 달리할 뿐 자신들의 의지를 고요하면서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오세경의 가장 최근작인 <접속>은 땅바닥에 누운 여학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묘연한 상태이기 때문에 와 <하얀나비>의 화자가 보여주던 의지는 <하얀나비>의 엄지, 소지와 동일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대형 위성 안테나들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좌절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접속>은 좌절과 체념의 기운이 앞선 두 작품에 비해서 많이 감도는 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근 오세경의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화자와 공간이 우리의 현재와 근접할 뿐만 아니라 화자의 의지가 비교적 적극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영도에 매우 근접해있다.
지금까지 두 작가의 작품들이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 간단히 살펴봤다. 그렇다면 두 작가의 이번 전시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의의는 무엇이고 이를 위한 방향성은 주제와 태도 중에 무엇이 적합할까. 두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성인병’(成人病)이라는 주제로 자신들의 공통분모를 정의했다. 고혈압·뇌혈관질환·당뇨병·동맥경화·심장질환 등을 포괄하는 성인병은 이미 2009년부터 발병자가 900만여 명에 달했을 정도로 우리 주변에서 매우 흔해진 병이다. 심지어 근래의 성인병은 병명과 다르게 영양 과다섭취나 운동부족인 소아에게까지 발병하기 때문에 발병 인구는 계속 급격히 증가하는 추세다. 두 작가는 이처럼 현대사회에서 보편화된 성인병이 누적된 습관에서 나올 뿐만 아니라 병의 본성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자신들을 묶어주는 연결고리가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실제로 두 작가는 개인과 사회에 누적된 습관으로 말미암은 문제의 가시화를 나름대로 시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개인과 사회를 각자의 방식으로 관망하는 두 작가의 작품 활동은 분명 성인병이라는 주제 안에서 묶일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는 오세경과 박정원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과도 무난하게 교집합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필연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 그래서 필자는 두 작가를 모호하고 상투화된 주제로 억지로 묶어내기보다는 작품 활동에 임하는 태도의 맥락을 고려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두 작가는 작품 활동을 통해서 개인과 사회를 각자의 위치에서 관망한다. 여기서 개인은 작가 자신도 포함된다. 따라서 개인과 사회에 닥친 문제를 관망하는 것은 결국 사회의 부분집합인 작가가 자신을 객관화하려는 과정이기도 하다. 물론, 작가가 자신을 완벽하게 객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이 과정을 통해서 작가는 자신과 사회가 어떤 상황에 부닥쳐있는지를 여러모로 진단을 시도해볼 수 있다. 그러나 작가들의 은유적인 진단과 사회 각 분야에서 시시각각 도출되는 진단이 개인과 사회가 처한 상황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면 결국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냉소만이 남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수한 진단 더미 위에 안주하여 실질적인 행동을 이어나가지 않거나 행동이 있다고 치더라도 결과적으로 실패하는 경우가 절대다수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주목하는 작가들은 이러한 괴리 때문에 냉소에 빠지게 될 수 있다. 한국사회는 87년 체제가 보여준 오작동의 궤적과 진보정치의 의제마저 전유한 보수정치, 맹목적 경제적 자유 추구 같은 문제들 때문에 혼란이 고착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실천을 중시하는 소위 예술행동은 예술가의 선택지에 들어가기 어려우므로 대다수 작가는 개인과 사회를 관망하거나 외면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물질적, 정신적 궁핍과 함께 청춘을 시작한 젊은 작가 중에 냉소가 깊게 각인된 이들은 현실의 뒤편에서 자신을 오타쿠화해 정보의 바다에 누적된 허구의 세계를 소비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최근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목격되는 이러한 경향은 일본의 90년대 오타쿠들이 이야기나 메시지와 거의 관계없이 작품의 배후에 있는 정보만을 담담하게 소비하던 모습과 유사하다. 한편으로 아직 냉소의 세계에 깊게 발을 담그지 않은 작가들은 박정원과 오세경의 경우처럼 개인과 사회를 관망하는 태도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지만, 어떤 유효함도 없이 관성에 못 이긴 공회전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의심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이들 중에는 종종 개인과 사회를 관망하는 것을 단지 인정투쟁의 장에서 생존자로 남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이들도 있다.―물론, 이런 측면은 오타쿠화한 작가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현실과 이상의 괴리와 혼란이 심화된 사회 속에서 작가가 냉소적인 입장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박정원과 오세경의 작품들이 개인과 사회를 외면하지 않고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냉소를 덜어내기 어려운 것이다. 굳이 정도를 따지자면 박정원이 오세경보다 냉소의 정도가 더 강한 편이다. 오세경은 냉소보단 분노와 관련된 감정이 더 많이 드러난다. 그래서 오세경보다는 박정원이 차후에 현실의 뒤편에 선 오타쿠가 될 가능성이 더 크다. 현실을 관망과 외면으로 일관하거나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 작가들에게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불가능하다. 현실을 외면하는 작가들의 냉소를 누구도 탓할 수 없다. 다만 냉소 자체가 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과 실천과 관망이 축적한 내용까지 부정하는 무력한 냉소는 피해야 할 것이다. 냉소가 무력한 냉소가 된다면 그러한 냉소는 자신이 부정하던 행동 없이 진단 더미 위에서 만족하는 이들과 다를 바가 없어질 뿐이니까. 홍태림(독립기획자, 크리틱-칼 발행인)




출처 - 갤러리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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