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토
2001년 12월 14일 ~ 2002년 2월 24일
그리이스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가 남긴 이 경구는 사물을 인식하는 우리의 인간중심적인 태도를 가장 함축적이면서도 극명하게 가리키는 말이다. 인간중심적 사고는 예술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오랜 동안 모든 표현은 주체인 인간 자신의 모습을 통해 이루어져왔다. 특히 3차원 입체라는 특성상 인간의 모습을 가장 실재와 가깝게 재현하는 데 유리했던 조각 장르에서 인체는 가장 우선이 되는 형태였다. 회화가 인물 외에도 풍경과 정물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어온 데 반하여 조각은 인물 조각의 역사가 곧 조각의 역사라 할 만큼 거의 전적으로 인체를 대상으로 해왔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 조각은 역사상 미증유의 변화를 겪게 되며 이 20세기의 조각 속에 나타난 인체는 그만큼 특별한 진화를 경험하게 된다.
20세기 이전까지의 미술이 현실 세계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이었다면, 20세기의 미술은 이 재현기능을 벗어 버리고 그 자체의 순수한 형식 그대로를 표현하는 추상화(抽象化)의 과정을 밟게 된다. 이른바 모더니즘으로 일컬어지는 20세기 미술의 흐름 속에 가장 특기할 만한 조각의 변화가 바로 고전적인 인체 재현으로부터의 이탈이었다. 따라서 기실 20세기 조각의 주된 흐름은 인체라는 주제와는 대립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라는 양식의 변화 속에서도 형태로서의 인체는 많은 조각가들에게 여전히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었고, 표현의 대상으로 사랑받아왔으며, 심지어 추상화된 조각작품에서도 우리는 마치 귀소본능처럼 잔존해 있는 뿌리 깊은 "인간형태"에 대한 집착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모더니즘이 가져다 준 새로운 표현 형식과 재료들은 오히려 조각가들에게 인체를 더욱 다양하게 해석하고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이다.
이번 전시는 구상적인 인체조각에 한정되지 않고 인체의 형상을 유추할 수 있는 추상화된 조각들까지 포괄함으로써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조각 속에 나타난 인간 형상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먼저 이번 전시는 고전주의적 인체표현을 마감하고 현대 조각의 장을 연 인체 표현의 진수인 오귀스트 로댕의 <지옥의 문>과 <깔레의 시민>으로 시작되며, 20세기 초반의 인물 조각을 대표하는 앙트완 부르델과 아리스티드 마이욜의 조각도 함께 전시된다. 그리고, 화가로 잘 알려진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귀한 인물두상과, 호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쟝 아르프 등의 초현실주의자들의 변형된 인체조각, 국내에 잘 알려진 유명한 헨리 무어의 아름다운 모자상 등은 전시 관람에 즐거움을 더할 것이다. 아울러, 2차 대전 이후 인체가 더 이상 구체적인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변화되는 추상 조각 속에 숨겨진 인체형상을 찾아내는 것 또한 이번 전시가 주는 흥미라 할 수 있다.
호암미술관의 소장품과 일부 국내 소장작품들로 이루어진 이번 <현대조각과 인체>전은 국내에서 전시가 드물었던 20세기 외국 조각을 일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불어 변화를 거듭해온 조각 속 인체 형상의 다양한 면모를 감상할 수 있는 의미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

죠지 시걸 - 러시 아워, 1983, 청동
시걸은 뉴욕대학교 미술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작업활동은 30세가 넘어서야 시작하였다. 실제 인물을 석고형으로 떠서 생활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상황을 재현하는 그의 작품은 개인적인 표현을 강조하는 형식주의적인 요소와 주변환경에 영향을 받은 심리적인 면이 동시에 강조되었으며 50년대의 추상표현주의와 60년대의 팝아트의 연결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1983년에 석고원형이 제작된 <러시 아워>는 출근하는 여섯 사람의 군상으로 일상의 무게를 재현한 작품이다. 전통적인 조각이 좌대 위에 놓이는 것과는 달리 이 작품은 실물 크기로 제작되어 바닥에 직접 놓임으로써 현실감을 주며 작가의 주변인을 모델로 하여 사실감이 강조되었다. 한편, 표면의 풍부한 질감은 마치 추상표현주의 계열의 회화작품처럼 표현되어 있다. 한 발을 내딛고 걷는 사람의 모습은 고대 이집트 미술 이래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인물상의 자세로, 미술사에 나타나는 전통적인 형태에 대한 시걸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알베르토 쟈코메티 - 거대한 여인3, 1960
스위스 미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자코메티는 1922년부터 파리에서 활동하였고, 1945년부터 수직으로 긴 선적인 인물조각에 몰두하게 된다. 특히 1948년 뉴욕에서의 개인전 평문에서 그의 친구였던 샤르트르(Jean-Paul Sartre)의 실존주의적 해석에 힘입어 쟈코메티의 선적 인물조각 작품들은 전후 피폐한 인간조건을 극단적으로 드러내 실존주의 조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거대한 여인 Ⅲ>에서 커다란 발을 뚫고 올라온 듯한 거대한 수직의 인물상은 거의 뼈대만 남을 정도로 부피가 축소되어 있는데, 이는 쟈코메티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형태에 가까운 인물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감축해 나간 결과이다. 따라서 그의 인물상은 불륨을 통한 인체 그 자체보다는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표현이 강조된다. 또한 인체 각 부분의 세부 묘사를 생략하여 부분이 아닌 전체로서 보이게 하였으며, 표면에 보이는 굵은 터치의 흔적들은 매우 표현적이다. 극도로 응축된 인물상은 좌대의 역할을 하는 거대한 발 위에 정면으로 고정되어 있어 적막감과 고독함, 나아가 엄숙한 분위기를 창출하고 있다.

앙트완느 부르델 -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 1910(1917 주조), 청동
로댕, 마이욜(Aristide Maillol)과 함께 20세기 초 서양 근대 조각의 거장으로 꼽히는 프랑스의 조각가 부르델은 주로 건축물과 관련된 조각과 기념 조각으로 유명하다. 고딕적인 고전주의라고 불리는 그의 작품들은 전통적인 고전주의와는 구별되는데 소재는 절대적인 미를 추구한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영감을 얻었으나 활기찬 구조와 긴장감, 평면성이 돋보인다. <활쏘는 헤라클레스>는 1910년 살롱 도톤느에 출품되어 그의 작품 중에 최초로 유명해진 작품이며 동시에 작가의 작품 세계를 대표한다. 고대 그리스 신화의 인물인 헤라클레스는 괴력을 지닌 전사로 이 작품에서는 전설의 스팀팔리온 새를 겨누어 활을 당기는 긴장된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강조된 근육의 긴장감은 넓게 벌린 양 다리와 활을 당기는 쭉 뻗은 팔의 움직임으로 표현되고, 허공으로 향하는 활과 머리의 방향은 강렬한 입체감과 확장된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데이비드 스미스 - 세개의 원과 판들, 1959
미국 추상조각의 거장 스미스는 오하이오대학교(1924-25)와 노틀담대학교(1925), 뉴욕의 아트 스튜던트 리그(1927-32)에서 미술교육을 받았다.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반영된 그의 철조각은 소재 면에서 미국의 20세기 산업기술을 상징한다. 용접기법이 특징적인 그의 철조각은 전체성에 속박되지 않는 자율적인 부분들과 회화적인 표면처리로 널리 알려졌다. 초기의 직설적이고 이념적이었던 그의 작업은 1950년경 <탱크 토템(Tank Totem)>등에서 일상에서 발견한 오브제를 아쌍블라주한 작품으로 변모하였고 작품의 대형화 및 연작화가 두드러졌다. 1960년경에는 작품이 대형화되면서 추상화 경향이 심화되었고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가 강조되는 <지그(Zig)>, <큐바이(Cubi)>연작이 제작되었다. <세 개의 원과 판들>은 선적으로 열린 구성을 특징으로 하며 두드러진 수직성으로 인해 다분히 인체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다양한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아쌍블라주 기법은 이후 카로(Authony Caro)에게로 이어지는 추상조각의 전형이 된다. 불규칙하게 갈아낸 조각의 표면은 표현적인 효과를 내며 반사된 밝은 빛은 철조각의 무거운 중량감을 감소시킨다.

장 아르프 - 날개가 있는 존재, 1961
1954년 68세에 베니스비엔날레의 조각부문에서 수상하면서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던 아르프는 화가이자 조각가이며 시인이기도 하였다. 아르프는 1930년대부터 부드러운 곡선과 난형(卵形)으로 특징되는 유기적 추상 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형태의 조각은 말기까지 지속된다. 그는 예술을 유기체적인 성장의 결정체로 보았으며 추상적 형태가 자연의 본질이며 실재하는 형태를 가장 사실적으로 반영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의 형상을 본질적, 보편적인 추상적 형태로 환원함으로써 예술이 범우주적인 가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이러한 조각을 '구현체(concretion)'라 불렸다. 인체를 추상적인 형태로 상징하고 있는 <날개가 있는 존재>는 부드러우며 상승하는 듯한 유기적 형태로 인해 마치 대리석이 예술가의 손에 의해 성장한 생명체인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 무제, 연대미상
짧은 생애동안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펼쳐 보인 모딜리아니는 유태계 이탈리아 가정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정규교육을 받고 1906년 파리로 왔다. 그는 배경에서 도드라진 조각적 부조의 방식에 표현적인 윤곽선으로 초상과 누드를 주로 그렸는데 그의 초상화나 누드화에서 유연하게 흐르는 선, 우아함 등을 보면 보티첼리나 16세기 피렌체의 매너리즘 미술을 연상하게 되며, 이는 그가 몸에 밴 이탈리아의 전통을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라임스톤을 주재료로 실험적 성격의 조각 작품을 남긴 모딜리아니는 그리스 고졸기의 쿠로이(Kouroi)상과 선적으로 길게 늘어져 얼굴이 강조된 아프리카 조각에까지 원시조각에 폭넓은 관심을 보였으며 특히 브랑쿠지의 작품을 보고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의 청동 두상 <무제>는 엄격하게 단순화된 형태로 길게 왜곡되었고, 날카로운 코의 선과 길고 가는 눈, 조그만 입을 지녔는데 묘한 정적과 세련된 우아미를 느끼게 한다. 이 두상이 지닌 정면성과 부동성은 아프리카와 이집트의 신비가 결합되어 불가사의하고 기념비적인 장엄함을 간직하고 있다.
출처 : 로댕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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