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플레이리스트
2024년 11월 23일 ~ 2024년 12월 28일
1 / 4
낯선 여행지에서의 하루가 마치 이틀처럼 길게 느껴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는 단지 기분 탓이 아니라 우리의 뇌가 새롭고 새로운 환경을 접할 때 더 많은 자극과 정보를 세밀히 처리하기 때문이라고 심리학은 설명한다. 일상 속에서 익숙한 정보들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지만, 여행지의 새로운 자극은 뇌에 깊이 각인되며,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물리학적 관점에서도 시공간은 상대적인 형태로 존재한다. 상대성 이론은 블랙홀 근처에서 중력의 영향을 받은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사실과, 웜홀과 같은 특정 조건에서 시공간이 휘어질 수 있음을 이미 오래전에 증명 했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은 우리에게 고정된 틀로 존재하는 듯하지만, 이는 상대적이고 확장하고 변형되는 새로운 차원의 것을 가지고 있다.
이번 전시 《Curved Spacetime: 휘어진 시공》에서는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을 시각 예술을 통해 탐구하고자 한다. 기민정, 박예림, 양자주 세 작가의 작업을 통해 시공간은 단순히 물리적인 흐름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에 새겨진 기억과 감정의 층위에서 상대적으로 작용하여 우리의 감각을 일깨우고, 특정한 시간과 공간, 또는 어떤 존재에서부터 확장되는 경험을 선사하고자 한다.
기민정 작가는 종이와 유리라는 이질적 재료를 통해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탐구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움직임과 감각의 층위를 시각화한다. 그는 각 재료가 지닌 물성을 최대한 존중하고 순간의 감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문학, 영화, 일상의 대화에서 얻은 영감은 작품 속에서 여운과 성찰로 이어지며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붙잡고 그 감각을 그대로 작품에 녹여내며, 관람객에게 찰나의 시간과 공간 속 감각을 전달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유리와 종이, 얼음의 흔적을 매개로 그가 바라보는 시간의 결을 담아낸다. 유리 속에 남겨진 종이는 작업 중 만들어진 부산물로, 종이와 물감의 남은 자취들이 얼음으로 얼어 녹아내리며 남긴 흔적들이 작품 속에 새겨져 있다. 이 흔적들은 회화의 잔여이자 기록으로서, 작가가 놓치고 싶지 않은 작은 순간들에 대한 실천적 관심을 보여준다. 빛과 공기, 그리고 창밖의 나약한 존재들이 남기는 미묘한 흔적에 대한 다정한 시선이 이 작품에 담겨 있다.
작가는 종이 작업이 자신의 목소리에 더욱 가깝다고 말한다. 이는 그가 소설 파도의 한 구절을 반복해 들으며 붓질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해가 뜨고 지는 하루의 반복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독백으로 이어지는 이 소설의 바닷가 묘사는 작업 속 이미지와 색 변화의 영감을 주었고, 자연 속에서 하늘을 관찰하며 그 색을 담아내고자 한 시도가 작품 속에 스며들어 있다. 환영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들은 관람자 개인의 해석에 맡겨지며, 작가는 이 과정을 통해 관람자가 자연의 변화와 그 속에 깃든 시간의 흐름을 경험하도록 한다.
기민정 작가의 작업은 일종의 기록이자, 일상의 잔잔한 순간들에 대한 다정한 헌사와도 같다.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소설 구절을 배경으로 감정의 결을 한 붓 한 붓에 담아내고, 남겨진 종이와 물감의 흔적을 얼려 또 하나의 작품으로 재현한다. 이러한 실험적 여정을 통해 기민정은 재료가 스스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도록 맡겨두며, 관람자가 그 속에서 자연의 흐름과 시간의 무게를 조용히 느낄 수 있도록 한다. 그의 작품은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일상의 흔적과 시간의 결을 따라가며 그 속에 깃든 감각을 더듬어가는 깊은 사유의 공간과 맞닿아 있다.
박예림 작가는 모래와 먹의 획을 통해 자연의 원초적 리듬과 깊이를 그려낸다. 작가는 모래가 가진 고유한 성질을 깊이 탐구하여 독특한 표면과 질감을 만들어내며, 그 과정 속에서 자연의 숨결을 포착하려 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모래와 획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리듬과 움직임이 핵심적인 요소로, 고요함 속에서도 끊임없이 일렁이는 파도와 단단한 대지가 주는 격렬함이 한 화면에서 조화롭게 공존하며 관람자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작업의 진행 과정에서 그는 모래를 반복적으로 붙이고 털어내는 과정을 거쳐 두껍고 얇은 층을 형성하며 대지의 형태를 완성해간다. 그는 화선지에 찍은 획을 장지 위에 배접하고, 그 위에 모래를 부착한 후 사포로 갈아내는 방식을 통해 균일한 표면을 완성한다. 이후 흐릿해진 획의 형상을 다시 선명하게 덧그려내어 새로운 바탕 위에 자연의 깊이와 무게감을 더해가는 이 과정은 작품에 중첩된 시간의 흔적을 남긴다.
박예림 작가는 파도의 움직임 속에서 산의 능선을, 산을 바라볼 때는 파도의 율동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그는 겹겹이 쌓인 모래 속에 바닷바람과 파도의 리듬을 담아내고, 가까이서 보면 얇고 두꺼운 층들이 시간이 남긴 흔적과 대지의 형태를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색채 작업에서는 제주도의 푸른 바다와 짙은 바위, 물길이 만들어내는 원초적 움직임이 고요히 담겨 있다. 화면 속 파도는 형체를 이루며 다가왔다가도, 먹의 번짐 속에서 연기와 안개처럼 퍼지며 사라진다. 물결이 피어오르고 스러지는 순간, 관람자는 마치 제주의 바닷가에 서서 파도의 숨결에 닿은 듯한 감각을 느낄 수 있으며, 물길의 흐름은 끊어진 시공을 이어주고 그 속에 남은 자연의 잔상은 관람자의 내면에 서서히 스며들어 파도의 잔잔한 리듬을 전한다.
양자주 작가는 도시 환경과 그 속에서 사라지고 변화하는 장소의 기억을 작품 속에 담아낸다. 수집한 오브제와 흙, 벽의 자취 등 다양한 재료를 통해 공공 공간과 개인적 기억이 얽힌 이야기를 탐구하며, 그 과정에서 도시와 인간,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하는 실험적인 작업을 선보인다. 그의 작품에서는 시멘트, 실리콘, 에폭시 같은 건축 재료와 현장에서 채집한 흙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회화와 설치, 공공예술의 경계를 넘어 도시와 자연이 만나고 갈라지는 지점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양자주 작가는 이러한 재료들이 가진 고유의 물성을 탐구하고, 그 안에 담긴 시간의 흔적을 통해 도시와 자연이 남긴 흔적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이번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의 작업 과정에서 작가는 경상북도 영덕의 오래된 초가집 흙벽과 레지던시 공간인 관악산 주변의 흙을 재료로 삼아 자연의 시간을 화폭에 담아내었다. 흙에 분채를 섞어 색을 만들어내고, 아교를 더해 묽게 만든 흙물을 손으로 캔버스에 비비고 문지르며 그려내는 이 작업은, 붓을 사용하지 않고 오롯이 손의 촉각과 물성에 의존하여 완성된다. 매우 옅은 흙물이 여러 번 겹쳐지며 레이어가 쌓이고, 그렇게 드러난 색은 마치 천 속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듯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어낸다. 캔버스에 흙물을 밀어 넣고 긁어내는 과정을 통해 양자주는 전통적인 마띠에르와는 다른 방식으로 재료와의 상호작용을 이어간다.
그는 캔버스를 문지르는 손끝의 진동과 흙이 긁히는 소리에 집중하며, 재료가 가진 촉감을 더욱 깊이 느끼고자 때로는 눈을 감은 채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데 이로 인해 작품은 캔버스와 작가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유기적 관계 속에서 완성되며, 단순한 재료를 넘어 감각과 시간, 자연의 본질을 담아내려는 그의 탐구를 그대로 보여준다. 도시와 자연, 인간의 흔적을 캔버스 위에 조용히 쌓아 올리며 관람자로 하여금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의미를 사유하도록 이끈다. 흙의 결과 층위는 도시와 자연이 만나는 순간을 포착하고 그 안에 얽힌 진동과 흔적은 단순히 물질적인 표면을 넘어, 그 어떤 장소와 시간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기민정, 박예림, 양자주 세 작가는 각기 다른 매체와 재료를 사용하지만, 모두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재료의 물성에 깊이 몰두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에게 재료는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라,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끊임없이 실험하고 완성해가는 과정 그 자체이다. 이들은 반복되는 시도와 실패의 여정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재료가
지닌 잠재력을 탐구하고 끌어내는 데 집중한다. 이러한 탐색의 흔적은 작품 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관람자가 그들이 쌓아온 시간과 감각의 결 속으로 조용히 발을 들이게 한다.
작품 앞에 선 우리는 세 작가가 지나온 흔적을 더듬어가며, 그들이 선택한 흙, 종이, 유리, 먹 등이 각자의 언어로 변주되어 쌓인 층위를 마주한다. 이 속에서 엮인 감각들은 마치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듯 관람자의 내면에 잔잔히 파고든다. 작가들이 대담하게 펼쳐 보인 실험의 순간과 그들이 쌓아 올린 시간의 결을 경험하며, 그들이 선택한 재료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우리의 기억과 감각이 뒤엉키는 깊고 확장된 공간 속으로 들어선다. 이 공간은 마치 잊고 있던 감각들이 부유하는 곳으로, 우리를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끈다.
글 우지영
참여 작가: 기민정, 박예림, 양자주
전시 주최: 갤러리 플레이리스트
전시 서문: 우지영
전시 전경 촬영: 위은총
* 아트바바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운영시간
월요일 휴관
화요일 휴관
수요일 11:00 - 18:00
목요일 11:00 - 18:00
금요일 11:00 - 18:00
토요일 11:00 - 18:00
일요일 휴관
휴관: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모든 프로그램은 주최측의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