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슬
2026년 9월 1일 ~ 2026년 10월 17일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이미지와 정보, 사물과 사건이 쉼 없이 생산되고 범람하는 환경 속에 살고 있다. 새로운 것은 끊임없이 출현하지만, 대부분은 충분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채 소비되고 망각된다. 이처럼 출현이 과잉된 시대일수록, 무엇이 어떻게 우리의 감각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가를 되묻는 일은 더욱 중요해진다.
Modes of Emergence는 서로 다른 물질과 행위, 시간과 환경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형상과 관계가 출현하는 조건에 주목한다. 여기서 출현은 완성된 형태가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이 아니라, 반복과 축적, 생성과 변형, 제약과 조율이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서서히 형성되는 상태에 가깝다. 이환희, 최리아, 최선아의 작업에서 형상은 미리 정해진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세 작가는 과거의 행위를 복기하며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축적된 요소들을 다시 호출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새로운 관계를 구성한다.
이환희는 회화를 그려나가는 과정을 게임처럼 다룬다. 작가는 스스로 부과한 프로토콜에 따라 회화의 가능성을 시험하며, 이전 작업에서 만들어진 형상들을 불러오되 크기, 위치, 밀도, 움직임 등을 변주해 새로운 상황 속에 배치한다. 그의 회화는 유화, 연필, 색연필로 구현된 색채와 조형적 요소를 공유하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모티프를 작업과 작업 사이를 잇는 매개로 삼는다. 이때 반복은 동일한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형상에 차이를 더해 다른 상태로 파생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작가가 동일한 연도에 그린 Shabu-Shabu-Shabu, Goon, Rappel (2023)에는 기념비를 연상시키는 건축적 구조와 도면적 기호가 연이어 나타난다. 캔버스 안에서 직선과 곡선, 수평과 수직, 비어 있는 공간과 이를 둘러싼 구조는 지속적으로 재배열된다. 익숙한 건축적 기호들은 덧그리기와 지우기, 중첩과 분절을 거치며 구체적인 대상을 벗어나, 경계를 형성하는 동시에 그 안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가변적 구조로 변모한다.
이처럼 정해진 프로토콜 안에서 형상을 이동시키고 변주하는 방식은 작품의 제목을 짓는 과정에서도 이어진다. 작가에게 제목은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내용을 설명하는 장치가 아니라, 형태에 어울리는 소리와 리듬을 찾는 또 하나의 게임이다. 작가는 소리와 발음, 리듬에서 비롯되는 감각과 어감을 따라 단어를 수집하고, 완성된 작품에 그중 하나를 대응시키기도 하며, 때로는 먼저 정해진 이름을 출발점으로 삼아 작업을 전개하기도 한다. 따라서 제목은 또 하나의 형상과 함께 작품을 이루는 하나의 형식이자 선택지이다. 형상과 언어를 특정한 의미에 귀속시키기보다 각각의 감각과 선택에 열어두는 이러한 태도는, 회화를 고정된 결과가 아니라 끊임없이 갱신되는 과정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작업 방식과 맞닿아 있다.
최리아는 물질과 공간, 신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힘을 통해 구조가 성립하는 방식을 살핀다. 종이로 만든 조각들을 공간의 조건과 신체의 움직임을 고려해 면밀하게 배치하며, 물질과 구조, 신체 사이에 새로운 긴장을 형성한다. 작가는 종이라는 연약한 재료에 광택을 수차례 덧입혀 표면의 질감과 강도를 높이고, 이를 자르고, 찢고, 감고, 연결하며 서로의 힘을 지지하는 구조로 전환한다. 은은한 은색빛을 띠는 조각들은 덩어리처럼 모인 형태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는 구조, 느슨하게 처진 상태 사이를 오가며, 마치 굳어가는 중이거나 아직 형태를 완전히 결정하지 않은 듯한 임계적이고 유동적인 상태를 드러낸다. 이러한 물질적 실험은 익숙한 사물의 외형을 다른 상태로 이행시키는 방식으로도 이어진다.
녹는 베개 (2026)는 작가가 잠이 드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며 만든 작업이다. 베개의 형태를 닮은 조각은 포근한 사물의 외형을 간직하면서도 바닥에서 떠 있는 듯한 형태로 놓여, 익숙한 사물의 이미지와 빛나는 표면이 만들어내는 낯선 감각을 드러낸다. 고정된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중력에 의해 천천히 흘러내리는 듯한 모습은 재료를 다루는 행위를 통해 조형적 가능성의 경계를 넓혀 가는 작가의 태도를 보여준다. 물구나무 (2026)는 신체의 축에 대한 사유에서 출발한다. 축은 사물의 위치와 방향, 움직임을 가늠하게 하는 기준이지만, 물구나무는 익숙한 위와 아래의 질서를 뒤집는 행위다. 종이와 클레이를 혼합해 금속관의 표면을 덮어 만든 구조물은 수직과 기울기를 오가며 서로 기대고 교차한 채, 다소 위태롭게 균형을 이룬다. 이러한 불안정한 균형은 형태를 고정된 상태가 아닌 지속적으로 조정되는 상태로 바라보게 한다. 최리아는 이처럼 재료의 물성과 힘의 관계를 조율하며, 형상이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과 그 조건이 흔들리는 순간을 실험한다.
반면 최선아는 물질과 대면하는 시간을 쌓으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판단과 선택을 따라 작업을 만들어 간다. 작가는 물질의 성질을 세심하게 살피고, 이에 반응해 자신의 행위를 조절한다. 특히 그의 작업은 날씨와 주변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물질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예측할 수 없는 변화에 따라 형태를 조정해 나간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미리 정해진 형태를 구현하는 과정이라기보다, 물질의 반응과 자신의 감각을 주고받으며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형태를 열어두는 일에 가깝다.
Air Con (2026)은 작가가 여름날 시원한 공기를 품은 실내에 들어설 때 경험한 감각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건물 내부 전체를 하나의 커다란 조각으로 바라보며, 에어컨이 작동하는 장소를 내부의 공간으로 상정하고, 전시장 창 안쪽에 날카롭게 절단한 판유리를 겹쳐 놓는다. 투명한 유리가 겹겹이 포개지며 미세하게 드러나는 초록빛은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과 그 흐름이 교차하는 지점을 암시한다. 이때 작품은 특정한 형상을 제시하기보다 빛과 온도, 안과 밖의 감각을 환기하며 공간 자체를 감각하게 한다. 이처럼 최선아는 물질을 통해 환경을 재현하기보다 주변의 조건을 작업 안으로 끌어들이고,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형태가 감각되는 방식을 조율한다. Sculpey (2026)에서는 이러한 관계가 빛과 그림자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손으로 눌러 형태를 만들 수 있는 소조 재료인 스컬피를 얇게 펼쳐 유리 표면에 붙인다. 자연광이 유리를 투과하는 낮과 실내 조명이 새어 나오는 밤, 작업은 빛의 방향과 강도에 따라 서로 다른 표면과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같은 물질과 구조로 이루어진 작업이 시간과 빛의 변화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감각되는 것이다.
세 작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형상의 다음 국면을 열어 간다. 이환희는 규칙과 변주를 통해 기존의 요소를 새롭게 조합하고, 최리아는 힘과 균형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구조의 가변성을 드러내며, 최선아는 물질과 환경에 반응하며 형태의 경계를 조정한다. 이들의 작업에서 하나의 선택은 또 다른 선택을 불러오고, 이미 주어진 조건은 다음의 변화 속에서 다시 달라진다. 그렇게 작품은 미리 정해진 결과를 향해 나아가기보다, 물질과 행위, 공간과 감각이 서로 밀고 당기는 사이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Modes of Emergence는 바로 그 움직임,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이 잠시 형태를 얻고 다시 다른 상태로 열리는 순간을 바라본다.
참여작가: 이환희, 최리아, 최선아
출처: 휘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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