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은 말 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은 어찌 보면 바보 같은 질문처럼 여겨진다. 이미 문학, 시, 노래 등으로 대표되는 언어문화 속에서 창작자가 사물과 대화하는 표현 방식을 종종 보여줬기 때문이다. 꽃의 노래, 바람의 속삭임 같은 상투적 문구가 낯설지 않듯이 우리는 사물과의 대화를 일종의 은유법, 의인법으로 인식하는 것에 이미 익숙하다. 이처럼 사물이나 추상적인 존재에 대한 교감 또는 존재론적 인식을 다룬 시도는 이미 적잖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의 제목인 Whispering Forest에서 속삭임이라는 행위의 발화자가 인간이 아닌 사물이라는 점에 ‘새삼’ 주목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존재는 의인화의 작동방식처럼 사람으로부터 부여 받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이미 존재하는 속성이기 때문이다.
두 작가의 진술은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언어철학 이론에서 주장하는 바에 근접해있다. 벤야민은 언어를 네 가지 층위로 구분하는데 사물을 창조하고 이름을 통해 인식하는 ‘창조적 언어’(“빛이 있으라”-창1:3), 이름을 부여하며 순수한 인식의 단계에 도달하는 ‘아담의 언어’(“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2:19), 현실의 인간들이 사용하는 ‘판단의 언어’, 그리고 말하기를 멈춰버린 ‘사물의 언어’이다. ‘판단의 언어’는 인간이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남과 동시에 상실한 ‘아담의 언어’의 대체이자 흉내내기인데, 이 언어는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것의 주위를 맴돈다고 설명한다. 비로소 인간은 개별 존재들의 고유성을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을 읽고 사물을 개념으로 인식한다. 본질을 부정당한 자연은 이제 들을 수 없는 사물의 언어로 침묵한다고 말한다.
강석현, 양태오 작가는 침묵하는 사물들에게 ‘말 걸기’를 시도하며 우리가 잃어버린 존재들의 가치에 다시금 주목하게 만든다. 또한 ‘말 걸기’ 행위는 작가들이 기존에 이어오던 도자기, 회화, 조각작업과 융합되면서 마주치는 존재들의 고유성에 대한 독특한 작가적 견해를 수반한다. 이런 행위는 인류가 잃어버린 어떤 신(神)적 속성에 다가서려는 일종의 닮기(되기)라고 볼 수 있으며 창조적 예술활동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시도들은 현실언어로 소통하고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종종 낯설고 무가치한 행위로 비춰지기도 한다.
Eddie Kang, In the woods, 97x97cm, acrylic on canvas, 2015
Eddie Kang, Reflection, 정사각형, iMixed Media on Canvas, 38 x 38cm, 2015
Teo Yang, Untitled, iceramic, crystal, 71x16x16cm, 2015
Teo Yang, Untitled, iceramic, crystal, 23x19x15cm, 2015
출처 - 갤러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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