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앤제이플러스원
2018년 1월 18일 ~ 2018년 2월 14일
볼 수 없는 전시. 이미지 없는 미술. 그 성립 불가능한 장면을 상상해본다. 어느 순간 들이닥친 볼 수 없는 전시에 대한 열망, 아마 그곳엔 현재에 대한 훌륭치 못한 불만과 의심이 깔려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 미술과 전시가 당연하다는 듯 차지하고 있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소음에 대한 불만일지도, 어쩌면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오늘이라는 환영에 던지는 의심일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곳에 세워진, 오늘의 책망으로부터 시작된 상념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전시가 바라는 것은 볼 수 없음 혹은 이미지 없음의 상태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다. 그 상태의 획득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 그 상태는 미술의 오랜 공식의 동어반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는 상태가 아닌, 그것의 열망이 만들어내는 미술의 이야기와 이미지에 함몰되지 않는 실재의 만남을 기대한다. 즉, 볼 수 없음을 보여준다는 모순적 설정을 통해 전시가 얻고자 하는 것은 가시적 비가시성이라는 관념보다, 그것으로부터 감지 가능한 보이지 않는 미술의 행위인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이미지, 이미지의 이면을 상상하는 전시는 그렇게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에 첫 번째가 아닌 두 번째의 감각에 집중한다. 이는 위계나 계층의 조직과 무관한 것으로 첫 번째를 상상하게 하는 두 번째와 첫 번째의 뒷모습으로서의 두 번째를 말한다. 두 번째 없이 존재 불가능한 첫 번째를, 그것의 앞과 뒤를 상징한다.
다음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강동주는 시간과 장소의 감각을 이미지에 축적한다. 작가는 뉴욕 거주 당시 창밖에 보이는 밤 풍경을 여러 날 동안 반복적으로 드로잉하였는데, ‹커튼 curtain›연작은 그 일련의 드로잉을 목판 인쇄로 옮긴 것이다. 이전 작업이 서울을 이동하며 기록한 영상을 드로잉과 먹지로 옮긴 것이라면, 이번 작업은 움직이지 않는 장소의 풍경과 그것의 변화를 이미지화한다. 이전 작업보다 두터워진 장소와 시간의 관계처럼, 도시라는 열차에 실린 방의 무게처럼 이미지의 조건은 먹지에서 목판으로 변경된다. 각각의 드로잉은 목판을 갈아내고 잉크를 발라 종이에 찍는 과정을 거쳐 다른 이미지로 옮겨지는데, 이 과정를 거친 이미지에는 일종의 추상성이 흐른다. 하지만 어두운 밤이 납작한 시공간이 아니듯, 시간과 장소 그리고 작가의 신체가 동작하며 만들어진 흔적에는 그때 그곳의 감각이 그리고 그 안의 신체가 찍혀있다. 개념적으로 공유한 시간과 장소가 아니라 작가가 분명히 보낸 시간과 장소의 감각이, 그리고 수행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작업의 과정이 동시대 미술에서 폐기된 듯한 실재와 정확성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렇게 실재를 수반하는 추상은 앞모습에 집착하던 이미지의 뒷모습을 드러낸다. 가면을 썼지만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는, 가면이 곧 얼굴인 이미지는 실재의 모임으로서 존재한다. 세상 속에 있지만 그것의 설명도 해석도 아닌 이미지 그 자체로, 자칫하면 흘려버릴 수 있는 실재의 파편으로서 말이다. 구상과 추상, 빛과 어둠의 접점에 위치하며 내밀한 발화를 시도하는 작업은 이미지 안과 밖의 존재를 운반하는 경로로서 스스로를 결여하고 다시 의욕하는 끝없는 과정을 반복한다.
유리, 냉장고, 에어컨. 최고은은 거울의 뒷면, 반으로 썰린 냉장고, 해체된 에어컨 등을 토르소처럼, 미술 오브제처럼 전시장에 틈입시킨다. 주변 사물에 내재된 감각을 조각적으로 환원하며 오늘을 휘감고 있는 유령 같은 물성과 조각의 속성을 동시에 들춰내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전시장 안에 에어컨의 표면을 절단해 펼쳐 놓는다. 항상 우리 시선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특징 없이 단정하게 서 있는, 모든 사물의 질감을 앗아간 그 표면은 마치 도시의 욕망을 대변하다 이제는 움츠려든 듯 전시장에 정박된다. 어디에나있고 항상 새것 같은 그래서 잘 알고 있는 낡은 물질, 그것의 감각으로 점철된 공간은 현실의 마취로 지워진 사물의 표면을 감각적으로 마주하게 한다. 영문도 모르고 초대된 그 질료의 공간은 무절제와 과잉 생산의 시대 어딘가에 잠복해 있을, 같은 물건의 다른 감각을 탐색하는 예민한 시감각을 요구한다. 작가는 레드메이드를 전시장에 펼쳐 놓는 것과 동시에 직접 제작한 물질을 하나의 상징체로 호명해낸다. 흰 벽에 걸린 투명한 유리 진열장은 작업을 관통하는 가치를 의미심장하게 드러내는데, 투명함은 물질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며 둔탁해진 감성의 회복을 시도하는 작업의 의미를 전달한다. 제작된 것이든 혹은 레디메이드를 활용한 것이든, 작업은 작가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물질의 조건과 속성을 신뢰하며, 사물에 대한 낙관도 비관도 아닌 물성의 유희적 탐구에 몰두하며 진행된다. 맥락과 내러티브 뒤로 밀린, 때론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사물의 물성 그 자체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점이 작업을 오늘 물질의 자료실이자 성애학으로 인지하게 한다.
다시. 볼 수 없는 전시. 이미지 없는 미술. 그 불가능한 장면의 상상은 미술의 오랜 모순으로 추락해버리곤 한다. 그리고 그 모순은 다시 아이러니와 만난다. 하지만 난 모순과 아이러니로 감싸서라도 그 상상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활기차고 건방진, 퉁명스럽고 위태로운 때로는 짜증 섞인 아이러니를 응원했다. 강동주와 최고은의 작업에서, 이미지의 뒷모습이 이미지로 사물의 물성이 조각으로 스미는 바로 그 지점에서 볼 수 없는 전시라는 몹쓸 열망을 떠올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들의 작업은 그 열망이 모순과 아이러니에 눌려 가보지 못한 그곳을 가리키고 있다. 건조하고 투명한 사물의 표면이,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어두운 흔적이 주변 박자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머뭇머뭇 끊어질듯 하지만 꾸준하게 오늘과 연결된다는 걸 알아챌 때 건조함은 우아함으로, 흔적은 실재의 한 부분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이들 작업이 실행하고 있는 불화를, 바닥날 것 같지 않은 태도를 지지하게 한다. 모순과 아이러니에 함몰되지 않는 관념 넘어의 행위와 실험이 설정되어 있기에 난 상상의 장면을 말할 수 있다. 이들의 작업은 불가능한 열망이 시시한 냉소주의나 허무주의로 흐르지 않는 장면을 목격하게 한다. / 권혁규
오프닝 리셉션: 2018년 1월 18일 오후 5시
전시 기획: 권혁규 Hyukgue Kwon
디자인: 유명상 Myungsang Yu
출처: 원앤제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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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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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휴관
휴관: 월요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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