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봄
2020년 1월 22일 ~ 2020년 2월 8일
모임과 읽기
새해가 시작된다. 나무들이 버려진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위해 사용된 트리들이 쓰레기 곁에, 쓰레기처럼, 쓰레기로 놓인다. 바닥에 드러누운 나무들은 언뜻 시체나 무덤을 연상시킨다. 물론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다만 버려지며 죽어가는 과정에 처하게 됐다. 버려져 있음을 목격한 이들 중 일부가 간혹 그것들을 주목한다.
미술가로 살아가는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버려진 것들을 거두어 돌보려 한다. 그 과정은 의외로 쉽지 않다. 친구의 커뮤니티 가든에, 자신의 집 앞 작은 공간에 임시로 옮겨 졌던 나무들은 덩치가 커지면서 점차 갈 곳을 잃는다. 그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사건의 일지를 기록한다. 그리고 나름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 후에, 기록을 재구성하고, 책으로 묶고, 전시를 열고, 전시장에 모인 이들과 함께 읽어 나눈다. 이것은 반복된다.
어느날 로테르담의 작은 바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그는, 바에 비정기적으로 들러 빈 컵을 수거했던 노인의 죽음에 대해 듣고,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노인은 홀로 죽었다. 어떤 지역지 기사는 이 노인과 같은 건물에 거주했던 다른 노인이 혼자 지내다 죽은 지 10년이 지나 발견된 일이 있고, 이 지난 죽음에 관해 이번에 죽은 노인이 인터뷰를 한 적이 있음을 증언한다. 그는 집 근처 공공 묘지를 찾았다가 네덜란드의 고독사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 가는 사건의 일지를 기록하고, 재구성하고, 책으로 엮고, 전시를 열고, 전시장에 모인 이들과 함께 읽어 나눈다.
그는 테이블 램프를 구입하기 위해 빈티지 숍에 들른다. 1970년대 네덜란드의 인기 소다 제품이었던 유리병을 보다 제조사가 루머에 연루되어 파업하게 된 경위를 듣는다. 그는 이곳을 여러 차례 방문하는데 이야기는 어째서인지 점차 빈티지 숍 주인의 ‘대안적 삶’에 관한 고민으로 흐른다. 그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과정을 (...) 나눈다.
그는 작은 이야기를 만든다. 우리가 살면서 무의식적으로 지나치거나 때로 의식적으로 흘려보낸 것들에서 작은 실마리를 발견한다. 이것은 마치 바늘구멍 카메라를 통해 관찰한 세계의 이상한 단면 같다. 그는 미술가이면서 약간은 탐정인 셈인데, 대개의 탐정소설과 달리 이 작은 이야기들은 결말이 열려 있다.
그가 구한 크리스마스 트리들은 일부가 살아남았지만 정착할 곳을 찾지 못했다. 그는 살아남은 나무들을 위해 인근 섬을 불법 점유한다. 구글 맵을 캡처한 이미지가 그곳에 옮겨 심긴 나무들에 관한 유일한 보증이다. 혼자 지내다 죽은 사람들을 조사하던 그는 시청에서 이들에게 묘비를 대여해 주되 이름을 새겨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익명의 묘비들이 거리의 보도블록과 무엇이 다른지 고민한다. 묘지에서 일하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발걸음은 그즈음 멈춘다. 그가 빈티지 숍 주인과 나눈 두서없는 이야기는 자본주의와 삶의 윤리를 통찰할 것처럼 만연하게 늘어지다, 상품 판매자와 상품 소비자의 엉성한 관계 만큼이나 엉성한 수다의 기록으로 남았다.
자유도 높은 RPG 게임을 보는 듯한 그의 리서치에 유일한 규율이 있다면 이야기를 작게 유지한다는 점일 테다. 그는 시민으로서의 삶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미술가로서 발전시키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러 그것이 더 이상 작은 문제에 그치지 않음을 직감하면 그것을 열린/작은 이야기로 마감한다. 작은 것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움직인다. 작은 것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반복된다. 상대적으로 쉽게 재생산되거나 쉽게 흩어져 공유된다. 한편으로 그의 작은 이야기들은 열려 있기에 큰 이야기로 전환되기에도 수월해 보이지만 그는 그런 사실에 대체로 무심해 보인다. 때로 그는 나름의 해결을 시도하고 대부분은 무엇도 해결되지 않는다.
인상적인 것은 이야기의 작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책을 매체로 고르고, 다시 그 매체를 미술가의 도구로 뒤집는 그의 시도다. 전시로 변주된 이야기는 보다 적절히 원래의 과정 그대로를 사실로 증명하기 위해 책이 되었지만, 그는 책을 대량생산해 유통하기보다는 책 속의 이야기를 굳이 다시 구전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는 각 리서치 프로젝트의 과정과 긴밀하게 연관되는 시간을 정해 전시장을 찾은 이들과 함께 책을 읽는다. 어느 정도의 불편을 감수하고 한곳에서 만나 서로의 시간을 나누는 소규모의, 직접적인, 비효율적인 모임은 결국 자신이 적절히 동결한 사회적 탐사를 감각과 현상의 차원에서 달리 지속하는 예술적 실천이다.
‘미술가의 읽기 모임’은 좁은 선택을 통해 누군가의 이야기에 능동적으로 다가가 그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의 읽기는 (어쩌면 출판사들의 바람과는 달리) 번역과 인쇄와 유통이 불가능한 불투명한 세계를 더듬는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작은 이야기를 돌보는 방식이고, 그의 초대에 동참하게 된 이들이 각각의 작은 세계를 돌보게 되(고야 마)는 새로운 힘의 창출이다.
▲ 윤율리 라이팅 코퍼레이션
디자인: 이정은, 김홍
후원: 서울문화재단
출처: 아카이브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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