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공간
2020년 2월 7일 ~ 2020년 3월 13일
재현된 어떤 것들의 재연
기획: 박지형(독립 큐레이터)
마주 보고 있는 두 거울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리고 그 사이에는 이름 붙이기 애매한 모양을 한 물체들이 늘어져 있다. 이제 그들은 양쪽 거울에 자신을 닮은 환영을 제공할 것이고, 거울 속 이미지와 공간은 도미노처럼 서로를 반사시키며 무한히 이어질 것이다. 필자가 강정인의 작업을 보며 떠올린 풍경이다. 작가는 회화의 독립된 지지체인 평면 안에서만 성립 가능한 룰을 정립시키기보다, 3차원에서 작동하는 물리적 현상이 이미지가 되어 캔버스에 안착하고 그것이 또다시 현실의 물리적 감각으로 반사되어 전이되는 상호작용의 방식에 관심을 둔다. 또한 회화의 단단한 지형지물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조형적 실험이 오늘날 어떤 경험을 생산할 수 있는지에 집중한다. 특히 그의 첫 개인전 《Interlude》는 회화를 포함한 조형 예술의 창작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물리적 재료들의 변형과 서로 간의 교차, 마찰, 접합, 탈각 등의 현상이 평면 위에서 일종의 사건으로 재연(re-enact) 되었을 때의 상황을 다룬다.
작가는 머릿속으로 물성을 가진 재료에 가상의 제스처를 대입해본다. 이는 주로 힘의 작용을 기반으로 한 시시한 사건들의 집합체인데, 종종 하나 이상의 구심점에서 작용하는 중력이나 광원을 발판 삼는다. 납작한 벽을 뜯어내어 그 속살을 들여다보고, 유연한 반죽을 늘어뜨리거나 뭉쳐보고, 같은 유닛의 물체를 쌓아올리는 장면들이 그려진다. 화면은 실재적 공간에 존재한 적 없던 형태와 사물의 조합이 재현되는 작은 무대가 되어주는 것이다. 만져진 모양들은 아직 무엇이 되기 이전의 원재료, 혹은 무엇인가 만들고 남은 찌꺼기들처럼 프레임에 형(形)을 갖고 잠시 머물러 있다. 별다른 연결점이 없어 보이는 각각의 요소들은 묘하게도 한 프레임에서 다른 프레임으로 꼬리잡기를 하듯 이어지며,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작업실 풍경 1>(2020)에서 탁자 위에 어질러진 사물들 가운데 늘어진 반죽 같은 것이 그려진 그림(혹은 사진)은 또 다른 작업 <구상>(2019) 연작의 습작 혹은 부산물로 보인다. 바로 옆 <작업실 풍경 2>(2020) 속 동그랗고 납작한 형태들은 이리저리 나뒹굴다 관객이 발 딛고 서있는 전시장 모퉁이에 무심코 놓인다.
말하자면 ‘interlude’는 무엇이 되기 이전의 사물들이 만들어내는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막간(interval)의 사건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한 화면이 연쇄적으로 다른 화면들과 맞물리며 서로의 사이-공간(inter-space)이 되어주는 작품들의 속성을 암시한다. 그려진 대상은 작가가 어떤 자의적 연상 과정을 거쳐 지금의 형태를 만들게 되었을지 유추하게 하는 장치가 되어 고정된 이미지에 연극적 시퀀스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관객이 일원화된 재현의 서사 속으로만 몰입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도리어 눈으로 이미지를 바라보는 것을 넘어 그 대상의 물성을 만져내는 몸의 감각을 상상하게 하며, 동시에 관람자가 사각의 프레임 외연에 존재하는 3차원의 공백을 비가시적인 상상의 풍경으로 채워나갈 수 있도록 격려한다. 특히 그의 회화가 암시하는 공백은 짐작할 수 없이 넓은 불특정의 영역이기보다 나열된 작업들 사이의 틈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꽤나 구체적이다. 덕분에 우리는 환영으로 가득 찬 평면과 내가 서있는 전시장의 공백에 존재하는 별개의 시공을 지속적으로 접속시키고 스스로 여백을 채워가며 작품을 관람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마주 보고 서 있는 두 거울을 떠올린다. 이번에는 거울 사이에 사물과 작가가 함께 서있다. 그는 거울 너머로 이어지는 평면-공간을 물리적 현실에서 운용해갈 수 있는 전략을 생각한다. 이것은 전통 회화의 계보를 거쳐 오늘날 페인터들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질문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화면 속 즉물적 요소들이 서로 맺는 연극적 관계들이 전시장 전체의 서사를 다각화하는 과정에서 시각을 넘어서는 새로운 경험들을 생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단,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평면 속의 세계는 언제나 우리가 발 딛고 서있는 물리적 조건 속에서 시작되어 회화라는 영역의 가장자리로 연결되고, 그것은 다시금 현실의 일부가 된다는 자명한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작가의 위치는 두 장(scene) 사이를 넘나들 수 있는 경계에 있다.
출처: 전시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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