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연은 동경하던 자연으로 관객을 직접 안내하는 대신, 주변의 잡동사니와 짜고 그러한 기분을 돋운다.
라디오, TV, 어항, 젖은 수건, 선풍기가 한데 모여 저마다 평소처럼 일할 뿐이건만 그 숨결이 감상자에 다다를 즈음이면 이미 잡음은 파도소리로, 물비린내는 바다 내음으로, 미풍+회전은 바닷바람으로 둔갑한다.
가습기가 피우는 연무는 스탠드의 붉은 빛을 덧입고 불꽃처럼 타오른다. ‘물불 가리지 않다’란 말이 있다. 그야말로 물불 가리기 애매한, 촉촉한 모닥불이다.
닿을 수 없다면, 닿은 셈 치는 것도 방법이다. 기분을 내는 것이다. 마음속에 부처가 있다고 했다. 마음먹기 달렸다면 마음을 먹이면 된다.
라디오 잡음이 파도 소리와, 선풍기 바람이 바닷바람과 제법 비슷한 구석이야 있겠지만 둘을 헛갈려 꼼짝없이 속기엔 또 어딘가 마뜩잖다. 게다가 눈앞엔 바닷가와 별 관계가 없는 엉뚱한 물건들만 옹기종기 널브러져 있다. 가습기와 모닥불은 숫제 ‘상극의 상종’이다.
그러나 익히 아는 대로 실재와 심상의 구분선은 둔탁하다. 경험과 기억을 잘 이겨 형편대로 그은 각자의 구획이기 때문이다. 기억의 정체는 경험을 반죽해 저마다 빚은 상상이고, 인지란 여기저기 쿡쿡 찔러 그 상상을 날뛰게 만드는 것이다.
덕분에 잡동사니들이 뒤얽혀 소리와 바람과 습기와 냄새를 동시에 피우고 부치면 힘에 힘을 덧보태 감상자의 경험과 기억을 넌지시 주무르기 시작한다. 거기에 ‘기만에 대한 합의’까지 뿌려, 눈을 감고 약간의 상상력을 투자해 바다를 떠올리면 어느덧 그곳이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바라보며 붉게 물든 기억들을 되짚다 보면 마음은 이미 곁불을 헤집고 있다. 갖은 재료를 개어 일종의 ‘오인(誤認, miscognition)’을 부쳐 내는 격이다.
강호연은 실제 풍광과 꼭 닮은 자극을, 복합적이고 공감각적인 방향으로 흩뿌린다.
관객은 기꺼이 미끼를 물어, 대안의 양동이 속으로 자진 안착한다. 속고 낚이는 게 아니라 속아 주고 낚여 줌으로써 이상향에 다가간다.
그래서 강호연의 작업은 ‘능동적 자기 기만’으로 이상적 풍광에 다녀오는 작업이다. 경험 대신 유사경험, 최선 대신 차선, 만족 대신 대리만족으로 갈증을 푼다.
돌아오면 다시 눈에 들어차는, 이상향과는 딴판으로 썩 번잡한 로우테크의 향연은 괴리로 와 닿는다. 가장 먼 것을 일궈 내는 역군이, 정작 가장 가까운 것들이다. 그 의외성에서 움트는 카타르시스로 여정은 마무리된다.

강호연_모닥불_일상용품(가습기, 스탠드)_가변설치_2015
강호연_산장_혼합매체_가변크기_2014
강호연_산장(내부)_혼합매체_가변크기_2014
출처- OCI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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