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나인
2018년 11월 16일 ~ 2018년 11월 22일
대학 졸업 후 쭈욱 영화 컨셉 디자이너로 일 했다. 그러다 이제는 내가 쓴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으로 영화 현장을 떠나 문래동에 작은 작업실을 꾸렸다. 그러나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는 상상들을 글로 옮겨 내는 것은 생각 했던 것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간절해 질 수록 마음이 조급 했고, 잘 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어느 한 글자도 가벼운 마음으로 써 내려 갈 수가 없었다. 텅빈 노트를 들여다 보며 멀뚱히 책상앞에 앉아 있는 시간은 즐겁기는 커녕 곤욕 이였고,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무언가 해야만 했다.
현실도피 목적으로 시작된 낙서는 작업실을 구한 후 2년여 간이나 아무 것도 적어 내지 못한 빈 노트를 대신 채우려는 듯 선들이 빼곡 했다. 복잡하고 조밀하게 얽혀 있는 선 들을 보고서 잘 그린 그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오늘은 무언가를 해낸 것만 같아 위안을 얻었고, 이만하면 오늘은 괜찮다 싶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하루종일 종이와 펜을 붙잡고 있어 봐야 어차피 글 이라고는 몇 자 적어 내지도 못 할 텐데, 낙서들은 글자가 있어야 할 자리를 최대한 넓게 남겨 두려고 모퉁이에 자리한다. 그러면 나는 구석으로 내몰린 낙서들을 사진 찍고, 포토샵에서 최대한 중앙으로 한 자리에 모아 출력한다. 그 출력본 위에 무언가를 또 덧그리고, 다시 사진 찍는다. 그러기를 수차례 반복 하다보면 여러 날 동안 던져 놓았던 서로 다른 낙서들이 마치 제 자리를 찾은 듯 모여 하나의 그림이 된다. 다 그려진 그림을 다시 투명 필름에 출력하고, 감광액을 바른 종이 위에 얹어 햇빛을 쪼인다. 그리고 종이가 햇빛에 반응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조금 더 기다릴지 아니면 너무 오래 기다린것은 아닌지 고민하며 시간을 죽인다. 그러다 보면 마침내 그림을 그리느라 너무 바빠서 오늘도 역시나 시나리오는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는 완벽한 핑계가 만들어 진다.
삶의 조각들이 합쳐져서 내가 되는 것 처럼 내 그림도 여기저기 끄적여 놓은 낙서의 조각들이 모여 만들어 낸 이야기다. 낙서를 끄적일 때에는 어디에 어떻게 배치 되어 어떤 그림을 만들어 낼지 생각하지 않았고, 감광을 하면서도 그 날의 구름의 양 이나 해의 위치에 따라 색이 달라지기 때문에 얼마만큼 파랗게 될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이나마 죄책감 없이 시간을 죽이는데에 골몰 했을 뿐 이다.
비록 시작은 오늘 나는 아무 것도 ‘안’ 하지는 않았다는 자기 위로 였지만, 그려냄으로써, 어떤 식으로든 모든 행위가 꼭 생산적인 결과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릴 수 있다. 그래서 그저 무엇이든, 꾸준히 시간을 죽이는데에 몰두한다. 그러면 어느새 무언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외의 나머지는, 하늘에 맡긴다.

김두희, Hang in there, Cyanotype of Pen drawing shadows, 117x91cm, 2018

김두희, 때를 너무 오래 기다리면 벌어지는 일, Cyanotype of Pen drawing shadows, 117x91cm, 2018

김두희,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 Cyanotype of Pen drawing shadows, 117x80cm, 2018

김두희, 두더지, Cyanotype of Pen drawing shadows, 117x91cm, 2018

김두희, All for one, Cyanotype of Pen drawing shadows, 162x112cm,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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