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터사이드
2022년 2월 24일 ~ 2022년 3월 18일
#1
Host
연대를 알 수 없는 오래된 숲이었다.
민간인 통제 구역이었던 곳을 탐사하고 돌아온 후, 2년이 지난 어느 날인 듯하다.
처음에는 등줄기에 이물감이 있었다. 여드름일 것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붉은 점은 며칠 만에 큰 혹이 되어 제대로 누울 수조차 없는 지경이 되었다. 손쓸 겨를도 없이 커진 혹을 떼려고 병원을 전전했지만 이미 몸은 ‘혹’의 숙주가 된 듯하다.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온몸을 휘감던 공포와 두려움이 뚝 멈췄고 짐을 싸서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짐. 짐. 척추에서 전달되는 찌릿함이 뚜르륵 흘러 손끝까지 저리도록 신경을 압박했다. 통증을 느끼지 않으려면 계속 움직여야만 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꼬박 30일을 이동하여 도착한 곳은 2년 전 그 숲이었다. 등에 난 혹은 이제 사과 크기만큼 자랐다. 약간 가려운 듯. 아니, 긁어야겠다.
내가 무엇을 찾는지 알 수 없다. 의식과 식욕, 수면, 생리 등의 욕구는 너무나 또렷한데 발걸음과 시야는 내 것이 아니다.
나무들로 빼곡하게 둘러싸인 숲속에서 시공간의 감각이 무뎌졌을 무렵, 저 멀리 넝쿨로 뒤덮여 녹슨 기체가 보인다.
얼마큼 잤을까? 여전히 의식은 또렷하다. 통증은 사라졌다. 잠에서 깼지만 옆으로 몸을 말아 누운 채 생각을 했다. 등에 난 이것은 무엇일까? 아마존 같은 곳을 다니다 음수를 통해 들어오는 박테리아나 미생물 같은 것일까? 혹은 곤충의 알이나 바이러스일까?
짐을 싸서 떠나올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무언가의 숙주가 되었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지만 어떤 타당성이나 합리적 의심이 없다.
마치 불가항력처럼 내가 인간이고 누군가의 자식이듯 숙주임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불현듯 알게 된 사실은 그동안 단 한 번도 등을 만져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평상시에도 유연하지 못해서 ‘등에 손이 닿지 않는다’라는 경험적 명제가 마치 선험적인 형질인 것처럼.
그쯤 생각하니, 아, 불쾌하다. 한 쪽 팔을 들어 허공을 휘젓는다. 누구의 의지인가 잠시 의심해 보지만 나의 주체적 행위라는 데 여지가 없다. 팔을 있는 대로 꺾어 등을 더듬어 본다. 보이지 않지만 어렵지 않게 만져지는 것을 보니 사과 크기보다 더 커진 듯했다.
이내 몸을 일으켜 우주선 내부를 휘감고 있는 넝쿨을 제거하기로 한다. ‘왜’라고 왜 질문을 왜, 왜, 왜 하지 못했을까? 어느 때보다도 자의적으로 등을 더듬고 있는데 갑자기 넝쿨을 제거하고 싶다. 주머니에서 드라이버를 꺼내들고 우주선에 빼곡하게 자리한 기계들을 떼어냈다. 드라이버를 생각했다. 언젠가 온 집안을 뒤져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그 능숙한 손놀림은 무엇이었을까? 나였을까?
#2
식물성 우주선
복잡한 기계들을 떼어내고 드러난 금속면에 적힌 글씨를 보았다. 작은 탄식이 새어 나온다. “Crew Dragon”. 주식을 좀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2021년 스페이스X 사에서 쏘아 올린 최초의 민간유인 우주왕복선이었다. 당시 나는 일본 소년만화에서나 나올법한 작명 센스에 감탄과 조롱이 섞여나왔다. 떼어낸 기계 뭉치에서 배터리를 찾아 바쁘게 분리하고 있는 내 손이 보인다. 스페이스X는 자본주의 대 민간 우주 시대의 시작을 알렸던 만큼 세계 경제와 정치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환경, 기술, 노동력 등 복잡한 문제들과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그 문제들을 드래곤 소환이라는 판타지한 방식으로 돌파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우주선은 쏘아 올릴 당시의 모습이 아니다. 겉면은 녹슬어 있고 이끼가 가득 붙어있고 우주선 내부를 싸고 있는 피막은 변온동물처럼 주위 온도와 빛에 반응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나의 소중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밤이 되면 반으로 쪼개진 우주선의 두 기체가 공명한다. 처음에는 기계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거대한 동물의 숨소리같기도 하다. 마치 암수가 있는 것처럼 상호작용이 일어나듯이.
#3
숙주로 산다는 것
언제부터인가 계속 일회용 방호복을 입고 생활한다. 우주선 내부를 감싼 생명 유지 피막이 옷에 들러붙어 보호색을 띠게 되었다.
등에 난 혹은 조금씩 커지고 있다. 축구공 정도의 크기가 되었을 때 방호복을 찢어 밖으로 빼냈다. 고인 물에 등을 비춰보니 식물처럼 보였다. 흡사 양배추와 같은 모양인데 잎이 훨씬 크고 검은색을 띠었다.
매일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일어나서 아침으로 조팝나무 우린 물을 마시고 식물도감을 챙겨 길을 나선다. 나의 주된 업무는 건강에 도움을 주는 식물을 채집하는 일이다. 조팝나무는 유전적 변이가 증가한 계통관계를 가지고 있어 꾸준히 섭취하면 단백질 합성의 품질을 높여준다. 의지과 상관없이 매일 먹고 있는 케일이나 양파는 식물성 케라틴 생성을 돕는다고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등에 난 혹에 유용한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 같다. 저녁이 되면 조개나물을 넣고 끓인 물로 머리를 감는다. 며칠에 한 번 갈퀴나물의 어린순을 식용하기도 하는데 근육과 관절에 효능이 있다고 하니 역시 단백질 생성을 좋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듯하다. 나는 단백질 생성을 잘하는 건강한 숙주이다. 잘하고 있어.
#4
개화
얼마가 지났을까?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사방이 악취로 가득하고 등에 난 혹이 거대하게 자라 피처럼 붉은 꽃으로 피었다. 세상에. 뒤통수 너머로 너울거리는 붉은 꽃잎에는 흰색 반점들이 공포스럽게 박혀있어 누가 봐도 독성이 가득해 보인다. 내가 발버둥 칠수록 지독한 암모니아 냄새가 강력해지고 정신이 혼미하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악취를 맡고 모여드는 해충이 방호복을 뚫고 몸을 기어 다니는 것이다. 윙윙. 콧구멍으로 들어온 파리가 코털에 걸려 나오지 못하다가 아예 깊숙이 들어가 식도를 통해 입으로 나오기를 반복한다. 이제 이렇게 모든 영양분을 빼앗기고 말라죽는 것일까? 아니 그전에 더럽고 수치스러워서 죽을까.
우주선의 공명을 다섯 번 정도 들었으니 대략 5일쯤 지났을까?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등에 난 꽃이 시들었다는 걸 알았다. 꽃은 불에 탄 것처럼 새까맣게 시들어 축 처져버렸다. 드디어 이것을 떼어내야 겠다는 의지가 생겼고 동시에 거짓말처럼 분노와 슬픔이 밀려온다. 등을 벽에 대고 거세게 긁고 바닥에 누워 비비고 불태우려 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머리카락과 척추를 통해 전달됐지만 내 생에 가장 필사적인 노력을 쏟아부었던 것 같다. 아팠다. 떼려고 할수록 지독하게. 허리가 끊어질 듯. 내 몸의 모든 신경세포가 꽃과 연결 되어있는 느낌이다.
#5
메르스(MERS) 때도 그랬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우주선에 누워 다시 생각을 시작한다. 등에 난 혹은 숙주인 내 몸에 기생하는 식물이다. 하지만 기생식물들은 대체로 숙주에게서 영양분을 빼가는데, 이상하게 내 몸은 너무나 멀쩡하다. 등에 죽은 시체꽃이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심지어 예전보다 강해진 것 같다. 그렇다면 바이러스를 심었다는 것인가. 숙주의 몸에 USB를 꽂아 넣는 것처럼 접촉해서 변이를 일으켰을지도……. 만약 이게 맞는다면 다음 단계는 면역력을 높여 항체 형성을 돕고 치료제를 개발하는 일이다.
메르스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감염시킬 때 모두의 관심사는 면역력을 높이는 방법이었다. 연일 매체에서는 손 씻기, 마스크 착용하기 등의 캠페인을 이어나갔고 면역력에 좋은 음식과 운동 소개가 뒤를 이었다. 그때 한국에서 불티나게 팔려서 한동안 가격이 치솟았던 것이 표고버섯이다. 몸을 일으켜 식물도감을 찾았다. 역시 표고버섯은 항바이러스 효능이 있다. 우주선 밖으로 나왔다. 이 숲은 지천에 표고버섯이 가득하다. 숙주의 상태에서는 금기시되었겠지만, 아니 사실 있다는 사실조차 전혀 인지하지 못했지만.
나는 버섯을 채집하고 지금도 채집하고 있다.
#6
라플레시아
많은 것을 알아냈다. 우주선은 무선 원거리 통신이 가능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노트북도 찾았다. 그리고 나의 가설이 틀렸다는 것 또한 알았다. 내 등에 기생한 것은 고대 식물 종 라플레시아였다. 흡사 나는 포켓몬에 ‘이상해꽃’과 ‘라플레시아’가 이종교배된 괴생명체가 되어버린 것 같다. 이 라플레시아는 역시 유전자 바이러스처럼 유전자를 훔치는 기생식물이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악성 바이러스 코드를 심고 숙주를 약화시켜서 양분을 빼먹는 것이 아니라, 내 유전자 정보를 훔쳐다 자신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식물은 잎이나 뿌리, 줄기가 없으며 엽록소가 없어서 광합성도 하지 못한다. 단지 숙주에 기생하여 숙주의 양분과 수분을 가져가는데 이때 유전자의 수평이동이 일어난다. 연구에 따르면 라플레시아 전사체 전체의 2%에 해당하는 49개가 숙주 식물로부터 전해진다. 5일 동안 경험했던 악취는 수분을 하여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 해충을 모여들게 하는 방책이었고 라플레시아의 평균수명이 5일 가량이었다.
전시연계 퍼포먼스
《I am your Host》
2. 26 (토) 3. 5 (토) 3. 12 (토), 오후 2시
신청하기: http://alterside.kr/you-are-my-host/
참여작가: 김웅현, 송아리
퍼포먼스: 송아리
그래픽 디자인: 파카이파카이
출처: 얼터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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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프로그램은 주최측의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