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트스페이스
2021년 10월 30일 ~ 2021년 10월 30일
프롤로그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의 욕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어찌 보면 철학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고, 다르게 보면 일상적인 화두를 꺼내는 것일 수도 있다. 욕망의 언저리에서 나 스스로가 욕망덩어리가 아니라는 자아 도취적 귀결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중생들의 그것일지라도 어쨌든 욕망이라는 감정 자체가 기분이 나쁘다. 뭔가 나약함을 고스란히 들어내 보이는 것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많은 철학자, 시인, 소설가, 의사, 예술가들은 설파한다. 인간은 욕망 덩어리라고! 특히, 우리 영화계의 현자 찰리 채플린은 “왜 굳이 의미를 찾는가? 인생은 욕망이지 의미가 아니다 ”라는 기막힌 경구를 남겼다.
김지민 작가의 작업에 대한 고민도 인간의 삶과 욕망에 방점을 둔다. 하지만 인간을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자신의 방법론으로 바라본다. 삶을 희화화하고, 죽음을 경애하며,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에 애정을 갖는다. 매우 비관적이며 회의적인 작가의 마인드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가정이 아니고, 그렇게 봐야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의 작품을 관람하는 우리는 더 이상 가정 속에서 그의 작품을 음미하는 게 아니고, 그 상황에 들어가 헤어나오지 못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마치 장자의 꿈처럼 저 오브제들이 나인가? 내가 저 오브제들인가? 하는 착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면서 하나의 작은 오브제로 만들어진 수많은 <나>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은 삶과 죽음을 교차하며 세상의 사람들에게 보이길 바란다. 욕망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설파하는 것 같지만 관조적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죽음 이후의 상황을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으로, 혹은 상상의 공간으로 표현한다. 너무나 모순적이다. 마치 사이비 교주인양 그것들을 극적으로 대치시켜 우리로 하여금 두 극단적인 상황을 자연스럽고 장난스러운 일상으로 끌어들인다. 수많은 토템과 영험한 무속의 행위가 넘쳐나는 일상으로 말이다.
부러움의 대상체
<ENVy⁷> 부러움의 일곱 제곱은 복잡한 기호의 수식에서 시작한다. 이 골치 아픈 수식은 인간의 희로애락처럼 해석곤란한 심리를 나타낸다. 우리가 흔히 상대방을 앞에 두고 그 상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심리적 사건들은 정말이지 자신도 모를 방향으로 진행되곤 한다. 이 부러움은 대상체로 인하여 생겨난 일종의 욕망이고 이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작가가 의도하는 이 복잡한 제목과 정리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욕망과 그 덧없음을 표현하는 역설적인 내레이션이다. 이 욕망들의 총체는 덧없음의 필연적 귀결을 가져온다는 우리네 삶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수식이며 이 기호들의 다양한 실체를 이 전시에서 보게 될 것이다.
만족이
인간은 확실히 경제적인 동물이다. 인간의 행동 근원에는 경제적 활동이 자리한다.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입던지, 어디서 살던지 간에 이러한 행동의 모태는 교환에 있다. 무엇을 교환한다는 말인가? 자본주의의 총아는 인간의 그 집착 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소비를 해야 한다. 이 소비는 곧 교환이다. 성공적인 교환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그 카타르시스를 주체할 길이 없어 온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는다. 비로서 욕망이 쟁취된 상기된 얼굴로 말이다.
작가는 여기서 교환의 요소가 돈이나 재화가 아닌 상표라는 기호에 방점을 둔다. 누구나 가지고 싶어하는 그 상표의 획득은 욕망의 성취와 같은 위상을 가지며, 재화와는 별개로 상표로 점철된 쇼핑백이 그 대표적인 시니피앙이다. 무엇이 진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제 상표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자의적인 표상일 뿐이며, 리바이스의 붉은 라벨이 갖는 상징만이 욕망의 대상체이다.
이러한 욕망의 성취는 수많은 웃음의 폭탄이 되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며, 너도 나도 상표만 보이는 기호들을 들고 즐거워한다. 우리는 더 이상 내재된 재화에 관심이 없다. 이름 뿐인 개념에 집착한 나머지 공허의 웃음만이 남은 것이다.
하지만 브랜드파워를 위시한 현대의 소비만능주의시대를 풍자한 개개의 만족이는 위에서 말한 여러 의미들을 중의적으로 표현했다고 치더라도 이 만족이들이 무한 증식하듯이 존재하며 모두 똑같은 표정을 짓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을 때 비로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그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공포>다. 작가는 우리가 감정의 심연에서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조금이나마 인지하였을 때 느끼는 공포와 집단에서 포착하지 못한 표정들이 하나씩 인지가 되는 순간의 공포를 보여준다.
해골
해골은 사유하지 않는다. 해골은 단지 형상의 기본이 되는 구조일 뿐이다. 사람이 사람 같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해골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해골의 형상은 여타 다른 종과의 구분을 위한 것이지 그 위에 얹혀 있는 다양한 신체의 요소들로 인한 누구와 누구의 개별적인 구분을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작가의 해골에는 그런 의미소가 내포되어 있다. 인간의 해골이 갖는 형태적 보편성은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다 똑 같은 인간사 속의 인간 군상들이 탄생한다.
해골은 사유한다. 해골은 단지 형상의 기본이 되는 구조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제각각 인 이유는 바로 해골의 추상적인 자유에 있다. 예술은 재현공간을 통해서 단일성을 유지하거나 이를 회복시키려 한다는 르페브르의 말처럼 해골이라는 공간은 죽음의 시간과 함께 추상적인 자유를 받아들이는 순간 새로운 재현공간의 탄생을 알린다. 그 속에서 모두가 다른 인간 군상들을 보여준다.
결국 해골은 공허하다. 죽음과 함께 유기적인 내용물들이 빠져나간 그 자리엔 공간만이 남았다. 그 공간은 추상적인 무엇인가가 채워지던, 유기적인 기관들이 채워졌던 간에 그 끝에는 공허만이 남는다. 삶과 죽음이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모순으로 부딪히는 끊임없는 투쟁 속에서 남는 것은 결국 공허다. 이러한 공허는 우리가 굳이 억지로 죽지 않더라도 저기 보이는 수많은 해골이라는 형상에서 어렴풋이 나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에필로그
발터 벤야민이 불과 86년 전 썼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의 생각은 김지민 작가에게서 또다른 모티브로 작용한 듯하다. 사진술이 만들어지고 수많은 대량 생산품들이 철도로 여기저기 흩뿌려 나가면서 예술작품이 가지는 순수한 아우라를 잃어버리는 양상은 곧 예술이 대중성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일련의 생각들은 오늘날에도 유사하다. 사진이라는 2차원의 평면적 복제인쇄물은 이제 3차원의 입체를 보여주는 또다른 기술복제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게다가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손쉬운 접근성은 아우라를 잃어버린 예술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하는 시기가 왔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김지민 작가는 손쉬운 3차원의 복제물 제작의 사회적인 화두를 어떻게 담보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질문한다. 그만의 오브제들의 제작과정에서 보여주는 새로운 기술을 이용한 복제방식과 모든 사람이 쉬이 접근할 수 있다는 제작방식, 그리고 그 안의 일시적으로 유기적인 재료가 될 수 있는 메커니즘까지 아우른 복잡한 전개의 양상을 띠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 제작방식과 거리를 둔 작가의 예술적 조형물의 창조법은 벤야민이 예측한 아우라가 사라지며 대중들에게 침투해 가는 예술작품의 현재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아크로마키 임진수
참여작가: 김지민
출처: 유아트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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