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럼
2024년 2월 18일 ~ 2024년 3월 10일
이 글은 당신이 이 글을 보기 겨우 며칠 전에 둘이 합심해 만든 광경을 보고 마주하고 나서야 쓰여졌다. 악수를 하고 합의를 한 상태, 그러나 아무런 대책 없이 링1)에 세워지는 것은 어떤가. 직전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대본도 역할도 없는 역할극을 하기로 한 이들. 당신이 모를 모종의 현실적인 합의를 하고. 어떤 식으로든 충돌할 것이라는 걸 예견하고, 무언가를 세우고, 그 위에서 이걸 봐라. 일단 보고 무언가를 발견하라고, 이야기하라고.
같은 공간에서 그저 살아있는 동시에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투견장. 조화로운 풍경을 보이다 갑자기 어느 날 밤이 지나면 서로 물어뜯어 크고 작은 시체들이 떠 있게 되는 어항의 생태계. 존재들의 궤적들이 서로의 모습들을 가리거나 드러낸다. 분명 서로 유사한 모습을 드러낸 채로, 수평, 수직의 완고한 방향, 나선형이나 완만한 곡률. 직선. 돌아서면 커다란 기계의 반복 운동처럼 무언가를 쳐 내고, 급작스레 마름모의 끝 날처럼 날카롭게 베거나, 핀처럼 뚫는 광경.
이 광경에서 문유소의 대사였던 것 : 그냥 여기서 현피 뜨자고. 여기 그렇게 세워진 아이들. 그림은 과다해서 있어야 하는 자리를 초과한다. 그림들은 자동적으로 무관심하게 부딪히고 충돌한다. 자신을 초과하기 때문에 남는 흔적들이 흰 벽을 침입한다. 창문을 모두 닫은 아무도 없는 집의 광기 어린 조용함과 같은 흰 벽. 초과하기 때문에 조용함은 무마된다. 문유소는 스스로 초과하거나 넘치는 폭력이다. 그는, 캔버스 밖- 캔버스 밖의 무한성 -을 보면서 그린다고 했다. 그의 그림은 종종 물감이 너무 올라가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들 수 없이 무거운 상태가 되기도 하고, 참을 수 없이 쌓여서 예측 불가능한 문양을 그리며 짓이겨지기도 한다. 그는 그저 놓여졌기 때문에. 살아있기 때문에 자리를 지키고 있고, 힘은 (혹은 그는) 무관심하다. 실수로 부딪혀서 죽었어요. 딱히 상대방을 노리거나 대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밤 도로를 질주하는 오토바이, 종료 5분 전의 무언가를 달려가는 그런 파괴감. 그러나 오히려 표정 없음,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투, 나를 쳐다보지 않고 그렇다고 나를 거부하지도 않고 순전히 다른 곳을 쳐다보는 내뱉음의 말들, 눈 앞에서 갑자기 빠져드는 고요한 명상.
일반적으로 힘이 인간을 사물화-타자화 시킨다면, 문유소는 순수하게, 상대를 사물화 시키지 않은 채로, 오히려 동등하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제 자리에서 일관적인 동등한 힘을 휘두른다. 절제 없이, 이해 없이, 두려움 없이. 방향은 정확하게 상대방을 보지 않은 채로.
이 광경에서 임재균이 만들고 만지는 것 : 골조의 물질성을 훤히 드러내거나 각기 다른 방향의 두께를 굳힌 뼈대들은, 시야에 따라 연속된 하나의 무리와 같이 연결되어 보이거나, 각기 다른 힘 혹은 양감의 방향을 가지고 개별로 서 있다. 조각은 만지는 것이고, 그것들은 만져졌다. 임재균은 만짐으로 방향들 그리고 조각이 세워질 축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다시 축을 뒤집고 가루를 축적한다. 다시, 축을 뒤집고, 축적한다. 반복. 돌려지며, 바닥이었던 것이 바닥이 아니었다가 바닥이 된다. 원래의 모습이라면 보여지지 않았을 바닥의 골조는 새로운 위치점을 가짐으로서 결함을 굴욕적으로- 동시에 미적으로 드러낸다. 몸과 머리와 서기 위한 바닥은 새로 탐색되어 새로 세워지고,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충돌은 계속 발생한다. 계속 그것의 방향을 돌리는 일, 그것은 다분히 일적이다.
문유소가 상대방을 보지 않고 마구잡이로 휘두름에도, 둘이 서 있는 링의 광경이 분명하게 미적으로 구성적이며, 타점과 교점을 갖춘 쾌를 목적으로 하는 듯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사실 임재균의 조각들이 이 대본도 역할도 없는 역할극에서- 상대에 대응하여 충돌함을 노동했기 때문일까. 그는 여전히 링에서도 유사한 종류의 노동을 잇는다. 조각을 만들며 셀 수 없이 조각을 돌려내는 노동을 한 것처럼- 그냥 서 있는 것에 분명 마주 보고 선다. 조각의 두께 사이로 겹쳐지는 스트로크. 맞닿는 궤적들. 호응하는 그림자. 캔버스를 찢으려고 가까이 다가간 듯한 행위. 축을 돌려내며 굴욕적인 장면이나 공격적인 모습들과 한계를 드러내듯이, 어떤 건물의 한 축을 기준으로 알맞아 보이게*임재균 작업노트 발췌 존재하듯이, 그 객체들에 대한 겹겹의 노동들을 여전히 쌓아나간다. 이는 또 다른 무관심이다. 저 폭력에 대한 무관심. 저 세계에 대한 무관심. 그런 점에서 무관심하고, 영원히 대응될 수 없지만, 그는 노동자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대응됨을 가장 잘 노동한다.
문유소와 임재균은 회화와 조각이라는 전통적인 매체 안에서 자신들은 ‘화가’ 혹은 ‘조각가’임을 숨김없이 드러낸다는 점, 뼈대 위2)에 무언가를 쌓아나간다는 일정 조건들, 그리고 분명 과정적인 것을 중시한다는 태도를 공유한다. 그런 채로 같은 링에 서 있다. 그럼에도- 둘은 분명 존재하는 층위가 다르다. 폭력 혹은 공포심의 세계와 노동의 세계를 같은 층위에 놓을 수 없는 것처럼3) 말이다. 같은 언어로 쓰일 수 없는 것이 같은 모습으로 같은 곳에 자리해 무관심한 충돌이 일어난다.
둘은 동시대성의 이미지를 재현해 내기에 집착하는 요즘의 풍경과는 전혀 다르게, 고리타분할 정도로 물질에 집착한다. 각자의 작업 안에서 손에서 손으로 그들은 연관을 갖고, 새끼를 친다. 번식한다. 4) 상상하고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직진하여 물질로 닿는다. 물질로 손과, 몸과, 벽과, 캔버스의 올과, 철과, 가루와 직접 닿는다. 직접 닿아야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거기서 발견해 내는 것. 만져내고 닿아 현장에서 바로 발견해 내는 것. 그들은 분명 완전히 각각 층위가 나뉘어 있는 채로, 그 각자의 자리에서 충돌하는 채로 - 날 것 중독자다. 손으로 만들어내는 사람들. 날 것의 싸움이 어떤 것일 수 있다면. 그 날 것의 싸움이, 만들어진 격투기가 아니라 그저 서 있는 채로 존재하며 온전히 무작위하게 충돌하고 지지부진하게 뒹구는 것이라면. 대화 없이 눈빛으로 전달하는 것이라면. 이들이 만든 풍경이 싸움 치고는 지나치게 조화롭고, 즐길 만큼 미적인 쾌가 드러남에도, 혹시 이를 보는 당신이 묘하게 불편하며 짜증이 솟구치고 불만을 제기하고 싶다면, 아마 이들이 실은 이 와중에 고집불통으로, 서로의 세계를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 이 싸움 같지 않은 싸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건 격투기 쇼가 아니라 충돌이다 -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사내의 이유 없는 욕지거리가 귀에 들어온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고, 나는 손상되거나 충돌한다. 유리창에 새가 부딪혀 죽는다. 나는 가만히 거기에 있었고 무언가를 손상시키거나 충격한다. 가만히 있고, 그곳에 있고, 충돌한다. 우리가 충돌하는 이유는, 가만히 있었거나,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1) 전시 제목인 링의 뜻은 격투기의 공간인 링만을 뜻하지는 않지만 이 글에서는 상당 부분 무대와 같이 올라설 공간으로서의 링으로 취급하였다.
2) 문유소는 자신의 그림에 뼈대가 있다고 했다. 맨 처음 올린 붓의 궤적이 뼈대이고 그 위를 덮어나가며 공간을 만든다. 뼈대를 가려가면서도 마지막에 가서도 충분히 뼈대가 남아있게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임재균은 철로 조각의 뼈대를 용접해 만든다고 했다. 뼈대 위에 가루들의 비율을 조절해 뿌려내 중력에 따라 굳게 내버려두고 다시 축을 돌려 과정을 반복한다.
3) 이 부분은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즘- 50쪽에서 생각을 차용했기 때문에 맥락 설명을 위해 본문을 덧붙인다. – ‘노동의 세계(또는 이성의 세계)와 폭력의 세계는 서로 대립 관계에 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느꼈을 것이다. 무질서가 노동의 질서와 대립적이듯 죽음도 그랬다 …(생략)… 무질서와 폭력은 노동의 최종적 목적이라고 할 존재 자체를 위협하고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노동이 보장하는 질서와 일체가 된 채, 적어도 노동의 시간에는, 노동의 질서를 방해하는 폭력을 멀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4) 문유소의 과거 시리즈 중 한 시리즈의 이름은 [each different process but sharing family tree]였다. 작업끼리의 관계를 설명할 때 ‘새끼를 친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으며, 이번 작업의 제목들도 한 앨범의 트랙리스트처럼 서로 연관성을 갖는다. 이번 전시에서 보이는 임재균의 신작은 모두 [Node]라는 이름을 가진다. 이는 ‘교점’ 혹은 ‘마디’라는 뜻이다. 전시장에는 한 점의 구작 [Scale] 또한 같이 놓이는데, 이것들이 겹치며 방법과 양감에서의 차이를 가진 구작과 신작이 새로운 연결점- 연속성을 맺는다. 조각들은 시각적으로 연속성을 가지고 조각끼리의 연결된 호흡을 갖게 된다.
참여작가: 문유소, 임재균
그래픽 디자인: 정태완
글: 이수민
출처: 인터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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