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15년 2월 7일 ~ 2015년 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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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는 1919년에 설립된 독일의 미술학교로서 이 학교의 창립자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는 영화가 이 학교의 교사와 학생 들에게 중요한 분야라는 교육관을 갖고 있었다. 그의 교육관은 '시각의 과학'을 가르치는 것에 초점을 두었었다. 예술과 기술은 하나의 새로운 통합을 이루었고 탁월한 기술 매체인 영화는 이것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부분이었다. 바우하우스 교수 라즐로 모홀리 나기(Laszlo Moholy-Nagy)가 바우하우스에 '영화예술 실험센터 (Versuchsstelle fur Filmkunst)'를 세우려는 시도가 실패하기는 했지만, 바우하우스의 교사와 학생 들은 상당한 수의 영화를 만들어내었다. 이 작품들의 대부분이 바우하우스가 운영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몇몇 작품은 세계 2차 대전 이후에야 이전 영화 대본을 바탕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라즐로 모홀리 나기가 지지한 것처럼 바우하우스의 프로그램 목표는 영화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당시 예술적으로 특수화되는 것은 다중 매체의 작업으로 대체되는 것이었다. 사진과 영화는 이 다기능적 접근법에 필수적인 것인 것이었고 교육 개념에서 중추적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또한 라즐로 모홀리 나기는 영화만을 위한 실제 영화 장비의 이용에 초점을 맞추었고 이것은 그의 기술에 관한 인식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의 관심은 새로운 현실을 표현하는 데에 있었고 이때 기술 장비와 조정되는 '시각'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라즐로 모홀리 나기와 그의 동시대인들이 촬영한 사물들은, 예를 들어 다리의 철제 대들보, 유리 빌딩, 일반적 새로운 물질들은 현실에서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고 생활환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예술은 예술의 진취성을 잃지 않기 위해 이것에 반응해야 했다. 바우하우스의 영화작품들은 세 가지 주요 측면 즉, 건축에 관한 다큐멘터리, 사회 비판적 기록물, 추상적 미디어 예술로 나누어질 수 있다. 여기에는 바우하우스의 대가들(발터 그로피우스와 라즐로 모홀리 나기)가 만든 영화들, 바우하우스 학생들(하인리히 브록지퍼(Heinrich Brocksieper), 베르너 그레프(Werner Graeff), 쿠르트 크란츠(Kurt Kranz), 쿠르트 슈베르트페거(Kurt Schwerdtfeger))가 만든 영화들, 그리고 바우하우스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었던 여러 영화감독들(한스 리히터(Hans Richter)와 바이킹 에겔링(Viking Eggeling))이 만든 영화들이 포함된다. 라즐로 모홀리 나기와 바우하우스를 겨냥한 최근의 비난은 그들의 아방가르드 영화가 그들 스스로 정한 목표인 주류문화를 위한 작품 제작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산업용 가구 분야에서처럼 예술적 상아탑을 넘어서려고 노력하였고 예술을 실용적이고 실리적인 제품의 생산에 적용하는 데 목표를 두었었다. 이 접근법은 산업 디자인과 현대 건축의 분야에서 크게 성공하였지만 영화 분야에서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바우하우스와 관련된 건축에 관한 영화들에서, 그 중에서도 리하르트 파울릭(Richard Paulick)과 발터 그로피우스의 영화 '우리는 어떻게 건강하게 경제적으로 사나? (Wie wohnen wir gesund und wirtschaftlich?(How Do We Live Healthily and Economically?))' (독일 1926-1928)은 다른 무엇보다도 현대적이고 합리적인 건물, 현대 건축물 자재인 강철과 콘크리트와 유리, 그리고 조립식 구조물의 구성들을 이용하는 새로운 건축 방법을 알리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들은 대중 또는 최소한 많은 관객에게 다가가는 수단으로서 주로 영화라는 매개체를 이용하였다. 엘라 배그크만 미셸(Ella Bergmann-Michel)과 라즐로 모홀리 나기가 만든 사회 비평적 기록물들 또한 분명히 일반 대중을 위해 만들어졌고 주류 문화계로 진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영화 매체를 통한 사회적 상황의 묘사는 주류문화를 위한 실용적이고 실리적 예술이다. 1970년대에 나타난 영화와 비디오 운동은 이 점을 정확히 견지하고 자신들의 영화를 사회적이고 개혁적 운동의 처분에 맡겼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의 영화들은 1970년대에 만연했던 형식적 문제들을 무시하는 태도는 결코 공유하지는 않았다. 이 영화들은 사회적 문제의 보도와 형식화된 이미지들이 교육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에서 정의되었고 바로 이 관점이 이런 바우하우스의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영화라는 매체로 행해지는 추상적 미디어 아트 실험으로 인해 우리는 최소한 부분적으로 '산업 분야의 예술가'가 유토피아적 이상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들은 대중을 위한 영화들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이 영화들은 문제들의 파편들을 탐구하였고 빛과 공간 디자인으로 현대 디자인의 시각적 현현을 연구하였다. 그러므로 이 영화들은 러시아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가 다음과 같은 말로 옹호했던 전통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대규모 소비를 위한 영화들을 만들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느꼈지만 때때로 우리는 영화들을 낳는 영화들도 필요하다.'
참고 자료:
바우하우스의 데사우(Dessau, 독일 도시) 시기 동안 초청강사들에 의해 열린 행사들 중에는 영화에 관련된 5개의 행사가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자료가 있다. 1929년 6월 10일에 선구적인 러시아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는 자신의 영화 <카메라를 든 사나이(Chelovek s kinoapparatom (Man with a Movie Camera, USSR 1928/29)> 발표하고 이 영화에 대해 토론을 가졌다. 1930년 6월에 한스 리히터가 3일에 걸쳐 '좋은 영화 (Der Gute Film (The Good Film))'이라는 주제 아래 자신의 추상영화와 바이킹 에겔링의 추상영화를 상영하였고 그리고 자신의 그림 두루마리들(picture scrolls)도 전시하였다. 1931년 12월 7일에 뒤셀도르프(Dusseldorf) 출신의 헤얼 펀 하렘(Herr von Halem)은 '국내외의 철골 건축물과 이것의 발전 (Der Stahlskelettbau und seine Entwicklung im In- und Auslande (The Steel Frame Building and its Development at Home and Abroad))'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였고 이때 건설에 관한 이부작 영화(1928년)를 선보였다. 이 영화의 전반은 '뒤셀도르프 철골구조건축 주식회사의 강철 주택 (건축가 한스 슈피글(Hans Spiegel)) (Das Stahlrahmenhaus der Stahlbau GmbH Dusseldorf (Architekt Hans Spiegel) (The Steel Frame House of Stahlbau GmbH Dusseldorf (architect, Hans Spiegel)'이라는 내용이었고 영화의 후반은 '전시회' 기술도시 (드레스덴 1928)'에서 전시된 한 강철 주택의 건설 (건설 매니저: 펠리스 뮐러, 건축가) (Bau eines Stahlrahmenhauses auf der Ausstellung, Die technische Stadt, Dresden 1928 (Bauleitung: Architekt Felix Muller) (Construction of a Steel Frame House at the Exhibition, The Technical City, Dresden 1928 (construction manager: Felix Muller, architect))'이라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었다.
작품정보
구성 I/ 1922
KOMPOSITION I/1922 (COMPOSITION I/1922)
독일 1922/ 1977, 2min, 무성영화, 16mm [원본은 35mm], 컬러
감독, 카메라, 편집, 제작: 베르너 그레프 (Werner Graeff)
초기 바우하우스에서 영화에 몰두한 증거가 있으며 이것은 192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테오 판 두스뷔르흐(Theo van Doesburg)의 제자였던 베르너 그레프는 두 편의 추상영화를 만들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다. 이 작품들은 시간과 자금의 부족으로 실현될 수 없었다. 베르너 그레프는 <구성 I/1922>를 위해 여러 색의 정사각형들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구성 II/1922>는 흑백영화였다. 이 두 작품은 몇 가지 종합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졌다. 이런 축소는 베르너 그레프 영화들의 전형적 방식이다. 베르너 그레프는 1958/59년에 독일 도시 에센(Essen)에 있는 폴크방 산업예술학교(Folkwang-Werkkunstschule)의 학생들과 함께 손수 만든 트릭 카메라 테이블 위에서 흑백영화 <구성 II/1922>를 처음으로 만들 수 있었다. 컬러영화 <구성 I/1922>는 1977년에 처음 완성되었다. 베르너 그레프는 테오 판 두스뷔르흐가 소개한 한스 리히터(Hans Richter)와의 교류를 통해 컬러영화에 대한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1922년에 한스 리히터가 이미 그의 그림 '빨간색과 초록색의 푸가(Fugue in Rot und Grun (Fugue in Red and Green))'를 손으로 색칠된 영화로 만들 계획을 세운 것을 기억하였다.
구성 II/ 1922
KOMPOSITION II/1922 (COMPOSITION II/1922)
독일 1922/ 1959, 2min, 무성영화, 16mm [원본은 35mm], 흑백
감독, 카메라, 편집, 제작: 베르너 그레프 (Werner Graeff)
베르너 한나펠 (Werner Hannapel)과 함께 작업함
베르너 그레프는 1922년에 두 편의 영화를 위한 윤곽을 세워두고 있었다. 이 작품들은 전쟁 후에 처음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의 스승 테오 판 두스뷔르흐는 본인이 편집하는 잡지 'De Stijl' (영어로 'The Style')에 베르너 그레프를 합류시켰다. 이 잡지는 1921년부터 1923년까지 한스 리히터가 쓴 세 편의 글을 특집으로 실었는데 이 글에서 한스 리히터는 미래 시각예술 분야에서 영화라는 매체가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또한 한스 리히터와 바이킹 에겔링 (Viking Eggeling)이 시도한 (오늘날까지 발표되지 않은) 추상적이고 실재적 영화들이 거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에 고무되어 1922년에 베르너 그레프는 자신의 영화 프로젝트들을 발전시켰고 1923년에 'De Stijl'의 다섯 번째 호에 흑백으로 만들 <구성 II/1922>의 개요를 발표하였다. 이때쯤에 그는 이미 한스 리히터를 개인적으로 만난 상태였고 그와 동료이자 친구가 되었다.
색광의 반사 놀이
REFLEKTORISCHE FARBLICHTSPIELE (REFLECTIVE PLAYS OF COLOURED LIGHT)
독일 1922/ 1967, 24'min, (17min에서 발췌), 유성영화, 16mm, 컬러
개념과 복원: 쿠르트 슈베르트페거 (Kurt Schwerdtfeger)
감독, 카메라, 제작: 루돌프 유데스 (Rudolf Judes)
쿠르트 슈베르트페거의 <색광의 반사 놀이>는 다섯 개의 스탠자(stanzas: 4행 이상의 각운이 있는 시구 또는 일정한 기간을 의미함)로 구성되어 있다 ('식물 형상 (Vegetative form),' '바우하우스 1922 (Bauhaus 1922),' '줄무늬와 격자 (Streifen und Gitter (Stripes and grids)),' '붉은 광장 (Rotes Quadrat (Red Square)),' '슐레머에게 경의를 표하며 (Hommage a Schlemmer)'). 쿠르트 슈베르트페거는 기술적 완벽성보다는 생생한 즉흥화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구성주의 요소들을 이용하였으며 여러 색과 형상 들의 크리스탈 같은 순수성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빛의 작품을 만들었다. 쿠르트 슈베르트페거는 1922년에 그림자를 이용한 작품들을 전시하는 랜턴 축제(lantern festival)를 바우하우스에서 시작하였다. 이 행사가 이후에 생겨난 모든 그림자극과 빛과 관련 프로젝트 들의 시초가 되었다. 전쟁 이후 그는 그의 스탠자들을 복원하여 교원양성 학교 Padagogische Hochschule Alfeld에서 제자들과 함께 그것들을 재공연하였다. <색광의 반사 놀이>는 1966년 쿠르트 슈베르트페거가 사망한 직후 루돌프 유데스가 촬영하였다.
회전하는 표면 FLACHEN, PERPELLERISTISCH (SURFACES PERPELLERISTIC)
오리 ENTE (DUCK)
재봉사 NAHERIN (SEAMSTRESS)
독일, 1927-30, 6min, 무성영화, 35mm, 흑백
감독, 카메라, 편집, 제작: 하인리히 브록지퍼 (Heinrich Brocksieper)
하인리히 브록지퍼는 독일 바이마르에 새롭게 설립된 바우하우스에서 1919년부터 공부하기 시작하여 요하네스 이튼 (Johannes Itten)의 기초과정과 기타 다른 수업들을 들었다. 그는 1927년부터 사진에 집중하기 시작하여 수많은 실험적 영화를 만들었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작품 대부분이 세계대전 당시 공습에 의해 파괴되었고 세 편의 영화만이 남아 있다. <회전하는 표면>(독일 1930, 3min)은 검정색 바탕에 3개의 사다리꼴이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것을 보여준다. 이 효과는 사람의 망막에 잔상을 남긴다. 애니메이션 <오리>(독일 1930, 1min)에서는 단편적 이미지들이 화면에 계속 남아 있는데 디졸브 기법(dissolve)으로 하얀 화면에 등장한 병 한 개가 오리로 변형된다. 여기서 이 영화가 초점을 두는 것은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로 매끄럽게 변형되는 데 있는 것 같다. <재봉사>(독일 1930, 2min)는 검은색 배경 위에 하얀색 가위 한 자루, 단추들, 안전핀들, 실을 보여준다. 이 사물들은 분명히 포토그램(photogram)으로서 촬영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카메라 없이 사물들이 셀룰로이드 위에 직접 놓여져 빛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사물들은 무리로 이루어져 있고, 하인리히 브록지퍼에 의하면 이것들은 전투, 와해, 그리고 개혁을 수행한다.
한 작품으로부터 온 20장의 그림들
ZWANZIG BILDER AUS DEM LEBEN EINER KOMPOSITION
(TWENTY PICTURES FROM THE LIFE OF A COMPOSITION))
독일 1927-28 / 1972, 2min, 무성영화, 35mm, 컬러
감독, 편집, 제작: 쿠르트 크란츠 (Kurt Kranz)
애니메이션: 로베르트 다롤 (Robert Darroll)
쿠르트 크란츠는 바우하우스에 입학하기 전 17세에 이미 <한 작품으로부터 온 20장의 그림들>의 초안들을 그려놓았다. 이 영화는 수성물감과 템페라로 그려진 일련의 그림들로 구성된 하나의 구상을 보여주며 이 그림들은 세로 방향의 그림책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독일 도시 빌레펠트(Bielefeld)에서 바우하우스 교수 라즐로 모홀리 나기의 강의를 들은 후 석판 인쇄공이었던 쿠르트 크란츠는 바우하우스에 입학하여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요세프 앨버스 (Josef Albers), 폴 클레(Paul Klee), 바실리 칸딘스키 (Wasily Kandinsky), 요스트 슈미트(Joost Schmidt), 발터 페터한스 (Walter Peterhans)의 수업을 들었다. 크루트 크란츠는 15살 때에 이미 스케치북에 여러 그림들을 그렸고 그 그림들에 나타난 그의 사고 방식은 그의 창의적 작품 활동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 시기 동안 추상적 모티브를 지닌 영화들에 쓰일 여러 아이디어들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하지만 예술과 교수직을 그만둔 후, 독일 도시 함부르크(Hamburg)에서 그의 제자 로베르트 다롤의 도움을 받으며 처음으로 그것들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쿠르트 크란츠의 모든 영화들에서는 단순한 크로스 페이드(cross fade) 과정이 수채화나 드로잉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에 일련의 이미지들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실현시키는 것이 다소 단순해 보이고 영화 같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쿠르트 크란츠의 영화는 영화란 매체가 어떻게 1920년대에 그림의 지평을 변화시켰는지 잘 드러내준다.
검은색: 흰색/흰색: 검은색
SCHWARZ: WEISS/WEISS: SCHWARZ (BLACK: WHITE/WHITE: BLACK)
독일 1928-1929 / 1972, 2min, 무성영화, 35mm, 흑백
감독, 편집, 제작: 쿠르트 크란츠 (Kurt Kranz)
애니메이션: 로베르트 다롤 (Robert Darroll)
쿠르트 크란츠는 바우하우스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세로 방향의 40장의 먹물 그림으로 이루어진 '검은색: 흰색/흰색: 검은색'의 초본을 그렸다. 그에 의하면 '검은색: 흰색/흰색: 검은색'은 스탠자(stanza)의 형식에 따라 만들어졌고 하나의 제대로 된 이야기를 전달한다. “흰색의 원들이 검은색 평면 쪽으로 수직으로 밀고 들어간다. 그러면 원들의 이동 자국은 여러 다른 크기의 기둥들을 만들어낸다. (…) 이때 예상치 못한 검은색과 흰색의 쐐기 모양 형상들이 나타나 기둥들의 세로 질서를 흩뜨린다. 이후 흰색 원들의 무리는 그 공간을 차지한다. 갑자기 14페이지에서 지배적인 흰색이 검은색 변곡점들의 중심이 된다. 이 페이지와 다음 페이지 사이에 영화감독들이 줌(zoom)이라고 부르는 기술이 사용된다.” (베르너 호프만 (Werner Hofmann)) 이 영화는 1972년이 되어서야 실현되었다.
영웅적인 화살
DER HEROISCHE PFEIL (THE HEROIC ARROW)
독일 1930/1972, 8min, 무성영화, 35mm, 흑백
감독, 편집, 제작: 쿠르트 크란츠 (Kurt Kranz)
애니메이션: 로베르트 다롤 (Robert Darroll)
<영웅적인 화살>은 쿠르트 크란츠가 화면을 가로 방향으로 만든 그의 첫 번째 영화이다. 이 작품은 먹으로 그려진 60장의 그림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바우하우스 포스터들에 항상 등장하는 화살 모티브에 대한 반어적 경의로서도 보여질 수 있다. 쿠르트 크란츠는 바우하우스 교수 폴 클레(Paul Klee)의 “교육 지침서(Pedagogical sketchbook)”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영화는 끊임없이 진보하기 위해 고투하는 '영웅'으로서의 '화살' 이미지를 이용하는데, 확실한 하나의 이야기적 성격을 지니며 모든 종류의 장애에 맞서 자신을 극복하고 주장하는 내용을 다룬다. '영웅'이 화살고리들이 널려 있는 곳을 통과할 때, 이 영웅은 이른바 '날카로운 적수'에 의해 이등분된다. 과도한 축소와 확장은 하나의 계속 이어진 줄 (화살의 영혼)로 대체되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무한성의 상징으로서의 원을 형성한다. 이 영화는 1972년이 되어서야 실현되었다.
레포렐로 - 컬러영화의 초본
LEPORELLO - ENTWURF FUR EINEN FARBFILM
(LEPORELLO - DRAFT FOR A COLOUR FILM)
독일 1930-1931 / 1972, 5min, 무성영화, 35mm, 컬러
감독, 편집, 제작: 쿠르트 크란츠 (Kurt Kranz)
애니메이션: 로베르트 다롤 (Robert Darroll)
<레포렐로 - 컬러영화의 초본>은 앞서 언급한 영화들보다 더 자유롭고 기하학적이다. 이 영화는 3.52 미터 길이 레포렐로(아코디언처럼 접어진 모양의 인쇄물)에 수채화, 템페라, 컬러잉크로 그려진 것으로 32개의 드로잉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이 작품은 빨간색과 보라색과 파란색 원들 그리고 달팽이 모양 같은 형상들을 보여주는데 그 중 일부는 벨트에 의해 묶인 것처럼 보인다. “건축도면을 연상시키는 형상들은 증가하는 규칙성을 적용하며 그것들 자체를 나눈다. 빨간색과 노란색의 막대기들은 교차하며 서로에게 스며든다. 빛의 수직면이 블라인드(빛 가리개)처럼 회색 평면을 지워 나간다. 막대기들의 모티브가 나타난다. 두 개의 빛 기둥이 형성되고 이것들 주위에 막대기들이 끌리듯 세워진다. 막대기들이 처음에 평행선으로 비스듬히 그려지고 다음에 교차선으로 그려지며 모아지는 동안, 축적된 빛의 형상들이 하나가 된다. 확장하는 빛의 형상이 화면을 채운다.” (케르버 (Kerbert)) 이 개념은 1972년이 되어서야 실현될 수 있었다.
기하학적 주제에 관한 변형들
VARIATIONEN UBER EIN GEOMETRISCHES THEMA
(VARIATIONS ON A GEOMETRIC THEME)
독일 1955/1972, 22min, 무성영화, 35mm, 흑백
감독, 편집, 제작: 쿠르트 크란츠 (Kurt Kranz)
애니메이션: 로베르트 다롤 (Robert Darroll)
<기하학적 주제에 관한 변형들>은 생물학적 원형과 기하학적 원형 사이에 그리고 자연과 예술 사이에 발생하는 논란적 관계를 다룬다. 쿠르트 크란츠는 변형을 주로 상상력의 개입을 통해 정의한다. “상상력이 만들어낸 변화가 만들어지는 순간 어떤 양상보다는 어떤 변형이 존재하게 된다.” 이것은 1972년에 처음으로 실현되었다.
리듬 21
RHYTHMUS 21 (RHYTHM 21)
독일 1921/1923, 4min, 무성영화, 35mm, 흑백
감독, 편집, 제작: 한스 리히터(Hans Richter)
애니메이션: 스벤트 놀단 (Svend Noldan)
한스 리히터의 <리듬 21>에서는 흰색, 회색, 검정색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크기의 사각형들이 조절된 속도와 규칙적인 리듬에 따라 움직인다. “한스 리히터의 첫 번째 영화에 등장하는 밝고 어두운 정사각형과 직사각형 들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 (Kasimir Malewitsch)와 더 스테일(De-Stijl (The Style) 1917년에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예술운동)과는 분명히 대조되는 점).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 영화는 새로운 물질인 빛이 뿜어내는 긴장과 대조의 비율을 전달한다.” (비올라 키프너 (Viola Kiefner)). 한스 리히터는 1909년에 바이마르 국립예술대학교 (kunsthochschule Weimar)에서 자연주의 옹호자인 게리 멜처스(Gary Melchers)의 상급반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 어떤 면에서 이 학교는 바우하우스의 전신이었다. 바우하우스 감독 하네스 마이어(Hannes Meyer)는 1930년에 독일 도시 데사우의 시장에서 보낸 편지에서 바우하우스의 초청강사로서 영화감독 한스 리히터를 지명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밝히었다. 한스 리히터는 1930년 초여름 어느 3일 동안 행해진 행사에서 아방가르드한 영화들를 상영하고 자신의 초기 그림 두루마리들(picture scrolls)을 전시하였다. 이때 상영된 작품들에는 <리듬 21 (GER 1921/1923, 4')>과 <리듬 23 (GER 1923/1925, 4')> 그리고 그의 친구 바이킹 에겔링의 <대각선 교향곡 (독일 1921/1924, 3')>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바실리 칸딘스키가 바이킹 에겔링의 영화를 보았을 때 “그가 내 것을 베꼈어!”라고 외쳤다고 한다.
리듬 23
RHYTHMUS 23 (RHYTHM 23)
독일 1923/1925, 4min, 무성영화, 35mm, 흑백
감독, 편집, 제작: 한스 리히터 (Hans Richter)
애니메이션: 스벤트 놀단 (Svend Noldan)
<리듬 23>은 처음에 화면에 대각선이 나타나긴 하지만 평면들을 바탕으로 한 선들의 놀이로서 묘사되었다. “영화 초반에 두 개의 하얀 사각형이 하나의 큰 사각형으로 합쳐질 때까지 검정색을 배경으로 서로를 향해 축대칭으로 움직인다. 그 다음 이 과정이 뒤바뀌어 그 큰 사각형이 점점 작아지며 두 개의 사각형으로 나누어진다. 그 다음 이 작은 사각형들 각각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길고 좁은 직사각형과 마주보게 놓여진다. 대칭은 영화의 나머지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스듬한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의 연속적 병렬은 영화의 마지막에 네거티브로 등장한다. 영화 중간 부분에 비스듬히 기울어진 평면들의 방향이 자주 바뀐다.” (베르너 호프만 (Werner Hofmann))
대각선 교향곡
SYMPHONIE DIAGONALE (DIAGONAL SYMPHONY)
독일 1921-1924/25, 7', 무성영화, 35mm, 흑백
감독, 편집, 제작, 애니메이션: 바이킹 에겔링 (Viking Eggeling)
드로잉: 에나 니메이어 (Erna Niemeyer) 외 여러 사람들
1919년부터 한스 리히터와 바이킹 에겔링은 그림 두루마리(picture scrolls) 위의 추상적 요소들을가지고 실험을 하였다. 첫 번째 실망스런 도전 이후 이 두 예술가는 개별 그림 두루마리 드로잉들이 직선적 촬영 과정으로는, 움직이는 시퀸스로 전환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스웨덴 출신 예술가 바이킹 에겔링은 1921년 여름부터 <대각선 교향곡>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는 초기에 촬영될 여러 형상들을 종이에서 오려낸 후 은박지에 옮겨 오려낸 다음 미묘한 음악적 패턴에 따라 이것들을 나열하였다. 한 비평가는 1924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이제 영화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바이킹 에겔링은 영화의 원리를 파악하였다 (자연을 모방한 어떤 것에서 추출되고 그리고 전적으로 독립적인 빛과 움직임). 그는 연속적인 움직임들의 리듬을 단순한 형태로 바꾸었다. 입체 그림이 자연의 사진과 관련 있는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이것은 움직이는 그림과 관련이 있다.” 바이킹 에겔링은 영화 제작이 마무리되었을 때에는 이미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 있었다. 그의 인생의 동반자이자 바우하우스 학생이었던 에나 니메이어가 '대각선 교향곡2015-02-05'의 드로잉들을 완성하였다. 이 영화는 1925년 5월 3일에 발표되었지만 바이킹 에겔링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1925년 5월 19일에 사망하였다.
글 : 바우하우스 데사우 재단 (STIFTUNG BAUHAUS DESSAU (BAUHAUS DESSAU FOUNDATION))
번역 : MMCA필름앤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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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시간
월요일 10:00 - 18:00
화요일 10:00 - 18:00
수요일 10:00 - 21:00
목요일 10:00 - 18:00
금요일 10:00 - 18:00
토요일 10:00 - 21:00
일요일 10:00 - 18:00
관람료 서울관 관람권 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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