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탕라움
2022년 12월 1일 ~ 2022년 12월 18일
장래희망: 분해자
「유령의 풍경」을 보니 아직 인간이 멸종하기 전인가보다. 2080년을 상상한 박한나는 상온을 섭씨 47도까지, 해수면을 1.1미터나 높여두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환경저널리스트 마크 라이너스는 기온 상승과 직결된 고대 바이러스의 위험성에 대해 말하며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했다. 인류가 맞은 기후 위기의 가장 큰 문제는 대항할 수 있는 전략적 방법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박한나의 영상에서 폭염특보가 발령된 걸 보니 대재난 와중에도 정치와 미디어는 작동되고 있나 보다. 생태계 최고 권력자를 자처하는 호모사피엔스의 생명력은 참으로 질기구나. ‘유리돔 232’ 안의 인류는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부실해진 유리막을 수리하는 업체는 자금난에 허덕이고, 인류는 자본을 만들어낼 노동자 생산 즉 종족 번식과 생존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는 한 자본주의의 한계로 멸망하게 될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다’라는 거대한 불안감을 박한나는 조악한 파운드 푸티지 픽션,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 익명 감상자들의 자연 예찬으로 정확하게 보여준다.
위기를 감지한 인간의 초조함을 잠시나마 잠식하는 건 표류하는 쓰레기 미학이다. 예술가의 감각으로 전하는 쓰레기들의 표류 장면은 기후 위기를 인지하게 하는 트리거(심리적 방아쇠)다. 박한나의 영상을 보고 있으면 조악미에 취해버린다. 우선 박한나의 편집방식은 불량하다. 실제는 낮게 페이크는 위대하게 배치한다. 박한나는 어떤 영상이든 수집해서 저장고에 한참을 쟁여두고 편집하는 순간의 감각에 따라 꺼내 쓴다. 영상을 완벽하게 설계하기보다는 에세이 쓰듯이 하는데 이는 “이건 10년 전에 찍은 거라 어디에서 찍은 줄 모르겠다.”, “이것은 아마 저것과 같은 날 찍었던 것 같다.”라는 작가의 말에서 눈치챌 수 있다. 샷 중 하나는 인공적인 현수막이 너울대는데 마치 바람이 세게 부는 절벽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가공해 낸다. 그녀가 제시하는 실제의 풍경은 영상의 배경이 되는 일개 패턴으로 자연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정도로만 쓰인다. 줌인, 줌아웃. ‘보름달이 아름답다’라는 내레이션에 쩍쩍 갈라진 흙을 비추거나 (달 표면은 분명 저렇지 않잖아?) 인간이 구사하는 경이의 말들이 얼마나 조악하게 흩어져 버리는지 포착한다.
환경에 대한 인간의 역설은 ‘산소와 영양 섭취가 필요 없는 자의 증식을 꿈꾸게 한다’는 작가의 허무맹랑하고 절박한 주장으로부터 상승한다. 작가는 ‘너무 아름답다.’, ‘나의 근원이다.’, ‘따로 떼어두고 생각할 수 없다.’는 말에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맞아?’라고 날카롭게 되묻는다. 영상이 보여주는 날카로운 질문은 그녀의 실제 모습과 반대된다. 서글서글한 모습을 하고 환경재난이 너무 무섭다 말하는 작가는 사실 익명의 목소리로 되돌리기 어려운 자기 실수에 대해 반성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새 한 마리가 까맣게 죽어서 잔파도에 일렁이는데 부질없게도 투박한 모자이크가 새의 초상권을 단단히 지킨다. 새로부터 영상의 스토리는 하강한다. 익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이중적인 태도를 인식하기 시작한 걸까? 수조 안, 문어의 굴곡지고 흐물거리는 몸뚱이는 두꺼운 아크릴 벽면에 닿은 만큼 납작해진다. 문어를 찍고 있는 사람이 지금 여기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는 그러니까 두꺼운 아크릴 벽면에서 나와 ‘유리돔 232’에 자발적으로 갇힌 인류를 불 보듯 한다.
영상이 담고 있는 작가의 직관적인 감각은 그녀가 제주로 이사하고 마주한 오염과 위기감에 대한 압박이 만들어냈다. 이제 바다속 생물은 13종만 남았다. 바다속 모자반 군락-해양 숲이 기온상승에 의해 모두 녹아 없어지면 생물종은 급격히 감소한다고 한다. 바다생물들은 그들의 삶의 터전을 아예 기억할 수 없게 됐는지 모른다. ‘자주 꺼내 보는 영상 기록물 “풍경132.mp4”’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나뭇잎가지 사이로 번지는 햇살을 찍은 것인데 작가는 2080년의 세상에서 평행한 우주를 상상한 결과로 제시한다. 그러면 도대체 2080년은 어떤 모습이라는 것인가. ‘가상 세계의 어떤 불편함’이 일어나는 이유는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픈 현실’ 때문일 테다. 질주하는 터널 위에 놓인 가상의 나무와 가상의 윤슬은 인류를 잠식한 거대한 거짓임이 틀림없다. 작가는 내레이션을 덤덤하게 읽으며 유령이 되었다. 얼마 안 가 신체가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반드시 생산자, 소비자의 틀을 깨고 나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분해자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하는, 솔직히 말하면 분해자를 꿈꿀 수밖에 없는 딱한 처지가 된 인간 말이다. 먹거리, 대기오염, 전쟁, 질병, 정치, 경제의 한도 초과 직전에 놓인 지금 여기의 우리는 이미 유령이 된 것일까. 작가는 안나 칭의 말을 빌린다. “여기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세계를 근본적으로 상상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는 절망은 쉽지만, 희망은 어렵다는 한 사회학자의 말을 대변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유령이 아닌 분해자가 될 수 있을까.
다음 영상을 보자. 신경을 건드리는 전자음으로 거창하게 포문을 여는 「새로운 지층」은 한라산 폭발에 의해 용암이 흘러내렸다는 상상과 함께 시작된다. 작가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지층은 기원을 알 수 없는 변형된 플라스틱이다. 침식되고 부서지고 뭉쳐진 플라스틱은 작가에 의해 새롭게 호명되기도 한다. 일명 플라바(양쿠라) 혹은 뉴락(장한나)은 생명을 부여받고 스스로 ‘그들’의 업을 수행한다. 이에 반해 박한나는 호명하기를 내려두고 작가 스스로가 ‘그들’이 되어본다. 일종의 변신술로 지금 여기의 나와 거리를 두는. 호기심에 바짝 다가서서 언젠가 나를 가해할지 모르는 낯선 것들의 입장을 자처한다. 물속에서 하늘거리는 티슈, 무게감 있게 가라앉은 타이어, 물속 모래에 파묻힌 세탁 바구니, 그물을 묶는 끈 뭉치, 올이 풀려버린 포댓자루, 투명하지만 찢어진 비닐 등이 바닷가에서 표류하거나 녹조와 같이 뒤엉켜버렸다. 어디론가 나아가지 못하고 뒤엉켜서 표류하는 모습이 서로 강력하지만 유연하게 의지하는 모습이다.
작가는 ‘그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얻은 여행의 흔적을 무덤덤하게 보여준다. “잘게 부서진 플라스틱 알갱이가 제일 문제에요”라고 말하는 작가는 ‘그들은 내 기억들, 상처들’이라는 자막을 달아놓았다. 공포감을 조성하는 배경음악이 깔려있지만, 왠지 모를 아름다움이 나를 괴롭힌다. ‘그들’ 자체가 미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든지 ‘그들’을 아름답게 보고 쓰레기와 공생할 수 있는 최첨단 기술을 마련하자 라든지 하는 말이 아니다. 무서운 아름다움, 위험한 아름다움으로 적어낸 경고문구다. 미역 가발을 뒤집어쓴 듯한 부표는 어떤 연유에서 인지 꿈틀댄다. 왜 자꾸만 내 눈은 “다른 무엇이 되어가는”, “우리의 목을 졸라오는 수동적 동거자”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걸까. 편의를 향한 인간의 모든 행위는 박한나의 보여주기 방식처럼 매력적이고 벗어나기 어렵다. 「새로운 지층」은 다시 한번 신경을 자극하는 전자음 배경으로 삼아 더욱 강력해질 ‘그들’에게 맞서야 하는 부족의 필요를 제고하는 마굴리스의 선언으로 마무리된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공동체다.” 자, 이제 지금 여기의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더 끈질기고 악랄해질 대자연 앞에 새로운 공동체는 어떻게 자신을 호명해야 하나. 한동안 어떤 이데올로기에 취해 있어야 하나. 어떻게 신체를 보전할 것인가. 어떻게 희망을 꿈꿀 텐가. (글. 이지혜)
참여작가: 박한나
글: 이지혜
새활용현수막 제작: 박한나, 이영희, 최수경, 양지은
피쳐링 비디오: Yen Ee Choo, Trevor Poh, YiYing Huang
후원: 제주문화예술재단, 제주특별자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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