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스페이스3
2016년 11월 16일 ~ 2016년 11월 28일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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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지
“오직 두 길이 있을 뿐이다.
성인의 길과 비극적 예술가의 길이. 양자는 실존의 무상함에 관한 분명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세계관에 어떤 균열도 느끼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계속 살아야 한다는 데 대한 구토가 창조의 수단으로 지각된다.”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과 일상이 만들어내는 권태로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장기적 혹은 단기적인 목표를 세워 끊임없는 동기부여를 하며 살아가게 한다. 뚜렷하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방향을 설정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우연들이 작용하는 삶 속에서 ‘나’의 의지나 목표는 힘을 잃는다. 처음 세운 방향은 계속해서 수정되고 때로는 목표를 잃기도 하며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게 한다. 나의 궤도는 계속해서 수정되고 또 수정되며 힘이 없다. 삶의 가치와 목표의 부재로 인해 모든것이 허무하고 지루하다고 느끼는 나는 ‘모든것은 똑같다. ‘잘 모르겠다.’ 또는 ‘그저그렇다’는 심드렁한 태도로 삶을 살아간다. 살아 있어서 살아가고 있지만, 내일은 고사하고 바로 눈을 깜빡 하는 다음 순간조차 확신할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는 막연한 불안감과 내일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만들고, 매일 똑같은 일상의 무게는 나를 짓눌러 새로운것, 자극적인것, 순간에 집착하게 만든다. 지금 이 순간의 유희와 쾌락,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 그러나 아주 잠깐의 유희나 쾌락에 즐겁다가도 그건 오히려 그렇지 않은 시간들을 더욱 지루하게 만들 뿐이다. 결국 아무것도 다를것이 없다라는 허탈한 마음이 배가 되어 내게 돌아온다. 이제 이런 감정의 되풀이는 더이상 흥미롭지 않다. 나의 작업은 이런 시들한 일상의 반영이며, 시들한 일상을 잊기 위한 수단이다.

김해다
산이 하나 있다. 산의 동편에 사는 사람들은 늘 그 산에서 해가 지는 것을 보아왔기에 그 산을 서산이라 부를 것이고, 서편에 사는 사람들은 그 산에서 날마다 해가 뜨는 것을 보아왔기에 동산이라 부를 것이다. 이렇게 산은 산을 바라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정의된다. 만약 동쪽 사람과 서쪽 사람이 만나 산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될까? 같은 산을 두고 서로 서산이라거나 동산이라고 우길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하늘에 둥둥 떠서 멀찍이 그 산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산은 서산도 동산도 아닌 그냥 하나의 산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마치 신과 같이 저 먼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늘 어느 한 지점을 점유하여서만 존재할 수 있다. 반드시 어느 한 위치에 있을 것. 그것이 우리가 일상을 영위하는 제1조건이며, 늘 전지적 시점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작가는 우리 각자가 저 산이 동산이라고, 혹은 서산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여 인식론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을 지닌 인간이 이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생동하는 주체’로 자신을 탈바꿈하려는 시도를 한다. ‘생동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기 자신이 인식하는 세계를 완전체가 아닌 끊임 없이 변화하는 변형체로서 여기며 완고한 확신과 판단, 절대를 상정하지 않는 자이다. 항상 자신의 인식 영역 바깥에 대하여 열려 있으며, 변화라는 파도에 민감하게 자신의 온 몸과 마음을 실을 수 있는 훌륭한 서퍼와 같이 산 저편에 살고 있는 사람은 이 산을 다르게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서산이었던 산을 동산으로, 동산이었던 산을 서산으로 부를 수 있는 유연한 태도를 지닌 주체, 이것이 바로 작가가 이야기하는 ‘생동하는 주체’이다.
작가는 이러한 생각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작업물에 일상적 오브제를 택하여 색으로 덮고, 오브제의 시공간적 상황을 변화시키거나 오브제 조합물을 해체함으로써 각 오브제의 본래 색깔을 드러내 오브제가 지닌 사물성을 의도적으로 찾아내는 방법을 사용한다.
<마스킹테이프 드로잉>, <각목, 못, 볼트, 선풍기커퍼, 전깃줄, 타이어, 파이프커버, 판자>는 오브제를 조합-해체-재조합하는 과정을 통해 그것의 경직성을 깨뜨리는 일종의 생각실험이다. 해체되었던 오브제들은 색이 칠해진 부분과 색이 칠해지지 않은 부분을 모두 드러내며 재조합된다. 이 때의 형상에서는 이전의 한 가지 색으로 통일되었던 형상에서 느껴졌던 정적을 발견할 수 없다. 못의 머리 부분만 색이 묻어 있는 것을 보아 어딘가에 박혀 있던 못을 뽑아서 다르게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거나, 끈의 부분 부분만 색이 묻어 있는 것을 보아 매듭지어져 있던 끈을 풀어서 배치한 것으로 보이는 등 형상에서 발견되는 재조합의 흔적들은 이전의 형상이 어떠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무언가 ‘변화되었다’는 예상을 가능케 한다. 이 변화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는 오브제 조합물은 더 이상 정체되어 있지 않다. 한 번 변화를 거쳐온 이 조합물은 언제든지 또 해체되고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제하게 됨으로써 한가지 색으로 통일되었을 당시의 경직성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앞선 작업이 작가의 사고과정을 분석적으로 다룬 일종의 생각실험과 같은 작업이었다면, <할머니 모양 할머니>는 그 이후의 삶의 태도에 관하여 작가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촉발된 작업이다.
2년 전 할머니의 죽음을 겪은 작가는 작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할머니라는 한 인간의 대상성-한 사람의 죽음과 거기에 투여된 슬픔이라는 감정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작업에 등장하는 화분은 작가의 돌아가신 친할머니의 유품이다. 작가는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중 조화가 꽂혀 있는 화분에 매력을 느꼈고 그것을 종이에 옮겨 그리기 시작했다. 할머니를 떠올리는 물건을 그리는 행위는 할머니와의 각별했던 기억을 기리는 일종의 의식(ritual)을 넘어 ‘화분이라는 실재’와 실재를 평면에 옮겨 그리는 과정에서 최대한 닮게 그리려 ‘애씀’, 그리고 ‘결과물과 실재 사이의 간극’이라는 세 지점간의 긴장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갔다.
작가와 같은 차원에 놓여진 화분이라는 사물은 작가에 의해 해석되어져 2차원의 평면에 재현된다. 마그리트의 <ceci n’est pas une pipe>처럼 종이 위 화분은 화분모양이지만 화분이 아니다. 아무리 닮게 그리려 애를 써도 종이 위 화분은 화분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할머니라는 대상과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던 각자들의 심상 사이의 간극을 떠오르게 한다. 그렇다면 아무리 애를 써도 절대 동일할 수 없는 대상을 그리는 주체의 행위는 쓸모없는가. 작가는 오히려 이러한 ‘애씀’을 자신의 유한함을 받아들인 생동하는 주체의 솔직함이라고 생각한다. 종이 위에 그려진 화분의 모양은 작가가 지닌 드로잉 기술 뿐만 아니라 그날 그날 주어진 재료나 작가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서도 다르게 그려진다. 작가는 오히려 드로잉의 정확성, 색감, 필력과는 관계 없이 다양함 그 자체로 가지는 의미에 주목하는 것이다.
한편 화분에 꽂혀 있는 꽃은 아이러니하게도 ‘조화’로써 꽃모양을 하였지만 꽃은 아닌 어떤 것이다. 꽃모양의 어떤 것을 담은 화분, 그리고 그 화분 모양 종이는 작품의 제목 <할머니 모양 할머니>처럼 만날 수 없는 주체와 대상의 거리, 붙잡을 수 없는 실재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실재 그 자체의 허구성이 혼합된 카오스 속에서 유한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전수만
특정한 존재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완전한 이해에 가까워지려는 노력만 있을 뿐, 불행하게도 완전한 이해는 허구이다. 여기서의 ‘이해’란 단편적인 정보의 습득으로서의 이해보다는 온 감각과 상황을 동원 하에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을 뜻한다. 이해의 종류나 방법은 수도 없이 다양하고 이런 다양성들의 현재의 세계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이해의 완전성에 조금 더 다가가기 위한 노력과 그로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완전성에 주목을 했다.
『wheel』은 가족 간의 이해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에서 출발한 작업이다. 우리 가족은 어느 책에서 묘사하는 듯한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이다. 서로 배려하고 위하며 늘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정이라고 생각하나 그럼에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 할 수는 없으며 은연중에 타 구성원을 타자화 하기도 한다. 나는 이를 특정 구성원이 목적지를 공유해야하는 자동차라는 공간에서 풀어보려 했다.
본 작업은 2채널 영상으로 이루어지며, 작은 디스플레이에서는 집에서 자취방까지 가는 동안의 가족 간의 일상적 대화 중 일부가 재생되고, 큰 디스플레이에서는 그 여정동안의 외부 공간이 원형으로 돌아가는 영상이 재생된다. 외부 영상에서의 시공간은 주행 중인 바퀴에 소형 카메라를 달아 촬영함으로써 화려하고 매력적으로 왜곡되나, 때로는 현기증을 유발시킨다. 이를 통해 내가 부모님을 이해하는 방향 뿐만 아니라, ‘함께 있던 집’에서 출발하여 ‘내가 떨어져 나가게 된 도시’로 진입하는 감정적 시공간 또한 보이려 했다.
출처 - 갤러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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