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2026년 8월 11일 ~ 2026년 9월 2일
여름이 절정을 향하고 있습니다. 더위를 견디는 일이 모든 존재의 안녕과 직결된 세계에서 어쩌다 보니 우리는 여행의 설렘보다 떠나도 될지를 먼저 묻곤 합니다. 이러한 때에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는 여행지에서 하루를 거니듯 영화를 즐기는 일정으로 여름 기획전을 준비했습니다. ‘서머 스페셜 2026’은 영화가 품어 온 로맨틱한 충동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어디론가 편지를 쓰고, 박물관이나 해변을 오가고, 뜻밖에 흘러든 곳에서 오후를 보내며, 길어지는 밤을 떠도는 여정입니다.
우선, 아침의 여행지에서 편지 한 통을 써 보는 시간을 가지듯 첫 번째 섹션인 ‘편지, 고마워’의 작품들을 느긋이 둘러보시길 바랍니다. 영화는 늘 서간체로 쓰여 왔음을 환기하는 작품들이 모였습니다. 지금은 부재하더라도 언젠가 그 서신이 도달할 수신인을 향한 말 걸기로서의 영화들입니다. <미지의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에서 뒤늦게 애수에 젖는 빈의 피아니스트는 평생 그를 사랑했으나 매번 알아채지 못한 여인의 편지를 받아 든 순간 그러한 수신인이 됩니다. 물론 모든 영화-편지가 시차가 낳은 답장 없는 고백인 것은 아니며, 요나스 메카스와 호세 루이스 게린은 서로를 위해 비디오 서신을 교환한 적이 있습니다.
메카스가 집대성한 일기 영화의 위대한 예로 칭송되어 온 <월든>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혹은 1960년대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언더그라운드 영화를 통해 함께 일궈 낸 친구들에게 헌사된, 16mm에 담긴 편지입니다. 메카스의 “삶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영화 만들기를 영감으로 꼽았던 게린이 <그림자 열차>에서 1930년 노르망디의 한 아마추어 영화인이 남긴 필름을 되감고 그 흔적을 더듬을 때, 그의 영화는 믿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고 매혹적인 과거로부터 받아 든 편지가 됩니다. 알랭 타네의 <백색 도시>는 리스본에 눌러앉은 선원이 카메라로 찍은 도시 화면을 편지와 함께 아내에게 부치는 이야기로, 글과 이미지라는 두 겹의 서간체가 영화가 되는 순간을 보여 줍니다.
제임스 L. 브룩스의 로맨틱 코미디 <스팽글리시>는 딸의 대학 지원 에세이 편지의 형식을 빌려 엄마인 한 여성의 이뤄지지 못한 이끌림에 대한 섬세한 초상을 그립니다. 언어와 계급의 장벽, 유부남이기까지 한 상대라는 설정은 ― 유운성 평론가의 말을 빌리면 “동시대 관객에게 불신을 불러일으키는” ― 시대착오의 체취를 물씬 풍기지만, 이러한 경계 가로지르기의 로맨틱함은 어떠한 면에서 에릭 보들레르 감독이 국가로 승인받지 못한 압하지야로 편지를 부치고, 놀랍게도 답장을 받는 과정을 담은 <막스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어집니다. 존재하지 않는 주소로 부친 편지가 끝내 닿는다는 이 우편적 사건이 수년간 이어지는 동안, 영화는 국가와 정체성, 불확실한 경계의 의미를 새로운 방식으로 묻습니다. 마지막으로 조 로울러와 크리스틴 몰로이의 <미래 시제>는 1980년대 런던으로 이주한 아일랜드 출신 감독 부부가 고국으로의 귀환에 관해 만든 에세이 영화입니다. 정박하지 못하는 이들의 지적 유랑과 그 되뇌임이 위트와 유머를 간직한 편지에 담깁니다.
두 번째 섹션 ‘박물관 기행 X 어긋난 오후’는 박물관, 산책, 서핑, 유랑, 바캉스 등 가장 포괄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여행에 관한 영화들을 만납니다. 장 르누아르의 아름다운 미완성 영화이자 바캉스에 관한 하나의 원형적인 작품이라 할 <시골에서의 하루>는, 기 질이 연인들의 어긋난 시간과 바닷가에서의 저무는 여름을 그린 <해변의 사랑>과 함께 상영됩니다. 여름철 서핑 영화의 걸출한 대표작 <파도를 가르며>는 캘리포니아의 세 친구가 1960년대를 가로지르며 베트남 전쟁까지 통과하는 청춘의 서사시를 그립니다. 그런가 하면 라울 루이즈의 <도둑맞은 그림에 대한 가설>과 젬 코헨의 <뮤지엄 아워스>는 박물관을 산책해야 할 이유를 증명하는 매혹적인 수작들입니다. 루이즈는 타블로 비방(tableau vivant) 재연을 통해 미스터리한 그림 시리즈 속에 감춰진 연결 고리를 추리하면서 영화 보기와 그림 보기의 해석학에 몰두하는 반면, 코헨은 빈 미술사 박물관의 경비원과 방문객 여성이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 앞에서 맺어 가는 우정을 담습니다.
여행으로서의 영화는 우연히 닿은 낯선 곳에 마음을 붙들리거나 멀리 떨어진 다른 곳을 염원하는 방랑벽의 초상이기도 합니다. <로컬 히어로>는 스코틀랜드의 어촌에 파견된 미국 석유 회사 직원이 마을의 리듬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연 앞에 경외를 느끼는 이야기로, 제자리를 잃는 감각이 때로는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절제되고 달콤씁쓸한 걸작입니다. <또 다른 고향>은 전후 독일의 감상적 장르인 ‘고향 영화(Heimatfilm)’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하여 독일 근현대사의 궤적을 그려 온 뉴 저먼 시네마의 노장 에드가 라이츠의 세계로 안내할 관문입니다. 이 작품은 총 30부작에 이르는 그의 독보적인 <고향> 연작의 프리퀄에 해당합니다. 1840년대 브라질행을 꿈꾸는 청년 야콥이 가 본 적 없는 땅의 언어를 책으로 익히는 동안 떠남을 상상하는 일에 바쳐진 231분의 웅장한 시간이 흐릅니다.
이제 마지막 섹션 ‘밤은 길어!’에서는 밤을 찾아 떠도는 여정에 나설 차례입니다. ‘루비치 터치’의 우아하고 경쾌한 속임수의 밤이 돋보이는 <낙원에서의 곤경>이 그 시작점입니다. 한없이 길어지는 밤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앙드레와의 저녁식사>와 <메트로폴리탄>에서는 각각 루이 말과 위트 스틸먼이 뉴욕 특유의 수다스러운 저녁을 포착합니다. 실제 연극인들인 월리스 숀과 앙드레 그레고리가 각본을 쓰고 각기 자신의 허구적 버전을 연기한 <앙드레와의 저녁식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오직 대화만 나눴을 뿐인데 그 이후로 다른 사람이 된 듯이 느껴지게 하는 대화극의 명작입니다. <메트로폴리탄>에서 상류 부르주아 젊은이들이 파티와 칵테일 사이를 오가는 한 철의 연속 속에는 한 시대의 저묾과 젊음의 불안을 알아보는 스틸먼의 예리하고 문학적인 아이러니가 자리합니다.
반면, 니콜라스 뢰그의 <배드 타이밍>과 마틴 스코세이지의 <특근>은 제각기 1980년대 스릴러의 외양 아래 악몽을 꾸는 듯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하룻밤을 그려 냅니다.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는 피터 그리너웨이의 바로크적인 탐미가 대처리즘 시대 영국을 향한 은유로도, 한편으로는 허구를 진실로 쉽게 믿는 관객과 벌이는 잔혹극의 게임으로도 읽히는 밤으로의 미로를 제공합니다. 마지막으로 <북극의 연인들>에 포착된 북극권 라플란드의 백야는 이 섹션의 종착지가 되어 줄 것입니다. 운명과 우연이 교차하는 이 세기말 로맨스 영화에서는 해가 지지 않는 그곳에서 밤은 끝내 오지 않으며, 두 연인이 약 20년에 걸쳐 그리는 원의 궤적을 따라갑니다.
끝으로, 조 로울러와 크리스틴 몰로이가 <미래 시제>에서 리베카 솔닛에게 빌려 온 말을 인용하며 마무리하려 합니다. “다른 장소에는 다른 생각이 깃든다.” 이번 여름에는 스크린 여행을 통해 다른 곳에 가 닿아 보시길 바랍니다.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프로그래머 박은지
출처: 영화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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