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링프로젝트
2026년 4월 9일 ~ 2026년 5월 9일
가까이 갈수록 희거나 흐릿한 회색의 형상이 전면에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맞이하고 있다. 서혜영의 캔버스 앞으로 다가가는데 여느 때의 회화를 감상할 때와 같이 화면 속 이미지가 선명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이내 그림이 따뜻한 흰색을 지닌 망으로 한 겹 덮여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망은 주변의 빛에 따라 미세하게 곡률을 이루며 빛을 반사하고 있는 천이자 그물이다. 아주 가늘고 고운 줄로 만들어졌지만 촘촘하게 짜여 있어 연약해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직접적으로 화면을 바라볼 수 없지만 안쪽의 형상들이 연필로 그려진 거대한 면사포, 그것을 클로즈업한 식물 패턴이나 무언가를 감싸고 있는 상태, 의복 등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인식할 수 있다. 미세하고 균일한 조직을 지닌 그물망이 얇게 드리워져 있음으로써 허락된 역설적인 시각적 경험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서혜영의 그림들은 무언가를 감추려는 듯 혹은 드러내려는 듯 초연하고 미스터리한 상태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Layered Void》는 투명한 구축성을 물질을 통해 연결시키는 서혜영 작업의 특징을 반영한 것이다. 직역으로 ‘중첩된 비어있음’을 의미하는 ‘레이어드 보이드’는 평면과 입체를 가로질러 나타나고 있으며, 섬세한 성질을 지닌 연필 선, 망, 금속 선, 비즈 왁스, 비닐 등 시각적으로 비교적 명료하지 않은 요소들을 여러 겹 쌓아 올림으로써 이루어진 상태를 말한다. 평면 작품에서 캔버스의 표면을 덮고 있는 흰색 망은 작가가 구축하는 겹의 일부로서 전시 개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유연한 선을 이루기에 적합한 체인, 철과 구리 선과 같은 재료와 작가의 손으로 매만진 비즈 왁스 조각, 버려진 나뭇가지, 비닐 등을 한 데 엮어 빈 공간에 드러낸 입체 작품은 세상을 바라보고 관계를 만들어 내는 작가의 조형언어를 함축하고 있다. 《Layered Void》를 통해 견고한 망으로 이루어진 작품의 미세한 겹을 가만히 들여다보거나 설치 작업 사이를 거닐며 이러한 중첩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서혜영은 작업을 위해 파리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우연히 가지치기가 한창인 정원으로 발길이 닿게 되었다. 그는 당시 정원사가 몇몇 가지를 완전히 잘라내지 않은 상태로 두고 그것을 ‘남겨둔 가지 (prolongement)’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원예란 나뭇가지를 보기 좋게 잘라내는 행위가 아닌 잘 남겨두는 일이라는 사고의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전환은 그가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방식, 즉 눈앞에 드러난 결과가 아닌 그것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태도에 주목하게 만든 계기가 되어준 것으로 보인다. 남겨둔 가지로부터 다시 뻗어 나갈 줄기와 잎사귀, 열매에 이르는 보이지 않는 시간과 생명, 형태를 포함하여 말이다. 잘라낸 것과 남겨진 것, 덮어둔 것과 가려진 것, 감춘 것과 과시하려는 것과 같이 등을 마주한 개념들이 그의 작업 안에서 마주친다.
마치 거미줄이나 아주 여린 실을 엮어서 만든 것처럼 서혜영의 그림은 미세한 결을 지니고 있다. 서혜영의 2000년 경부터 2020년 전후의 작품을 살펴보면 벽돌이라는 형태와 개념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 시기 그는 철판이나 골판지, 시트지 등 납작한 소재를 사용하여 벽돌을 구축과 구조, 축적 등이 이루어지는 일종의 패턴이자 단위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유비쿼터스> (2003) 시리즈에서 흰 배경 위에 연필 만으로 그려진 벽돌과 가느다란 연필선을 무수히 채워 넣어 구축한 여신의 실루엣이 나타나게 된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중첩된 연필 선의 표현은 작가의 기억, 상념, 이미지의 잔상 등 감각으로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시각적 형상으로 붙잡고 재현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후 다루는 재료와 표현의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지만 일상적이면서 겸손한 성질을 지닌 것들을 호출하여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서혜영의 시선은 이번 신작 회화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과일을 보호하기 위한 스티로폼 완충제, 덩굴식물의 패턴이 수놓아진 미사포, 낙과를 방지하기 위해 나무에 넓은 천을 널어둔 장면, 박물관에서 보았던 드레스 속 페티코트, 임시로 천을 덮어놓은 조각상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천을 덮거나 감싼다는 간결한 행위가 지닌 의미를 자신의 삶을 통해 흥미롭게 관찰하였다. 그리고 스티로폼이 사과를 보호하며 만들어낸 미묘한 곡선, 사람들이 기억하는 조각 본래의 모습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덮어둔 천으로부터 새롭게 만들어진 외곽선과 덩어리감, 그로부터 발현되는 상상력, 여성의 신체 일부를 극대화하기 위한 드레스 안으로 감추어진 설계구조와 같이 익숙하지만 덮여져 지나쳤던 장면들을 꺼내어 그리고 있다.
<물질도감> (2021~)은 서혜영이 2021년 경 시작하여 현재 진행 중인 드로잉 연작이다. 그가 지닌 물질에 대한 믿음을 도감의 형식으로 제작한 것인데 이번 전시에서는 비정형적인 자연물의 형태를 주제로 한 작업들을 선보인다. 작가는 돌 틈의 이끼나 곰팡이와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나는 연약하고 끈질긴 자연을 두고, 그것을 연상케 하는 형상을 트레이싱지 위에 연필이나 색연필로 그렸다. 어디로부터 생겨났는지 알 수 없고 때로 박멸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고유한 생명을 지닌 물질에 대해 그는 끌림을 느낀다. 그리고 드로잉을 위해 굴절된 유리를 트레이싱지 위에 올려 빛을 투과할 수 있는 액자를 제작하였다. 원래대로라면 빛과 이끼는 상반되는 단어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서혜영은 이러한 모순을 단순하고 조화로운 상태로 만들어낸다. 회색과 녹색으로 세밀하게 그려져 유기적인 형상을 아스라이 이루고 있는 모습은 그 미시적인 것들의 본성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전시 공간에 매달려 있거나 가로지르고 있는 설치 작품은 서혜영이 지닌 조각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그물도 벽돌의 일부로 볼 수 있다면, 그동안 내가 표현했던 벽돌은 한 번도 속이 꽉 차 있던 적이 없었다”라고 말한 작가의 말과 같이 그는 내부가 비어 있어 주변을 투영하고 쉽게 겹칠 수 있으며 일상적인 것들을 손으로 이어 붙여 형태와 의미를 만든다. 을지로의 철재상에서 눈에 들어온 황동 구슬, 섬세한 철망이나 알맞게 색이 바랜 구리 선, 비닐, 슬레이트 유리 패널 등 건축이나 산업에 가깝게 태어난 것들은 서혜영의 설치 작품 속에서 조각의 일부로 거듭나게 된다.
화병에 꽃은 식물을 떠오르게 하는 <남겨둔 가지>(2024-3,4)는 좀 더 조각의 형식을 지닌 작업이자 꽃꽂이에 대한 작가의 최근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는 연작이다. 기존 오브제를 활용한 화병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가장 적합한 위치에 가지를 고정하기 위해 그가 고안한 받침을 볼 수 있다. 이는 일부분이지만 마치 실제 식물과 같이 화병 속으로 가지가 한 줄기씩 자리하며 공간을 가로질렀을 시간, 완결된 요소들 사이로 작용하고 있는 힘의 균형, 그 행위를 수행하였을 서혜영의 신체를 가시화한다. 동그랗고 작은 것들이 수없이 엮이고 이어지는 연결지점, 가지의 시작과 끝부분의 마감, 양감과 선재의 균형 등을 살피며 꽃꽂이에 담긴 정신적인 부분, 식물의 생명을 존중하며 작은 세계를 형성하는 방식을 두고 작가는 자신의 노동하는 신체를 매개체 삼아 수행하고 정진하려 한다.
다시 얇은 망으로 둘러싸인 캔버스 앞으로 돌아가 본다. 고요히 한 꺼풀 감싸여 있는 이 그림들은 단순히 응시와 금기의 개념을 건드리거나 새로운 형식 실험을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가로막힌 상태는 지금 대면하고 있는 현재와 유한함을 감각하게 하는 동시에, 내용 면에서는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작가가 보낸 시간과 기억, 매일 쌓아 올린 손의 노동, 소재와 구성에 대한 직관과 선택 등을 통해 인간으로서 순환하는 자연이 지닌 영원한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남겨진 가지를 통해 도래할 정원의 입구를 상상하는 일과같이 절제된 그의 접근 방식은 인간의 유한한 노력을 넘어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본질을 마주하게 하는 명상의 힘을 지니고 있다.
참여작가: 서혜영 HAIYOUNG SUH
출처: 뉴스프링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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