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립미술관
2026년 10월 21일 ~ 2027년 1월 31일
선과 색은 그림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자, 그림을 배우는 이의 손에 가장 먼저 쥐어지는 언어다.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카렌 바라드(Karen Barad, 1956~ )는 물질과 의미가 본래 분리된 두 실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존재도 미리 완성된 채로 세상에 놓여 있지 않으며, 서로 다른 요소들이 관계 속에서 함께 작용하는 가운데 비로소 의미를 얻는다. 그가 ‘내부-작용(intra-action)’이라 부른 이 개념은 화면의 선과 색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한 줄기의 선과 한 겹의 색은 작가가 일방적으로 그어내고 칠해낸 결과가 아니라, 붓과 먹, 물감과 종이, 손의 움직임과 그 손이 처음 그것을 익힌 자리가 서로 개입하며 함께 빚어낸 산물에 가깝다.
이종상, 이철주, 유희영, 하동철. 한국 현대미술에서 저마다 다른 길을 걸어온 네 작가는 대전고등학교 미술부에서 시작했다. 같은 교사에게 사생과 소묘의 기초를 배웠고 이후 두 사람은 한국화를, 두 사람은 서양화를 조형 언어로 삼았다. 그리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서 각자의 이름을 알렸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후학을 길러냈다. 공통의 자리에서 네 사람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종상은 인물의 선에서 출발해 국토와 역사를 향한 먹선으로, 다시 형상 이전의 질서를 좇는 원형상으로 이르렀다. 이철주는 인물을 감싸던 필선을 도시의 풍경으로, 다시 문자에서 풀려나온 획으로 옮겨갔다. 유희영은 격정적인 붓질의 선을 점차 거두어 순연한 색면을 쌓아 올리는 쪽으로 나아갔다. 하동철은 아버지의 상여를 뒤따르며 마주한 빛의 기억을 평생의 화두로 삼아 넓은 색의 띠를 얇은 선으로, 다시 무수한 선묘의 반복으로 빛의 확산을 형상화했다.
이처럼 네 사람의 화면은 서로 닮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을 한 자리에 놓는 이유는 어떤 관계 속에서 작가가 되어갔는가에 있다. 바라드가 말한 얽힘 — 같은 물질적 조건 속에서 함께 작용하며 서로 다른 것이 되어간 그 과정 — 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이번 전시는 그 얽힘이 어떻게 넷을 서로 다른 길로 이끌었고, 또 어떻게 다시 이어놓았는지를 선과 색이라는 가장 오래된 언어로 되짚어본다.
참여작가: 이종상, 유희영, 이철주, 하동철
출처: 대전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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