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2020년 5월 19일 ~ 2020년 6월 10일
세상은 아직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에 갇혀 있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이라도 해 나가면서 이 미궁의 세월을 통과하는 것 외엔 다른 선택을 상상하기 힘듭니다.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는 예년보다 다소 늦어졌지만, 오래 지속해 온 연례 기획전 ‘월드시네마 2020’으로 조심스럽게 관객 여러분을 만나려 합니다.
‘월드시네마’는 동서고금의 세계영화사의 걸작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기획전입니다. 올해에도 비교적 낯익은 걸작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재발견’과 비교적 덜 알려진 보석들을 만나는 ‘발견’의 두 섹션으로 나뉘어 상영됩니다. 물론 많은 분들에게 이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좋은 영화라면 몇 번을 반복 관람하더라도 늘 새로운 영화로 우리의 지각에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재발견’ 섹션은 미국 영화 한 편을 제외하곤 모두 현대 영화의 영역을 갖가지 방식으로 개척한 위대한 모더니스트의 작품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아마도 알랭 레네의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만큼 현대 영화에 깊은 영향을 미친 작품도 드물 것입니다. 고전적 영화의 시공간을 완전히 해체해 다형적, 다선적 서사의 신기원을 이룩한 이 영화의 실험성은 다시 봐도 경이로울 것입니다. 다소 덜 알려졌지만 다니엘 위예와 장 마리 스트라웁의 <역사 수업>은 정치성과 역사성을 소재나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영화 형식으로 구현한 걸출한 작품입니다. 모던 시네마의 기원이 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세례를 받은 거장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 <붉은 시편>을 통해 롱 테이크의 미학을 신화적 경지로 끌어올린 위대한 헝가리 감독 미클로슈 얀초의 또 다른 대표작 <적과 백>은 모두 영화에서 응시의 문제를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사유하도록 이끕니다.
한편, 칼 드레이어의 <게르트루드>, 안제이 바이다의 <대리석 인간>, 일마즈 귀니의 <욜>은 고전 영화의 시공간을 계승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연민을 지니면서도 사건이 아니라 공기, 대사가 아니라 움직임으로 현대성을 구현한 걸작들로 꼽을 수 있습니다. 두 편의 다큐멘터리 중 하나인 장 루슈의 <나는 흑인>은 영화가 타자를 어떻게 만나는가의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기념비적 민속지 영화입니다. 위대한 다큐멘터리스트 요리스 이벤스의 <바람의 노래>는 감독 자신의 오랜 여정과 세계의 감정이 집약된 위대한 에세이이기도 합니다. 가장 이질적으로 느껴지실 프랭크 카프라의 <멋진 인생>은 할리우드 고전기의 막바지에 등장해 고전 영화의 위기와 정점을 함께 보여 주는 가슴 저리고 아름다운 영화입니다.
‘발견’ 섹션에서 소개되는 영화들은 주로 할리우드의 숨은 명작들과 거장들의 덜 알려진 문제작들입니다. 먼저 세 편의 무성 영화를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 엡스탱의 <충실한 마음>은 급진적인 카메라 워크와 편집으로 후대 영화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걸작입니다. 아브람 룸의 <제3의 소시민>은 초기 소비에트 시대에 만들어졌지만, 인간 특히 여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연주의적 서사, 그리고 탁월한 유머 감각으로 놀라움을 안기는 작품입니다. 프랭크 보제지의 <레이지본즈>은 가장 아름다운 할리우드 무성 영화 10편을 꼽으라면 빼놓기 힘들 만큼 빛나는 보석입니다.
로이드 베이컨의 <풋라이트 퍼레이드>는 유성 영화 초기에 이미 할리우드가 미학적 정점에 이르렀음을 확인케 하는 역동과 박진의 뮤지컬입니다. 두 편의 프랑스 영화인 마르셀 파뇰의 <제빵사의 아내>와 이브 알레그레의 <아름답고 작은 해변>은 프랑스 영화 특유의 경쾌한 혹은 우울한 정취의 기원에 놓인 아름다운 영화입니다. 니콜라스 레이의 <쫓기는 남자>, 루이스 브뉘엘의 <젊은이>는 영화사의 만신전에 오른 두 거장이 잘 알려지지 않은 소품에서조차 자신의 영화적 날인을 깊이 새겨 넣어 우리의 감각을 동요케 함을 증명하는 소중한 문제작들입니다. 다소 낯설게 느껴질 구마시로 다츠미의 <몽둥이의 슬픔>은 아마도 일본 로망 포르노가 낳은 가장 값진 영화적 유산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한 영화학자는 좋은 영화가 행복을 가져다주진 않지만 행복의 방법을 느끼게 해 준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세계영화사의 보석들을 만나면서 여러분도 그 방법을 함께 느끼게 되길 진정으로 기원합니다.
영화의전당 프로그램디렉터 허문영
상영작리스트
섹션 '재발견'
멋진 인생 (1946, 프랭크 카프라)
나는 흑인 (1958, 장 루슈)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1961, 알랭 레네)
게르트루드 (1964, 칼 드레이어)
욕망 (1966,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적과 백 (1967, 미클로슈 얀초)
역사 수업 (1972, 다니엘 위예 & 장-마리 스트라웁)
대리석 인간 (1977, 안제이 바이다)
욜 (1982, 세리프 괴렌 & 일마즈 귀니)
바람의 이야기 (1988, 요리스 이벤스)
섹션 '발견'
충실한 마음 (1923, 장 엡스탱)
레이지본즈 (1925, 프랭크 보제지)
제3의 소시민 (1927, 아브람 룸)
풋라이트 퍼레이드 (1933, 로이드 베이컨)
제빵사의 아내 (1938, 마르셀 파뇰)
아름답고 작은 해변 (1949, 이브 알레그레)
쫓기는 남자 (1955, 니콜라스 레이)
피닉스 시티 스토리 (1955, 필 칼슨)
젊은이 (1960, 루이스 브뉘엘)
몽둥이의 슬픔 (1994, 구마시로 다쓰미)
출처: 영화의전당
* 아트바바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관람료 일반 7,000원 유료회원, 청소년(대학생 포함) 5,000원 우대(조조, 경로 등) 4,000원
모든 프로그램은 주최측의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를 확인하시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