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의동 보안여관
2025년 10월 14일 ~ 2025년 11월 8일
섭씨 22.5도 습도 20퍼센트 서풍 초속 8.7미터
박가희
어린 시절의 기억은 종종 사소한 풍경 속에 오래 남는다. 나에게는 외갓집 마당에서 바라보던 강 건너 작은 산이 그렇다. 물속에 반쯤 누운 산의 윤곽을 한참 바라보며, 친척들과 함께 그 산에 이름을 붙이곤 했다. 바위의 얼굴은 매번 다른 표정을 지었고, 구름은 순간마다 다른 동물이 되었다. 정답이 있는 놀이는 아니었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무한히 변주되는 상상의 질서를 만들었다. 여다함은 이런 경험을 일본 작가 아카세가와 겐페이가 말한 “‘어린이의 과학’성”에 빗대어 설명하곤 했다. 누구나 자연 속에서 모양을 찾고 별명을 붙여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다함에게 그것은 과거의 한 장면으로 머물지 않는다. 여전히 현재진행 중인 일상이고 작업의 한 방법이며, 이를 토대로 생각하고 느끼며 사물과 움직임을 만든다.
관찰이 작업으로써 시각성을 얻는 지점에 뜨개질이 있다. 그는 10년 가까이 틈만 나면 실을 풀고 바늘을 움직였다.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마치 호흡처럼 이어졌다. 나 역시 모임 자리 한구석에 앉아 말없이, 그러나 끈질기게 뜨개질에 몰두하던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 집중은 주변의 소음과 분주함을 오히려 정리해 주는 듯했다. 몇 년이 지나, 그는 뜨개질에 대한 프로젝트를 제안하며 대화를 청했다. 당시의 그는 뜨개질하는 행위가 주는 몰입과 그곳에서 발견한 우연과 리듬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고, 그러한 발견을 나누고 싶어 했다. 그렇게 ‘한 코 한 걸음’(2022)이라는 책과 동명의 퍼포먼스가 나왔다. 이 작업은 뜨개질이 단순한 제작 기술이 아니라, 시간과 리듬과 행위가 결합된 움직임이며, 감각과 질서와 세계를 빚어내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작가의 경험은 개인적인 몰입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그에게 관찰은 단순히 대상의 외형에 주목하거나 형상을 찾는 일도 아니다. 그보다는 대상이 놓인 조건과 환경을 드러내는 출발점이다. 관계를 탐구하고 그 속에서 사유하는 연습이자, 자신의 변화를 자각하게 하는 일상의 태도이기도 하다. 그는 이제 이러한 경험을 뜨개질이라는 개인적인 수행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많은 이들과 널리 공감할 방법을 모색한다. 그리고 그 질료로서 대기를 제안한다. 2021년 제주로 이주한 그에게 산, 바다, 바람은 일상이 되었다. 뜨개질이라는 개인의 감각과 수행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바람과 구름, 연기 같은 대기의 현상 속에서 같은 리듬을 발견한다. 여다함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자연 속에서 발견한 다양한 감각들을 가족과 동료 뿐만 아니라 더 다양한 이들과 나눌 수 있기를 기다려왔다. 이번 전시 ⟪섭씨 22.5도 습도 20퍼센트 서풍 초속 8.7미터⟫는 이러한 바람 속에서 지난 몇 년간 작가가 관찰하고 사유한 것을 대기라는 공통된 매질로 엮어낸 자리다.
대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자 관계다. 여다함에게 대기는 서로 다른 작업들을 이어주고 확장하게 만드는 매질이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구름, 연기, 바람 같은 자연적 현상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변하는 대기의 성질을 탐구한다. 자연계의 물질이 한 상태에 머물지 않고 얼음·물·수증기로 순환하듯, 바람 또한 그저 불어오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며 다양한 접촉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태 변화가 대상 내부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 맺는 환경과의 반응 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전시는 바로 이 유동성과 상호작용에 주목하며, 작가가 지금까지 축적해 온 경험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낸다. 그 흐름은 공간 속에서 빛과 그림자, 연기와 호흡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입구에 드리운 그림자다. 잠시 서서 바라보고 있으면, 얇은 종이에 맺힌 상이 공간의 미세한 움직임에 반응하듯 흔들린다. 그 상은 때로 구름 같고, 때로 산등성이 같다. 작가는 뜨개질 조각과 그 그림자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 일찌감치 ⟨부럼⟩(2025)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조각의 뜨개질을 막 시작하던 무렵, 정월대보름에 아들 해와가 먹던 땅콩의 색과 모양, 그리고 땅콩을 먹던 해와의 표정을 담고 있어 ‘부럼’이라 불렀다. 이후 크기가 커지면서 잦게 올라선 능선이 평평해지고, 완만한 경사가 생기면서 외형이 달라졌지만, 두 개의 작은 봉우리가 솟은 부분을 보다 보면, 처음에 있었을 그 작은 부럼을 떠올리게 된다. ⟨부럼⟩을 따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에는, 뜨개질하며 쓴 기록을 발췌, 편집한 ⟨부럼, 코끼리, 생강 일지⟩(2025)를 볼 수 있다. “여름 4월에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발생하여 사람들은 7일 동안이나 빛을 분별하지 못하였다”라는 『삼국사기』의 한 구절로 시작하는 이 일지에는, 작가가 뜨개질한 시간과 이동 거리, 실의 종류와 두께, 그날의 날씨와 가족과 나눈 대화를 포함한 짧은 성찰이 나란히 적혀 있다. 이러한 기록은 노동의 양을 계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뜨개질에 영향을 미친 다양한 조건들을 관찰하려는 시도다. 이 모든 과정을 연결하는 또 다른 매개로서의 일지는 뜨개에 접혀 있는 시간과 공간을 펼쳐 보이며, 작가의 말을 빌리면 “뜨개질의 행위와 그 결과로 생겨난 지형(뜨개 오브제의 생김새)을 잇는 오솔길”을 만든다. 뜨개질은 둥글게 감긴 실타래를 풀어 매듭을 짓는 반복처럼 보이지만, 작가에게는 “손에 쥔 실(chaos)이 넓적하게 면(geography)이 되고, 면에서 행렬(matrix)을 이루고, 볼록하게 입체(universe)”를 빚어 올리는 일, 곧 “카오스”(타래)에서 “유니버스”(형태)로 아주 느리게 건너가는 신체의 경험을 안내하는 행위다.*
⟨부럼⟩과 일지가 시간과 장소의 리듬을 응축해 보여주었다면, 이어지는 ⟨향연⟩(2025)은 그 응축이 대기 속으로 풀려나가는 순간에 집중한다. 이 작품은 2019년부터 이어져 온 ⟨향로⟩ 연작에서 출발했는데, 초기의 향로가 향을 뿜어내는 오브제를 제작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면, 지금의 관심은 그 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로 옮겨가 있다. 작가는 이 과정을 두고 “뜨개질은 형체가 아닌 현상을 굳히는 작업”*이라고 썼는데, ⟨향연⟩은 바로 그 생각을 연기의 움직임 속에서 구현해 낸 작업이다. 향로는 연기가 머물고 흘러가는 장소이자, 사물이 연소하며 변화하는 과정을 감싸고 있는 “대기의 모형”이다.* 한 줄의 실이 면과 입체로 확장되듯, 뜨개질이 세계의 작은 질서를 빚어내는 과정이었다면, ⟨향연⟩은 대기를 매질로 삼아 연기가 여러 층위의 공간을 가로지르며 춤추는 과정을 드러낸다. 좁은 틈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연기는 향로 바깥으로 번져 나가며, 관객을 둘러싼 공기 속에서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낸다. 이로써 작품은 보이지 않는 대기를 감각의 장으로 불러내며, 관계와 순환 속에서 드러나는 현상의 변화를 시각화한다.
연기를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이 흩어지는 흔적이 아니라 주변 조건과의 교감 속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연기는 일정한 선을 그리며 올라가다가 곧 흩어지고, 다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연기의 흐름에서 작가는 ‘춤’을 떠올린다. 그에게 춤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추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발견되는 것이다. ⟨향연⟩이 연기의 흐름에서 춤을 발견하게 했다면, ⟨Ballroom(0&1)⟩(2024)은 그 무대를 바람과 풍선으로 옮겨놓는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우리를 감싸며, 풍선이 놓이는 순간 그 존재가 가시화된다. 팽창한 풍선은 공기 중에 놓이는 즉시 주변의 흐름에 반응하며, 스스로 의식을 가진 듯 움직인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풍선이 아니라 바람이 우리 앞에 몸을 드러낸 순간이다.
⟨Ballroom(0&1)⟩ 속 풍선은 공중에 띄워져 있지 않는다. 여다함은 풍선에 돌과 실을 묶어 무게를 부여해 땅 위에 머물게 한다. 풍선은 떠다니는 물체가 아닌 지상에서 걸음을 옮기는 존재, 인격체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에 다시 손을 맞잡듯 실을 더해 함께 붙들면, 풍선은 바람과 인간이 함께 춤을 추는 파트너로 변모한다. 바람의 힘과 풍선의 형상, 그리고 그것을 붙잡은 몸이 서로를 밀고 당기며 즉흥적인 호흡을 만든다. 작가는 이 작품을 두고 바람의 “우화”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아이와 나무, 돌멩이와 꽃들이 풍선과 마주하며 서로의 리듬을 나누듯, 바람은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형상을 얻는다. 풍선과 몸은 서로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관찰하며, 상대가 보내오는 신호에 즉흥적으로 반응한다. 접촉을 통해 교환되는 움직임의 대화다. 그 속에서 우리는 바람이 연주하는 무곡의 선율을 듣게 되고, 주위의 자연은 어느새 거대한 무도회장이 된다. 특히 통창 밖에서 움직이는 풍선, ⟨바람심기⟩(2025)는 외부의 공기를 그대로 끌어들여, 안팎으로 바람이 춤추는 장면을 하나로 연결한다. ⟨Ballroom(0&1)⟩은 보이지 않는 대기의 움직임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과 맞닿은 인간의 몸을 통해 즉흥적인 교환과 호흡 속에서 드러나는 상호 교환적인 신체성을 탐구한다.
풍선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즉흥적인 교감은 사실 작가에게 낯선 감각이 아니다. 2015년, ⟨매우 만족 만족 보통 불만족 매우 불만족⟩을 처음 보았을 때를 기억한다. 당시 작가가 살고 있던 한강 변의 오래된 아파트 옥상을 배경으로, 얼음을 매단 풍선이 공중으로 떠오르려는 힘과 얼음이 붙잡는 하중 사이에서 긴장과 이완의 리듬을 담은 비디오 작품이었다. 얼음이 녹는 순간까지 두 사물은 팽팽하게 맞서다가도 느슨하게 풀리며, 마치 춤을 추듯 움직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영상을 지켜보던 기억이 남아 있다. 이 장면은 오브제의 실험이 아니라, 환경과 조건의 변화가 어떻게 움직임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은유였다. 그때 이미 작가는 사물과 관계, 힘의 균형 속에서 리듬을 발견했을지 모른다. 그 잠재한 감각은 이후 뜨개질, 구름, 바람, 연기로 이어지며 발현되었다. 이 여정은 작업의 여정이자 동시에 삶의 여정이다. 그는 관계 맺음 속에서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발견하고, 변화하는 상태를 감지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움직임을 찾아간다. 마치 물과 공기가 순환하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듯, 그의 작업 또한 다른 형식을 거쳐 결국 같은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돌아왔을 때 남는 것은 이전과는 달라진 상태와 감각이며, 그것은 곧 작가 자신이 겪은 변화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 ⟪섭씨 22.5도 습도 20퍼센트 서풍 초속 8.7미터⟫는 이러한 순환의 궤적을 응축해 보여준다. 뜨개질의 매듭, 바람의 흐름, 연기의 춤이 서로 얽히며 하나의 생애적 리듬을 만들어내는 자리다. 나는 이 전시에서 여다함이 자신의 삶이 마주한 변화를 감지하며, 그에 맞는 새로운 리듬과 움직임을 찾아가는 여정에 있음을 본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변화와 기록을 넘어, 바람과 구름, 연기와 호흡을 매개로 관계와 환경 속에서 생성되는 감각의 공동체로 확장된다. 이 전시는 작가가 대기와 만드는 움직임과 관계의 세계로의 초대이다.
작가 소개
여다함(b. 1984)은 미술작가로 전시에 참여하고, 퍼포먼스에 출연한다. 물, 수증기, 얼음과 같이 물질이 다른 상태로 이동하고 변화하는 현상에 주목하고, 왜, 어떻게, 무엇과 함께 하는 삶인지에 대한 질문을 주제를 탐구한다. 개인전 ⟪기체 액체 고체⟫ (2019, 아트 스페이스 풀, 서울)와 ⟪먼지 관제탑⟫(2011, 꿀풀, 서울)을 열었고, ⟪인투 더 리듬: 스코어로부터 접촉지대로⟫(2024, 아르코미술관, 서울), ⟪Counting Air⟫(2023, Primary Practice, 서울), ⟪사랑을 위한 준비운동⟫(2021,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서울), ⟪Frequencies of Tradition⟫(Times Museum, 광저우, 2020),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7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CONFITE PUNO⟫(2017)의 기획과 퍼포먼스를 맡았다. 2014년 에르메스 미술상 최종 후보,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입주 작가로 선정되었다. 2021년 제주로 이주했다. 이후 줄곧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으며, 2023년에는 제주에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하는 공연 예술 공간 ‘만마력’을 만들며 더 많은 이들과 교류하고 호흡하고자 한다.
함께 만든 사람들
주최 및 주관: 여다함
기획: 박가희
프로덕션 매니저: 박세진
공간 및 기물 디자인, 제작: 김종범(레어바이크)
설치 도움: 무진동사
조명 (자문): 서가영
감사한 분들: 공영선, 이규호, 제람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다원예술창작산실
출처: 통의동 보안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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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시간
월요일 휴관
화요일 12:00 - 18:00
수요일 12:00 - 18:00
목요일 12:00 - 18:00
금요일 12:00 - 18:00
토요일 12:00 - 18:00
일요일 12:00 - 18:00
휴관: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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