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초이
2017년 9월 1일 ~ 2017년 9월 28일
미술. 그리고 성찰.
다양하고 주관적이며 논란거리가 많은 현대 미술이 ‘미술’로 자리를 잡도록 도와주는 한 마디를 찾자면 ‘성찰’이 아닐까 싶다. 삶에 대한 ‘성찰’이 가시적인 작품으로 형태하여 작가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것이 ‘미술’이기에 현대미술에 딸려 오는 여러가지 논란들은 이 ‘성찰’과 관련된 범주에 의해 현대미술의 범주 안에 안착하곤 한다. 그렇다면 이 ‘미술’ 또는 ‘art’ 라는 단어의 정의가 정말 과연 그런 것일까? (세계를 단순히 양분화시키시엔 좀 무리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문화권의 분류에서 살펴보자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일단 서양문화권에서의 ‘art’는 우리와는 약간은 다른 정의를 갖는다. 10세기경 라틴어의 어원을 찾아보면 ‘art’는 ‘배우거나 훈련한 것의 결과로써의 기술(skills as a result of learning or practicing)’을 뜻한다. ‘아름다움’의 표현보다는 훨씬 삶에 있어서 실용적인 면을 지칭하는 것이 ‘art’였던 것이다.
한편, 동양권의 ‘미술’은 ‘아름다울 미’와 ‘기술 술’이 합쳐진 말로 ‘아름다운 기술’이라는 정의를 갖는다. 그렇다면 아름다워야만 미술이 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얼마 전 한 매체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양정무 교수가 그럴싸한 답을 주었다. 한자인 ‘아름다울 미’자의 기원이 그것이다. 양을 나타내는 ‘양’자와 나무를 나타내는 ‘목’자가 합쳐져 완성된 글자. 그것은 고대 ‘살찐 양(번제로 드려지는 양은 가장 좋은 살찐 것일테니)이 나무, 즉 장작에 올라 번제로 드려지는 모습’이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름다움만을 지칭하는 것이 ‘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그 제사의 모습이 보기에 좋았기에 ‘미’가 ‘아름다움’이 된 것일까? 조금 더 넓게 가보자. 고대에 ‘제사’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삶의 근간이었을 것이다. 그 제사를 통해 사람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삶에 대해 소원을 빌고, 희망을 품으며, 미래를 꿈꾼다. 삶을 열망하는 모습이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사의된 것이 글자 ‘아름다울 미’ 인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의 ‘성찰’을 나타내는 기술이 결국 ‘미술’인 것이다.
이렇듯 다른 두 문화권에서 우리가 지금 ‘미술’로 인식하고 있는 단어의 언어적 함의는 ‘삶’을 지칭하고 있다. 그리고 이 언어적 함의는 우리의 삶에 대한 ‘성찰’이 곧 ‘미술’임을 결론지어준다. 여기서 미술의 근간이 ‘삶’인 것은 동서양이 같지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서양에서 ‘art’의 어원이 삶에 대한 실용성을 강조하고 있다면, 동양에서의 ‘미술’은 글자 자체에서부터 삶의 (영적)정신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전세계가 같은 것을 같은 시간대에 공유하고 사는 현재, 그 동서양에서의 다른 점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차이에 대한 또 다른 성찰을 만들어낸다. 이번 전시는 세계화 되어 있는 미술의 방식 안에서 동양적 ‘삶의 정신성’을 추구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삶과 작업을 ‘성찰’하고 있는 이진원과 오윤석, 두 작가의 이야기이다.
일체의 감각과 사유 활동을 정지한 채 좌망(坐忘)하여, 사물의 변화에 임하면, 절대 평등의 경지에 있는 도(道)가 빈 마음속에 모이게 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장자의 ‘물아일체(物我一體)’. 기운이 충일(充溢)하다는 의미로, (이후 동양화 화론에 지대한 영향을 준) 중국 회화(繪畵)의 작풍(作風)에서 최고 이상으로 삼았던 말인 ‘기운생동(氣韻生動)’. 성찰의 각기 다른 형태와 방향으로 일컫어지는 이들은 위의 두 작가의 작업세계의 근간이 된다.
작가 이진원이 작업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어떤 사물을 그리는 것에 대한 부질없음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시작한 건 부드러운 바람, 반짝이는 것들, 진한 초록, 신비로운 숲, 잠시 동안 하나가 되었다가 이내 흩어지는 입자들, 지금 나를 매혹하는 건 그런 것들 이어서, 너무나 단순해 보일지 몰라도 나는 우선 그 속에 머무르며 빛나는 것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라고 말하는 작가는 이번엔 온통 보라빛 자색으로 빛나는 어떤 지점에 머물고 있다. 언뜻 보기에 동양화 기법을 생각하기엔 거리가 있을 것 같은 그녀의 작품은 장지 위에 무수한 점과 원으로 그녀가 머무는 시간의 겹을 쌓아 올린다. 그리고 그 반복의 부질없음이 극복되는 순간 작업은 완성된다. 그 순간은 그녀와 그녀의 대상에 대한 사유가 하나가 되어 멈추는 어떤 지점이다.
작가 오윤석은 불교의 경전에서 차용된 텍스트들을 한글로 바꾸고, 또 그 텍스트를 해체하여 나온 획 하나를 종이에 얹는다. 그 종이 위의 획을 칼로 오려내고, 오려낸 종이 끝을 초의 심지같이 돌돌 말아 세움으로 그 그림자를 이미지로 만난다. ‘만들어낸 이미지-텍스트가 인용하고 있는 문자의 의미와 사용하고 있는 예술적 수단을 넘어서 새롭게 열리는 공간에서의 만남을 제시하고, 그 만남이 끊임없이 춤추며 진동하는 수많은 인간의 눈동자들과 같이 언제나 빛을 기다리는 순수한 ‘비어있음’과 동시에 그 자체로 눈부시게 빛나는 ‘충일(充溢)’을 지향한다.’ 라고 말하는 작가는 그의 작업이 ‘독해’와 ‘매혹’의 어느 중간 지점쯤에서 관객과 마주하기를 바라고 있다.
동양에서는 처음부터 그림이 대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재현하는 데에 그 주된 목적을 두지 않는다.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란 대상의 기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느끼게끔 하여야 한다는 것이 동양적 화론임을 생각한다면, 이 두 작가의 작업이 담고 있는 동양적 화론과 그 근간이 되는 성찰은 불가분의 관계일 것이다. 작가들의 삶에 대한 각기 다른 성찰을 엿보는 창이 되는 작품들을 통해 작가들의 성찰은 물론, 더 나아가 관객 개인의 삶에 대한 성찰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출처 : 갤러리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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