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밈
2020년 6월 3일 ~ 2020년 6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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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야자수가 늘어선 그곳은 그저 한낮의 뜨거운 볕이 내리쬐는 동남아시아의 도시 ‘어느 곳’이었다. 그곳은 아무 곳도 아니었다. 나는 종종 책을 읽고, 천장에 매달린 대형 선풍기가 돌아가는 것을 보며 잠이 들고, 맥주 한 캔을 마시거 나 새로운 말들에 귀를 기울였다. 차츰 ‘어느 곳’이었던 그곳은 참된 나만이 인식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갔다.
과거의 숱한 장소들을 떠올려 보기로 한다면, 어렴풋이 이름만 떠오르고 기억이 나지 않는 장소들 사이로 생경한 기억과 향취가 나를 뒤따른다. 카키색 풍경, 거리의 소음, 사람들의 목소리, 어지럽게 놓인 구체적인 사물들.. 한낱 장소의 일부 였던 것들이 나와 정신적 유대관계를 맺어가는 동시에 공간들에 그 무엇에 대한 단서들이 새겨졌다. 이 장소들은 모두 온전한 나의 것이다. 각각의 공간들은 더 이상 장소로 존재하지 않고 정신 안에서 존재했다.
장소는 ‘곳(place)’이 아니라 ‘것(thing)’이다. 무한하고 복잡하며 죽지 않는다. 정신이 깃든 장소들은 살아 숨쉰다. 물리적인 장소는 개인의 정신과 결합되는 과정을 거치며 비로소 ‘곳’에서 ‘것’이 된다. 물질보다 정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정신적인 장소를 표현하는 과정에 있어 나는 행위과정을 가장 중시한다. 여기에서의 행위과정은 무의 식적 작용과 연결된다. 무(無)의 상태에서 물감의 소거와 중첩을 통한 행위과정이 수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장소 이미지는 물감, 오브제 등의 결합과 함께 독특한 형상과 직관적 텍스처(texture)로 구축된다. 무의식적 행위를 통 해 장소의 정신을 끌어올리는 과정이 곧 나의 작업이다.
나의 작업은 순수한 장소 이미지나 의도된 장소감을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물질적인 장소가 정신적 영역으로 치 환되는 장소의 정체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를 더 이상 정신이 깃든 세계에 살게 하지 않는 현대의 장소 들을 마주하며 장소가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것’으로 환원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출처: 갤러리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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