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드서울
2016년 7월 26일 ~ 2016년 7월 31일
한 줄기의 세계에서 이방인의 세계로
그때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아는 얼굴을 찾아서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마치 같은 세계의 사람들끼리 서로 만난 것이 즐겁기만 한 클럽에라도 와 있는 것 같다는 데 주목했다. 또, 내가 어쩐지 침입자 같고 남아도는 존재인 것 같다는 기묘한 느낌도 들었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6) 중에서
그림은 하나의 세계다. 개인의 사적인 공간이건 무리의 집단적 환경이건, 아니면 벌판이든 도심이든 간에 작가는 캔버스에 세계를 구축하고, 관객을 그곳으로 초대한다. 관객은 일단 캔버스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나름의 언어로 그림을 읽어 낼 수 있게 된다. 요지를 전달하는 그림이라면 윤리적 판단 아래 메시지를 이해해 볼 것이고, 표현을 분출하는 그림이라면 형태를 이루는 힘을 관조할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은 그림의 대상을 마주하고, 인물과 대화하고 공간을 유람하면서, 현실의 낯선 사람을 알아가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그림과 관계 맺는다. 한 점의 그림을 감상하는 일을 하나의 세계와 충돌하는 사건에 비유할 때, 왕선정이 제시한 세계는 안착하기에 어쩐지 불편하다. 배경을 거의 가릴 만큼 클로즈업된 얼굴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근접하고, 관객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인물들은 각자의 행동에 몰두해 있다. 괴이한 손동작과 초점 없는 동공은 우리가 정신병동의 복도에서 작은 창문 틈으로 환자를 몰래 관찰하고 있다는 기분까지 들게 한다. 만일 이들이 하나의 좁은 독방에 갇힌 환자들이고 캔버스는 그들을 훔쳐보는 창이라면, 우리는 일시적으로 무단 침입한 불청객일 것이다. 이런 식의 관계에서는 직접적인 대화와 접촉보다는 간접적인 관찰과 판단만 이루어질 뿐이다. 작가는 어째서 구태여 고립된 세계를 직조하고 그곳에 사람들을 가두고야 말았을까.
작가는 2013년 <Baudelaire’s revenants – the man in the bar> 연작을 그릴 당시까지만 해도 지금보다는 사람들간 소통의 가능성을 믿었던 것 같다. 최소한 이 그림의 인물들은 바에 얌전히 앉아 자신의 속내를 들어 줄 청자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생김새가 병적이기는 해도, 이들은 탁자라는 공간을 공유하는 상대에게 고민을 토로한 후 다시 일상으로 회귀하고 싶은 의지를 드러낸다. 작가는 바에서 일했던 경험을 토대로 이 연작을 그렸는데, 그림을 보는 관객은 작가가 있던 자리에 대신 들어서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피눈물 흘리며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들의 고민을 상상해 보거나 자신의 유사한 경험을 투영하면서 고초를 이해하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현실의 인물이 흘린 눈물은 대상을 선택하고 그림으로 옮겨 오는 과정에서 작가의 눈물로, 그 후 다시 그 상황에 공감하는 관객의 눈물로 이어진다. 이러한 일련의 단계를 거쳐 세 개의 세계는 한 줄기의 눈물로 동일한 언어를 공유하게 된다.
하지만 최근의 <beasts> 연작에서 작가는 더 이상 관객을 인물의 맞은편에 앉히거나 곁에 머물도록 권유하지 않는다. 불분명하고 생략된 배경에서 이제 인물은 고민조차 없어 보이는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고, 관객은 스쳐 지나가도록 방치된다. 전작과 비교했을 때 관객과의 물리적인 거리는 더 가까워졌지만, 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 줄 의지도 내비치지 않는다. 벤야민은 <이야기꾼>에서 익명의 독자에게 전파되는 소설과 다르게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기억을 전승하며, 이야기꾼은 전통적 삶의 형식 속에서 과거의 경험을 후세에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칭한다. “옛날에는 사람이 죽어 나간 적이 없는 집이나 방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오늘날 시민들은 한 번도 죽음을 접한 적이 없는 공간, 즉 영원성이 거주하지 않는 일시적 삶의 공간에 살고 있고, 종말이 가까워지면 그들은 상속자들에 의해 요양소나 병원에 옮거져 차곡차곡 안치된다. (…) 삶이 마감되는 순간에 인간의 내면에서 일련의 이미지들이 떠오르듯이, 돌연 그의 표정과 시선에서 잊을 수 없는 무엇인가가 떠올라 그 사람에 관한 모든 것에 권위를 부여하게 된다. 제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도 죽음의 순간에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해 그러한 권위를 갖는다. 이야기의 기원에는 바로 이러한 권위가 있다.” <beasts>의 인물들은 전작에 비해 이야기꾼의 지위에서 요원해졌다는 점에서 권위를 상실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더는 후대에 필요하지 않은 사람, 사회 밖으로 격리되어도 무방한 사람으로 격하된다. ‘beast’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짐승을 뜻하지만, 비격식적 표현으로 ‘불편한 것(사람)’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관객과 이들의 원활한 소통 관계를 차단하고 인물의 행동을 한층 이해할 수 없는 비언어적 상태로 전환했을까. 가장 현실적인 이유로는 작가가 더 이상 바에서 일하지 않고, 그러므로 그곳에서 만난 실존 인물을 그림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겠다. 작가는 다른 대상을 그림에 초대해야만 했고 그러한 과정에서 그림의 구성이 달라지는 결과는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작업 환경의 변화는 그다지 명쾌한 해답을 주지 못한다. 그의 그림을 더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 주목해야 할 요소는 인물이 그려진 그림 안의 장소가 아니라, 그림 안팎에서 인물과 관객이 맺고 있는 관계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전의 관계가 인물-환자, 관객-상담사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서로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끼리 우연히 만난 상황과 비슷하다. 상담사는 최대한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환자의 미래를 위해 조언해 주지만, 외국인은 실시간으로 전해 오는 이방인의 말투, 억양, 몸짓에 집중하고 현재의 이해력 수준에 빗대어 언어를 해독하고자 노력한다.
언어가 통한다는 이유만으로 끝없이 타인과 말을 주고받고 보편적인 격식에 부응하기를 요구하는 사회는 피곤할 뿐이다. 사회적 규범에 순응을 거부하며 사회 부적응자가 되느니 오독과 혼선이 난무하는 대화일지라도 차라리 이방인이 되는 편이 낫다. 어차피 우리는 공통어를 사용하면서도 이미 충분히 서로를 오해하고 상처 주고 있지 않은가. 의사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화법을 구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beasts>의 인물은 그림의 세계에서 이방인이고, 그림과 대면하고도 직접적인 소통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관객은 그들에게 이방인이다. 우리 각자는 저마다의 세계에 거주하는 이방인이기에 자주 관계 맺기에 실패하고 숙명적으로 타인에 의해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외로움을 현대의 병이라고도 부르지 않는가. 하지만 대다수의 좋은 작가들은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불행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최후에는 행복할 거라고 무책임하게 기약하는 말은 판타지스럽고 기만적이다. 우리는 불행해 왔고, 자주 불행하며, 높은 확률로 불행한 미래를 살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 비극을 기록하고, 적절한 방법을 모색하여 대처할 수 있을까? 결국은 서로의 언어를 해독할 수 없는 이방인임을 인정하고 독립된 삶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소통의 가능성을 믿고 연대를 도모할 것인가. 보들레르의 언어를 빌려 이야기를 건네 오던 작가는 이제 명확한 전언 대신에 고독한 불통을 고백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방인이 아니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방인의 세계가 충돌하지 않는 우주가 존재했던 적 역시 없었다. 한 줄기의 언어가 흐르는 세계에서 파편화된 이방인의 세계로 이주해 온 작가가 다음으로 제시할 세계의 언어가 궁금해진다. / 이현(미술이론)
출처 - 갤러리팔레드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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