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데갤러리
2015년 8월 8일 ~ 2015년 9월 25일
인간은 자연을 늘 신비스러워한다. 자연의 초인간적인 위력과 거대함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그것의 발생 기원(Ursprung)이나 원본(das Original)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자연이 거기에 ‘스스로 그렇게 있음’에도 그 기원이나 원본에 대해 궁금해 한다. 발생(Entstehung)의 신비가 예부터 인간을 참을 수 없이 유혹해온 탓이다. 일찍이 기원전 8세기의 시인 헤시오도스가 무사이(Mousai) 여신들의 찬가로 발생의 신비를 노래한 것이나 탈레스가 물에서 원질(archē)의 단서를 찾으려 한 것이 그러하다. 나아가 엠페도클레스가 물, 불, 공기, 흙 등을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만물의 뿌리’가 되는 네 가지 요소로 간주했던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근대의 범신론자인 스피노자는 자연(Natura)을 소산적(Naturata)일뿐만 아니라 능산적(Naturans)이라고 하여 신의 섭리가 자연에 온전히 편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자연의 신비를 신의 ‘예정조화’라고도 믿었다. 그에 비해 오늘날 물리학자인 일리야 프리고진은 그 신비스런 질서를 『혼돈으로부터의 질서』(Order Out of Chaos, 1984)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연의 질서를 가리켜 불안정적이고 불확실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아마도 어떤 탈무드의 교과서들이 창세기의 신이 바랐을 것이라고 여기는 제한된 희망에 대한 공감만을 불러일으키는 위험하고도 불확실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 1966)에서 ‘인간이란 기원이 없는 존재, 고향이나 생일이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존재의 기원에 대해 이의제기하는 일’이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이처럼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화에서 현대과학에 이르기까지 이제껏 인간은 자연의 발생기원으로서, 또는 자연의 시원으로서 창세의 질서(Kosmos)가 발생하기 이전인 암흑의 혼돈에 대해 궁금해왔다. 본래 카오스(Chaos)는 <입을 벌리다>(chainein)라는 동사의 명사화로서 <캄캄한 텅 빈 공간>을 의미한다. 허무가 점령한 무질서(질서 이전)의 공간이다. 그 때문에 모름지기 인간은 거기에 자연의 질서에 대한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가 있다고 믿어온 것이다. 신화나 종교도 그랬고, 과학이나 철학도 그러했다. 문학도 그랬고, 미술도 그러했다.
이를테면 8세기의 로마시인 오비디우스(P.N. Ovidius)는 서사시집 『변신이야기』(Metamorphoses)에서 카오스를 만물의 모든 가능성이 은폐되어 있는 <종자들>(semina)의 혼합상태라고 가정했다. 춘원 이광수도 그 상태로부터 질서로의 변화를 금강산 비로봉에서 천지창조의 순간에 비유하며 지은 시집 『금강산 유기(遊記)』(1924)에서 <홍몽(鴻濛)이 부판(負板)하니>라고 표현했다. 그는 암흑의 카오스(홍몽)에서 시작된 천지의 웅대한 개벽(부판)을 그렇게 상상했던 것이다. 그것은 색면 추상의 거장 바넷 뉴먼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1946년 <창세기>, <태초>, <발생순간> 등으로 표현한 혼돈에서 질서에로의 미학을 숭고미라고까지 규정했다. <이제 숭고가 도래했다>(The Sublime is Now, 1990)는 것이다.
작가 우종택은 일찍부터 자연의 시원성(Originalität)에 대한 아드리아네를 즉물주의(卽物主義)에서 찾아온 조형예술가다. 그의 조형 프로젝트는 질서의 시원을 줄곧 현상의 즉물성(Sachlichkeit)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질서(자연)의 현전성(現前性)보다 즉물 자체(Sache-an-sich)가 무엇인지를 물으며 질서의 원향(原鄕), 즉 카오스에 대한 우리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가시적/비가시적 존재의 절대적 ‘선차성’(priomess)에 대한 기대감도 드러내고 있다.
원본과 원향의 신비한 사정은 아직 질서화되지 않은 비사물(Unding)의 중립성에 있다. 춘원이나 뉴먼처럼 원향과 시원에의 상기(anamnesis)를 시도해온 그의 영혼이, 그리고 그의 조형적 신기(神氣)가 귀향을 위해 자연에 거슬리지 않는 순리적 연상을 신들린 듯 토해내고 있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질서에 대한 존재론적 중립을 표상하기 위해 그의 조형의지가 신내림 받고 있는 것이다. 자연물의 중립적 생기에서 얻은 영감이 이제껏 <시원의 기억>들로 본풀이 하듯 원향제를 올려온 연유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의 작품들은 관념이나 물상(物象)의 재현체라기보다 '영혼의 재현체'(Seelesrepräsentanz)인 것이다.
우종택이 몸짓하는 ‘시원에의 상기’(想起)는 다름 아닌 탈재현적 추상(abstractiō; 배제나 추출 행위를 의미한다)이다. 그에게 추상은 우선 복잡한 가시적 질서의 소거이거나 부정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존 라이크만(J. Rajchman)이 추상을 가리켜 오직 '부정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것, 일종의 신성한 ‘부정의 신학’과 같은 것이라는 주장을 연상케 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1915)처럼 재현적인 형(Form)과 선(Linie)의 배제를 통해 ‘존재의 0도’(0 Grad des Sein)에로 돌아가려는 시도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또한 우종택에게 시원에의 추상적 연상은 비가시적 인출(引出)이나 다름없다. 그에게 추상(abs-tractus)은 ‘밖으로 이끌어내다’를 뜻하는 어의 그대로 모든 존재의 조건인 특정한 리미트(Limit)에 종속되지 않은 중립적인 영감을 실현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미 <회화 프로젝트, 묻다>(2014)의 연작들을 통해 보여준 추상공간의 이중상연이 그것이다. 거기서 그는 무엇보다도 자연(질서)에 대하여 느껴지는 힘과 느껴지지 않는 힘, 보이는 힘과 보이지 않는 힘을 보고 느끼도록 추상화한 것이다.
이렇듯 ‘추상화한다’(abstrahieren)는 것은 기본적으로 ‘생소한’, 또는 ‘시원의’ 영감을 빌어 내재적인 생기(힘이나 느낌)를 밖으로 이끌어낸다(abziehen)는 것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들뢰즈와 가타리도 ‘추상화’란 환영주의적 공간을 벗겨낸 결과라기보다 그것에 선행하는 그 무엇, 즉 맨 처음에 등장한 그 무엇이라고 하여 그것이 동기에서도 ‘최초의 것’임을 강조한다.
실제로 그것은 작가(우종택)가 지금도 질서의 시원을 줄기차게 묻고 있는 까닭과도 맞닿아있다. 그래서 모든 존재의 원향에 대해 추상적으로 표상하려는 그의 조형욕망은 모름지기 파라노적(paranoid)이기까지 하다. 질서의 시원에 대해 더욱 내면화하고 있는 그만의 노스탤지어가 마법의 단서에 대한 물음을 좀처럼 멈추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우종택이 추구해온 시원의 신비에 대한 조형적 기투(企投)는 해석학적이다. <시원의 기억> 이후 이중상연하는 일련의 작업들이 해석학적이고 추체험적인 탓이다. 이제껏 시원의 영매와도 같은 강신(降神)의 흔적 찾기에 유달리 몰두해온 그가 몸소 접신하기 위해 마련한 것은 다름 아닌 신목(神木)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의 분신들이나 다름없다. 질서의 시원에 대한 영감과 직관에 따른 ‘투시의 창’(fenestra aeternitatis)이 그를 신들린 듯 (목신들을 통한) 추체험(Nacherlebnis)의 공간으로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해석학적 미학은 토대론적이고 수직(垂直)존재론적이다. 그가 신목을 해석의 매체로 선택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본래 수목상(樹木狀)의 근원주의적 수직존재론은 모든 존재의 시원이나 배후에 대한 불안감을 근원적으로 치유받기 위해 고대인들이 기독교보다 먼저 고안해낸 종교적 교의와도 같은 것이다. 심지어 무속의 원초의식조차 그것을 영계의 지상명법(Imperativ)으로 삼는다.
이처럼 그가 보여주는 시원에 대한 해석학적 추체험의 실천은 수목상의 영감과 지평융합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시간과 영원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 끝날지 모를 그의 프로젝트가 더욱 신비스럽다. 그것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과 시간 밖에 있는 것(영원한 것) 사이의 구분이 인간의 상징적인 활동의 근원에 있다. 아마도 이것은 예술 활동에서는 특히 그러할 것이다”라든지 “예술적인 활동은 대상물의 시간적 대칭성을 파괴한다. 그것은 우리의 시간적 비대칭성을 대상물의 시간적인 비대칭성으로 번역하는 흔적을 남긴다”는 물리학자 프리고진의 생각과 다를 바 없다.
그의 해석이 남겨온 추체험의 흔적들은 다수다양화(多樹多樣化)를 지향한다. 이를 위해 그는 비대칭적으로 이중상연하는 접신의 향연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목들을 따라 혼돈에서 질서에로 지나온 억겁의 시간들을 소급하기 위해서다. 그가 평면을 붙박이로 고립시키는 이젤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아마 그 역시도 1947년 1월 잭슨 폴록의 개인전을 보고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이제 이젤회화는 죽었다>(Nation, 2월호)고 평한 심정 그대로였을 것이다. 추체험이 탈아(脫我)나 무아(無我)의 찰나에 이를수록 그에게는 접신하는 자와 같은 즉흥성과 속도감이 더욱 요구되었을 터이다.
우종택의 작업 과정은 몰입의 속도나 영감의 즉흥성에서 어떤 과정미술(process art)보다도 역동적이다. 그의 조형속도는 어떠한 금기나 규범도 위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애초부터 암흑을 가르는 창세의 질서가 혼돈의 위반이었듯이 미술의 금기나 규범 또한 깨트리고 위반하기 위해 있는 것임을 몸소 실증하려 한다. 그 때문에 지금도 시원을 향해 무한(infīnītus)으로 치닫고 있는 그의 추상기계들은 속도나 규범뿐만 아니라 모든 경계도 뛰어넘을 태세이다. 그의 작업들은 “오늘날 미술가들은 모든 권리를 찬탈하고 모든 표현 수단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으며, 모든 금기 사항을 위반했다. 그들은 고상한 문화적 태도에 대한 규범의 칙령을 뒤엎고, 모든 경계를 뛰어넘었으며, 매일 새로운 영역을 탐험하고 추가시켰다”는 장-루이 프라델(J-L. Pradel)의 주장을 편들고 있는 셈이다.
우종택의 프로젝트 속에 참여하면 누구라도 이내 감각의 권태(l'ennui)에서 깨어난다. 그 작용인으로서의 역동적 동태가 관람자의 무방비한 감각을 긴장시키며 영혼의 수면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들은 질서의 시원에로 데려가려는 강신술사의 영매(靈媒)가 되기 때문이다. / 이광래(강원대 명예교수, 미술철학)
출처 - 보데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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