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당문화플렛폼
2021년 10월 26일 ~ 2021년 11월 13일
다사로운 서치라이트
지상역을 지나는 전철 안에서 정돈되지 않은 풀더미와 비닐하우스, 비포장도로의 향연을 하염없이 '내려다' 본 기억. 하천길을 따라 한강 쪽으로 산책이 길어진 날에 만난 철조망 앞에서의 이질감. 먼 길을 떠났다 돌아오는 IC 부근에서 고층 주상복합건물이 시야에 들어올 때 안도감을 느낀 기억. 고양시 주민이라면 도심으로부터 살짝 떨어진 구간에서 한 번쯤 지녀봤을 잔상들이다. 비교적 낮은 지대로 내려와1 철길을 따라 걸으며 원거리에서 도심을 바라본다고 가정해보자. 신도시 속 또 다른 신도시를 개발중인, 혹은 개발이 중단된 풍경에 둘러싸인 곳에 서 있다. 고르지 않은 웅덩이와 흙더미, 지저분하다 못해 음산한 야생 잡초, 크고 작은 크기의 터널, 흙과 쇠냄새. 밤이 되자 시내의 불빛들이 아득하게 느껴져 마치 밤의 해변가 한 가운데에 있는 것 같다. 익숙한 스카이라인을 뒤로하고, 긴장된 몸을 숙여 길을 가로막는 물체를 향해 느리게 서치라이트를 비춘다. 걸리적 치이는 것 마다 지나치지 않고 쭈구려 바라본다. 강한 불빛이 눈에 띌까 염려하며, 라이트 표면을 손으로 반 쯤 가리고 숨을 죽인다.
소윤과 지홍2은 지난 몇 개월간 틈틈히 만나 경의중앙선 수색역부터 탄현역까지 따라 걸으며 이 도시를 마주했다. 전시 ≪낮은굴≫에 놓인 일곱 가지 덩어리 단위로 둘의 작품을 감상하면, 각 장면 속에 이들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장면에서의 시각, 시선을 두는 길이, 표현의 강약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데, 두 축의 무게가 매우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소윤이 만나는 대상 하나 하나 앞에서 몸을 웅크려 천천히 그것을 바라보았다면, 지홍은 그러한 대상을 중심점에 두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둔각으로 훑었을 것이다.
이들의 행적을 따라 먼저 웅덩이를 살펴보자. 소윤은 이곳에서 웅덩이가 웅덩이가 아닌 날을 떠올렸다. 웅덩이는 비가 내리고 나서야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자, 금세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소윤은 그것을 웅덩이로서 고스란히 기억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동시에 증발하거나 묻히는 작은 다른 웅덩이에 관해서도 생각했다. 옅은 먹을 얇게 쌓아올리면 하나씩 보듬을 수 있을까. 공을 들여 하나의 웅덩이에 쏟은 감정을 기억하려 애썼다. 지홍은 이 웅덩이가 어느 것의 자취인 것인지 추적했다. 나무나 콘크리트 기둥이 있던 곳일까, 그것들은 어떻게 뽑혀나갔을까 하는 생각들. 주변의 풀과 돌맹이가 지난 시간을 기억해주진 않을까. 숨을 참으면 겨우 들릴 것 같은 그들의 속삭임을, 마찬가지로 옅은 먹으로 그러나 하나 하나 조심스럽게 쳐내듯이 새겼다. (<해를 등지고 걷는 모양>, <쉿잇>)
웅덩이 주위에서는 흙더미가 발견되기 십상이었다. 웅덩이의 깊이만큼 솟아오른 더미들이 고스란히 놓여있었던가 하면, 시간이 지나 주변에 자연스럽게 퍼트려진 더미도 있었다. 웅덩이와 흙더미가 한 몸으로 뒤엉켜, 서로의 의미를 퇴색한 그 지점에서는 대체로 발을 헛디뎠다. 우묵한 곳에 발을 헛딛고 나서야 그곳이 진흙더미였던 것을 알아챘을 땐, 장마가 다가오고 있는 여름을 느끼기도 했다. 움푹한 곳 앞에서 허든거리고 돌아가다보니 걷는 동선과 속도에 리듬이 생겼다. (<두 눈_움,푹>) 자주 마음을 쏟게한 ‘빈집’들의 풍경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집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수많은 집을 그렸다. 지금은 이미 사라졌을지 모르는 집들의 마지막 초상을 그려준다는 마음으로. (<남은 굴>,<미운자리>) 여기저기서 쉽게 마주했던 '막' 또한 둘을 잡아두었다. 긴 호흡으로 걷고 싶었던 이들 앞에 드러난 공사 가림막이나 방호벽 등의 장막은 잘게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럴 때마다 소윤은 막의 형체와 질감 자체에 눈을 고정했다. 지홍은 저항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공사장 임시 가림막에 작게 뚫어둔 구멍 속으로 시선을 돌려, 그 사이로 보이는 풍경을 관찰했다. (<우리 우리>,<그 너머>)
유난히 장막을 자주 마주친 것으로부터 고양시가 지자체 중 가장 큰 면적의 군사시설보호구역을 보유한 점3, 유사시 진지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신도시 아파트 라인을 설계한 도시인 점4 따위를 떠올리며,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도시 풍경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인공 장막 뿐만 아니라 무성히 자라난 들풀도 충분히 긴장감을 주었다. 막과 샛길의 틈에서 발견한 풀더미는 반듯하게 계획된 대단지 아파트 덩어리들과 대비를 이루며 생경함을 자아냈다.
도시의 이면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장애물을 마주할 때마다 소윤과 지홍은 그 긴장을 적극적으로 응시했다. 이러한 이질감은 경계 앞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들의 움직임에 고스란히 체화되었다. 둘은 '넘을까' 고민하던 순간과 넘고난 뒤의 통제를 염려할 때 신체의 무력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이들의 불안과 무기력 보다는 쾌락을 동반하는 극복 의지에 더 마음이 쓰였다. 둘의 움직임은 차가운 ‘서치라이트’에 포착될까 두려워하는 수동적인 걸음이 아닌, 어둠 속에서 스스로 높은 색온도의 불빛을 비춰가며 도시 이면의 작은 것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적극적인 것이었다. 구덩이를 비추고, 그곳에 고인 물을 뛰어넘거나 빠져도 보고, 장막과 풀더미를 들추거나 그 뒤에 숨어보는 등, 근육의 사용 범위와 보폭을 어느 때보다 크게 하면서 작은 것 앞에서는 유연하게 구부려가는, 온전하고 주체적인 몸이었다.
폐역을 개조한 전시장에서 작품을 하나씩 따라다가 보면, 전시장이 놓인 도시의 풍경을 두 작가의 보폭과 시선의 높낮이로 가늠해볼 수 있다. 멈춘 대상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나란히 늘어놓은 소윤의 감각 지점(.)과, 대상 주위의 풍경과 서사로 점점(...) 확장해간 시각이 드러난 지홍의 작업은 서로 균형을 이루며, 전시장 걸음의 감각을 리드미컬하게 만들어준다. 소윤의 작업에서는 그것을 멀리 두고 볼수록 대상과의 간격과 마음을 줄다리기 해보던 고민의 윤곽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리고 지홍의 작업은 멀리서 볼 땐 거친 듯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관찰 대상의 내밀한 속삭임에 귀 기울이게 하는 세심한 붓터치가 눈에 밟힌다. 직진하던 경로에서 예기치 못한 구멍과 더미를 만나며 느슨한 루트를 만들어간 소윤과 지홍처럼, 우리는 전시장을 조심스럽게 걷다 마주하는 중간중간의 편지(<두 눈>) 더미 앞에서 고개를 숙이기도, 허리를 굽히기도, 쪼그려 앉기도 하면서 '점점' 낮은 굴로 들어가본다.
김유빈(전시기획자)
1. 고양시 중 한강 인접 지역은 저지대다. 1990년 중부 한강 대홍수 때 고양시 일대가 큰 홍수 피해를 입기도 했다. “한강둑 붕괴 고양군 ‘물바다’ - 일산등 5개읍면 1만여가구 잠겨”, 한겨례신문, 1990년 9월 13일, 1면
2. 원소윤(Won So Yun, b.1996), 전지홍(Jeon Ji-hong, b.1995)
3. 2021년 해제 발표, “고양시 군사시설 보호구역 해제 지역 안내”, 고양시 (2021년 10월 6일)
4. “일산신도시 유사시 진지활용 설계”, 연합뉴스, 1994년 9월 26일 (2021년10월7일)
참여작가: 원소윤, 전지홍
필자: 김유빈
자문: 장혜정
디자인: 정재연
후원: 고양문화재단, 고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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