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갤러리
2025년 5월 29일 ~ 2025년 7월 10일
자취를 감춘 줄로만 알았던 존재들이 현실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때가 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잊힌 사건이나 이야기들. 그것들은 수명을 다한 듯 고요했다가도 불현듯 그 존재감에 불을 켜 현재의 시공간을 밝힌다. 《Silent Dragger》는 기억과 언어가 사물로 전이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시간성에 대한 전시이다. 이곳에 모인 작업들은 사라진 장소와 경험을 다시 구축하고, 대체된 이미지와 원본의 경계를 흐리며,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가시화한다. 전시 제목인 ‘Silent Dragger(조용히 끄는 사람)’는 사라져가는 것을 붙잡아 두고, 정착되지 않는 것들을 형태로 끌어오는 태도를 가리킨다. 원정인과 키시앤바질은 각자의 방식으로 흩어진 기억과 목소리를 불러오고, 그것들을 물질과 언어로 전환하여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
원정인은 기억을 물질화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그는 도자, 사진, 영상 등 서로 다른 시간성을 가진 매체를 통해 사라진 흔적을 재구성하고, 기억이 사물에 스며들거나 유리되는 방식을 연구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전 작업과의 연장선상에서 책 『Road is Land』를 기반으로 한 사진, 영상, 도자 작업을 선보인다. 책은 2023년 겨울, 로드아일랜드에 머물던 집을 기록한 필름 사진, 3D 모델링을 통해 재현한 집의 캡처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다.
전시에서 원정인의 작업은 물질이 기억을 대체하는 순간과, 그 대체물이 결국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탐색한다. 기억은 고정된 하나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을 담는 방식에 따라 변형되고 재구성된다. 필름과 3D 이미지, 도자의 병치는 원본 없이도 현실을 떠올리게 하고, 동시에 원본과의 거리감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이처럼 원정인의 작업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기억을 유지하고자 하는 시도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균열과 어긋남을 드러낸다. 사라진 것들을 다시 불러오는 과정에서 생성된 새로운 풍경과 형상을 가지게 된 기억들이 만들어내는 낯선 감각을 마주하려 한다.
키시앤바질은 두 사람이 겪어온 시간을 시각적, 언어적으로 구성한다. 작업에 등장하는 말과 글은 과거의 경험과 기억을 현재로 끌어오려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들은 오랜 시간 개인 내부에 머물러 있던 이야기를 꺼내고 그 흔적을 남기기 위해 노력한다. 이번 전시에서 이들이 나눠온 대화의 여정은 전시작을 구성하는 데 가장 단단한 출발점이 된다. 듀오는 함께 지나온 소통의 시간을 떠올리며 각자 8개의 입체 작품을 준비한다. 그리고 준비해 온 작품을 하나씩 꺼내어 두 개의 입체가 한 쌍을 이루도록 한다. 둘로 나뉘어 있던 존재는 비로소 하나의 덩어리로 연동된다. 이 과정에서 키시앤바질은 타인과의 연결에 대해 고민하며, 서로에게 건네는 지지의 마음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또한 이번 전시에서 이들은 서로에게 건네 온, 수많은 말과 글을 되돌아본다. 자신의 목소리가 어떤 뿌리를 가졌는지, 그 이야기가 어떠한 방식으로 세상에 닿아야 할지 생각한다. 신중하게 써내려간 문장을 품은 상자와 말의 앞뒷면을 보여주는 월 텍스트는 언어가 가질 수 있는 물리적 형태와 그것이 해낼 수 있는 일들을 상상하게끔 한다.
《Silent Dragger》에서 원정인과 키시앤바질의 작업은 사라진 것들을 불러오는 방식에서 교차한다. 원정인은 물질을 통해 기억을 구축하고, 키시앤바질은 언어를 통해 내면의 목소리를 형상화한다. 이들의 작업은 원본과 대체물, 재현과 왜곡의 경계를 넘나들며 기억이 지속되는 방식을 탐구한다. 세 작가에게 기억이나 말은 잡히지 않는 것이며 형체 없이 부유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한곳에 모아 겹쳐 놓으며 해상도를 올려간다. 또한 시간의 잔여물, 흐려진 말이 힘을 잃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정서적, 심리적 흔적을 담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전시는 우리 곁을 지나쳐간 수많은 존재를 조용히, 하지만 분명하게 지금 여기로 다시 끌고 나온다.
참여 작가: 원정인, 키시앤바질
출처: 신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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