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안갤러리 서울
2018년 9월 12일 ~ 2018년 10월 25일
Yoon-Hee, Sphérique, 2017, Brass,copper, Diameter 118cm (for each)
프랑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 언어를 구축하고 있는 작가 윤희의 조각 작품과 드로잉 작업을 감상할 수 있는 개인전 <In/attendu>(이나땅뒤)가 리안갤러리 서울에서 2018년 9월 12일부터 10월 26일까지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이번 전시의 표제로 프랑스어 단어 ‘inattendu’를 선택한 이유는 1980년대에 프랑스에 정착하여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작가의 배경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녀의 작업을 가장 함축적으로 잘 표현할 수 있는 적정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기다리다’를 뜻하는 프랑스어 동사 ‘attendre’(아땅드르)에서 파생한 형용사로 ‘기다린, 기대된’의 의미인 ‘attendu’(아땅뒤)에 부정의 접두사 ‘in’을 더해 ‘예기치 못한, 뜻밖의’라는 뜻의 형용사이자 ‘우발적 사건’을 의미하는 명사가 되기도 한다. 여기에 대립을 뜻하는 부호 ‘/’를 붙여서 ‘우연성과 기다림’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는 작가의 예술 세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스스로를 조각가로 정의하지만 윤희의 조각 작품은 어느 한 예술 범주로 규정하거나 특정 미술사조로 편입시킬 수 없다. 흙과 같이 반죽을 덧붙이고 떼어 내 형태를 완성하거나 목재, 석재와 같은 재료를 사용하여 깎아 내고 다듬는 조각 제작 방식은 물론, 원하는 형태의 주형에 금속 용해물을 주입하여 예정된 조형적 형태를 획득하는 기존의 모든 조각 제작 문법을 거부하고 그녀만의 새로운 제작 양식을 구축했다. 제철소 등의 산업 현장에서 찾아낸 청동, 황동, 알루미늄, 구리와 같은 여러 금속 재료를 800-1200 〬C의 고온에 녹여내 원추 혹은 원형의 주형에 힘과 방향, 속도, 양 등을 달리하여 던짐으로써 그로 인해 용액이 쌓이고 결합되며 흘러내리는 과정이 반복된다. 비록 육중한 용액의 무게로 인해 직접 수행하지는 못하고 그녀가 주문하는 대로 제철소의 전문 작업자에 의해 간접적으로 실행되지만 어쨌든 작가의 근본적인 개입은 여기까지로 볼 수 있다. 기본적인 주형의 형태를 제외하고는 최종적 결과물은 작가 자신도 예측할 수 없으며 최소한으로 의도한 상황에서 물질이 스스로 작용하며 ‘우연적’ 결과물로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윤희는 자신의 조각은 그 스스로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것이 된다는 것은 진전이 되었든 퇴보가 되었든, 일정 지속 기간이 흐르는 동안 상태나 외형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자연에서 채취된 금속은 정련과 제련 등의 공정 과정을 거치며 뜨거운 용광로에서 용해되고 다른 형태로 응고되면서 여러 가지 상태의 변화를 거듭한다. 이렇게 되는 것은 존재의 소멸이 아닌 변형으로서 본래의 외형은 사라졌을지언정 다른 형태로 그 존재성을 이어 간다. 이번에 전시된 청동이나 황동으로 제작된 《Sphérique》(구형) 연작에서 볼 수 있듯이 공기와 맞닿아 산화되는 시기와 면적에 따라 조각의 표면은 청동의 본래 색을 유지하거나 바래지며, 완전히 산화되어 재와 같이 확연히 다른 물질처럼 보이도록 변화하기도 한다. 또한 금속 용액이 많이 쌓이면서 응결되어 돌출된 부분이 생성되게 하거나 용액 방울들이 흩뿌려지고 엉기면서 얇고 부드러운 레이스와 같은 가장자리 형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렇게 스스로 되는 형상에 대한 기다림은 물질 그 자체의 본질과 시간성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반영한다. 시간은 돌이킬 수 없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감각 불가능한 것이지만, 우리는 선험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의식할 수 있다. 또한 모든 현상은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과 움직임은 함께 측정되는데, 비록 시간 그 자체가 움직임은 아니지만 어떤 변화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움직임이라고 했다. 윤희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보여 주고자 한 것은 바로 이 시간의 유동과 함께 변모를 거듭하는 물질의 운동성이다. 작가에게 “작품을 제작하는 것은 곧 시간에 저항하는 것”이며 자신의 조각 작품은“시간과 엔트로피에 의하여 변화해 나가는 과정을 상기시키는 과도기적 상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자연의 단편들”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산업 현장에서 가져온 금속 재료는 자연의 일부를 이루는 한 예시로서 선택된 것으로 자연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언뜻 생각하기에 자연은 비유동적이고 고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자연에서는 모든 물질들의 끊임없는 변화와 재생, 향상과 훼손이 이루어진다. 작가가 언급했듯이 이러한 예측 불가한 무질서의 에너지를 생성하는 엔트로피가 증가한 상태는 자연 현상의 근본 원리이자 우주적 법칙이다. 그 스스로의 내적 필연성에 의해 질서 없이 스스로 생성되고 변모하는 물질들의 세계, 그것이 바로 자연이다. 볼록한 원형의 형태로 벽에 걸린 《Inattendu》 연작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게 축적되고 응고되며 힘찬 에너지를 발산하는 표면을 통해 이를 가시화한다. 윤희는 그 스스로 되는 자연의 단편을 조각으로 ‘재연’하고 미술관 공간의 맥락으로 편입시킨다. 최소한의 개입으로 스스로 되는 조각을 재연하는 것은 자연을 정복 대상이나 무기력한 순응의 개념으로 파악하지 않고 자연에 대한 관조적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그 일부가 되려고 하는 작가의 자연관을 드러내는 것이다.
비록 윤희의 조각 작품이 개별적으로는 개입을 최소화한 스스로 이루어진 하나의 조각 작품이지만 동시에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설치작품으로 볼 수도 있으며 작가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그녀에게 작품과 공간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며 상호적으로 연결되어 총체를 이루는 것이다. 또한 작품이 응집되는 곳과 산재된 곳은 그녀가 의도하는 ‘충만함과 비어 있음의 긴장과 정적을 동시에 일으키게 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공간과 물질 덩어리의 총체는 구체적, 실재적 존재감이 잠재된 상태이다. 즉 관객이 관조적 시각으로 이러한 작품을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자, 실질적으로 작품 사이를 오고가며 긴장과 정적 사이의 균형을 깨뜨리고 잠재된 존재감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실질적으로 유효화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조각 작품과 함께 생동감 넘치는 드로잉 작업도 만나볼 수 있다. 작가는 최근 들어 드로잉 작업이 정확하게 조각 작업과 같은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전시장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볼 수 있는 〈Projeté triptyque〉(내던짐의 세폭화) 등의 작품은 검정색 천연 안료를 먹을 개듯 희석시켜 작가가 고안한 전용 도구를 이용해 방향과 힘의 세기를 순간적, 직관적으로 결정하여 내던지듯 그려 나간 것이다. 점성이 되직한 곳은 뭉쳐서 응집되고 묽은 곳은 흘러내리며 결국 스스로 그 형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작가가 의도한 것과 우연적 결과가 절충되며 하나의 총체로서의 형태가 완성된다. 특히 가녀린 몸을 지닌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듯한 격렬한 에너지와 기운을 한껏 느낄 수 있다.
출처: 리안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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