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윌링앤딜링
2025년 7월 9일 ~ 2025년 8월 10일
이승찬은 화면이 엇나가고 파열한 추상화를 창작해 왔다. 이러한 연유로 그의 회화는 환영을 부정하는 회화로 비칠 수 있으나, 반대로 그는 비실재로 치부된 이미지(image)를 현실로 귀환하기 위해 흩어졌던 화면을 누적하고 조합하는 형식을 구사했다. 초기작이었던 <검은 사각형> 연작부터 근래의 <BF> 연작까지 작가는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를 반복적인 잉크젯 프린팅(Inkjet Printing)을 통해 캔버스의 전면을 뒤덮었다. 서류나 상품의 표지, 혹은 현수막 등을 출력하는데 쓰는 잉크젯 프린트는 사무실과 인쇄소 곳곳에 통용되는 인쇄법으로 영구적이기보다는 소모적인 성격이 강하다. 작가는 이 대량 인쇄 기술을 활용하여 인터넷에서 저렴하게 유통되는 무료, 유료 이미지, 저장 폴더에 보관해 둔 사진 등을 캔버스 위에 중첩하여 추상화로 둔갑시켰다. 그가 검색 엔진을 통해 추려낸 이미지들은 홍보 디자인이나 자료 샘플 등의 용도로 만연하게 유통되는 기록물들이었는데, 네트워크 속에서 무분별하게 공유되는 만큼 출처와 목적이 혼성되고 불분명했다. 그 속에 기록된 피사체는 특정 시간과 장소 속에서 무게, 체취, 온도 그리고 운동을 간직했던 존재였으나, 그것은 삶에서 단절되고 실체가 없는 디지털 값으로 치환되어 채도와 조도만 남은 잔상으로 스쳐 갈 뿐이었다. 이승찬은 이처럼 다른 이미지의 리소스로 전락해 버린 이미지, 곧 물질과 역사가 소실되어 사이버 공간에 부유하는 디지털 불순물을 캔버스의 표피로 압축하여 ‘유사 회화’를 구현해 왔다. 그의 그림에서 이미지의 원인이 되었던 존재는 볼 수 없지만, 반복되는 인쇄 속에 누적된 색, 밝기, 온도는 한때의 존재를 흐릿하게 전하는 촉매제가 되어 여기 이곳의 시간과 공간에 틈새를 비집는 창구로 복귀했다.
동시대의 미디어 환경에서 작가에게 이미지는 정체를 잃어버린 균일하고 미끄러운 인상이었다. 어루만지고 헤아리기 전에 급격히 전환하는 장면은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송신하는 것이 아닌, 존재를 잊히도록 현시하는 듯했다. 이에 대한 나름의 대응책으로 그는 이미지를 디지털 환경으로부터 분리해 소멸을 거스르는 몸체를 구현하고자 했다. 기계적 인쇄술과 회화적 수작업이 교차하는 과정은 다양한 스크리닝(screening)이 편재하는 도시 환경에서 수고스럽고 비효율적인 노동이었다. 그런데도 작가가 디지털 매체에 수집한 이미지, 곧 세계의 파편을 전통 매체 속에 정착시키고자 함은 오늘날에 둔감하게 사유가 되는 이미지의 추념성을 재고하기 위해서였다. 근대 직후로 사진술이 발전하고 보편화되기 이전까지 이미지는 본래 회고적 수행이 수반된 노동 집약적 매체였다. 당대의 이미지는 스튜디오에서 긴 시간의 연구와 그리기를 거쳐서 구현되어야 했기에 정치, 종교, 역사와 같은 거시적 목적이 아니라면 사적인 이유로 창작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러한 희소성 때문에 과거 회화는 민중보다 상류층의 권위를 위해 동원되었다는 한계가 있었지만, 역사를 기리는 책무와 신중한 작업이 수반되었다는 점에서 추념의 의미는 유효하게 작동했다. 반대로 장소의 구애와 전문성 없이도 이미지의 생산과 유통이 자유로워진 오늘날, 기록의 과정이 간소화됨에 따라 추념의 의미도 함께 축소된 듯하다. 동시대 이미지는 역사에 편승하지 못한 미시사(微視史)를 기록하고 회고할 가능성을 지녔음에도, 디지털 플랫폼에 업로드 되는 순간 소비 콘텐츠의 일부로써 낭비되고 소멸할 위기에 놓여버렸다. 작가는 이에 대한 반감과 회의로 과거와 현재의 기록 행위를 접목하여 이미지의 추념성을 재해석한다. 한때 특수한 계층의 명예, 신념, 허영을 기리기 위해 그려졌던 회화는 오늘날의 소외된 이미지, 즉 누군가의 자취를 안착하는 장치가 되어 디지털의 흐름 속에 잊히고 사라져 간 시공간을 보증한다.
2024년부터 작가는 잉크젯 프린팅을 혼용해 온 방식을 보류하고 회화의 안료만이 두텁게 층을 이룬 <흉터>연작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과거의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해당 연작은 디지털 이미지보다 회화의 성질에 초점을 둔 듯하나, 이미지를 접촉하고자 한 해체적인 방법론은 회화적 표현에서 동일하게 적용이 되어 잔상에 대한 추념을 이어갔다. 즉흥적인 표현이 도드라진 <흉터>는 캔버스를 빼곡하게 채운 레이어 위로 여러 갈래의 날카로운 스크래치가 스친 듯한 양상을 보여준다. 뭉쳐진 잉크 찌꺼기를 헤집은 듯, 여기저기에 상흔이 새겨진 회화는 벗겨진 표면 사이로 이면에 깔렸던 색과 입자를 드러낸다. 어렴풋이 디지털 화면의 글리치(glitch)와 피부의 긁힌 상처 등을 연상케 하는 장면은 선명한 물질을 현시하나 정체는 가늠할 수 없는 시공간을 내보인다. 접촉의 흔적이 가득하지만, 그로 인하여 뭉개지고 갈라진 화면은 끝내 그 너머로 닿지 못할 간극을 부각하는데, 이처럼 도상 대신 촉각적인 질감과 여러 층위의 색을 표출한 더미는 존재의 부재 속에 잔류하는 이미지의 파편들을 구현한다.
한편, <흉터>연작에서 이승찬은 디지털 환경의 이미지만이 아닌, 기록으로 남겨지지 못한 체 기억 속에 잔존하는 인상들까지 더듬어 본다. 하나의 흉터가 도래하기 전까지, 화면에 대한 오랜 시간의 응시와 왕래 속에서 작가는 눈에 맺히는 상(相)과 기억 속의 상 사이에 벌어지는 균열을 직감했다. 외부로 유입되는 인공의 장면과 내부로부터 부상한 기억의 편린은 한 사람의 관념 속에 뒤섞이며 예측하지 못한 정동으로 작용했으나, 이는 금세 스쳐 의식 속으로 침체해버렸다. 특정한 순간의 잔상이었으며 모든 세월의 잔상이었을, 그러나 더 이상 마주할 수 없는 삶의 장면들에 반응한 몸짓은 그 흔적들을 안료로 짚어가며, 표면 위로 간신히 출현하다 이면으로 가라앉는 잔상의 물결을 물화(物化)하였다.
어느 날 이승찬은 가족의 식단을 위해 레몬의 효능과 레시피를 조사하던 중, 부수적으로 딸려 온 정보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 중에는 “삶이 너에게 레몬을 줄 때,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라는 영미권 격언도 섞여 있었다. 예측지 못한 상황이 들이닥쳤을 때 상황을 유연하게 대응하라는 의미다. 그에게 인상 깊게 다가온 또 다른 정보는 레몬이 16~17세기 유럽의 정물화 속에 바니타스(Vanitas)의 상징물로 활용되었다는 기록이었다. 자의와 타의로 알게 된 레몬의 비유들은 지금까지 작가가 주목해 온 이미지의 가변성과 공허성을 대변하는 듯한 이미지로 다가왔다고 한다. 서사와 장소가 사라진 표피, 그러나 디지털 환경과 도시 속에 풍경과 에너지로 작동하는 이미지는 주체의 의식에 자극을 가하고 추동을 일으키는 실재임과 동시에 부재이기도 했다. 이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명한 이승찬의 개인전, 《레몬》은 이미지의 가상 무덤이자 유적지로 펼쳐진다. 관객들은 흉터로 가득한 화면을 마주하며 그 현전을 몸으로 실감하지만, 그 유래와 끝을 짚어낼 수 없는 심연을 들여다보게 된다. 한시적이나 영구적인, 불명확하지만 구체적인 회화는 깊은 공허 속에 감추어진 우리의 모든 순간을 쪼개지고 흩뿌려진 이미지로 다시 이곳에 회귀한다.
참여 작가: 이승찬
출처: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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