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알콜렉티브
2026년 9월 4일 ~ 2026년 10월 17일
한 해가 다음 해로 건너가는 문턱, 12월 31일 23시 55분부터 1월 1일 0시 5분까지, 이영빈은 13년간 이 짧은 10분의 소리를 수집해 왔다. 작가 자신을 포함하여 서로 다른 장소에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맞이한 새해의 순간들. 이 순간을 생각하면 카운트다운과 환호, 따뜻한 포옹, 눈 맞춤, 미래를 향한 낙관과 지난날에 대한 회고를 머금은 대화 장면들이 떠오른다. 아끼는 이들 곁에서 복잡하고 지난한 온갖 문제들로부터 단숨에 벗어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새해 전야를 그려볼 때면 자연스레 그 순간을 함께 하는 누군가를 상상하게 되듯, 이 수집은 닿을 수 없는 타인의 순간을 상상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긴 시간을 한국이 아닌 독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온 작가에게 소리는 물리적인 거리를 넘어 특정한 시공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매체였을 것이다. 가족과의 통화 중 수화기 너머 들려온 목소리와 생활 잡음을 따라 자신이 없는 고향을 상상했던 것처럼, 또는 낯선 언어와 풍경 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리를 통해 아직 속하지 못한 타지의 문화와 분위기, 그들의 일상을 헤아렸던 것처럼. 그렇게 타자를 향한 그리움과 호기심이 겹친 자리에서 작가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며 해마다 같은 시간에 도착하는 순간을 모아 듣고 또 들으며 타인의 삶을 떠올려 왔다.
《EVE》는 그렇게 수집된 소리들과, 그 소리들을 반복해 들으며 상상된 장면으로서 드로잉이 모여 지어진 시공간이다. 이곳의 시간성은 서로 다른 순간에서 불러들여진 소리들이 만들어내고, 공간은 그러한 소리로부터 펼쳐진 장면들로서 드로잉이 세워낸 문과 벽, 창과 틈으로 형태를 갖추고 있다. 한 해가 기울어가는 시점에서 낮은 해상도의 소리와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장면들로 임시 구축된 이곳,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소리와 풍경을 듣고 마주하게 될까? 낱낱이 분해될 수도, 하나의 온전한 의미로 수렴될 수도 없는 혼합된 상태로 존재하는 소리들에 둘러싸인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도착할 소리 안으로 나아가는 일일 것이다. 소리의 첫번째 청취자였던 작가가 완결된 이미지가 아닌 끊임없이 분기하는 형상으로 드로잉했듯, 우리에게도 여러 갈래의 삶의 모습이 소리를 넘어 찾아오기를 기대하면서.
전시는 그러한 기대를 품고 소리가 스스로 드러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후 문을 열어두는 호스트(Gastgeber)의 마음으로 마련되었다. 호스트로서 《EVE》는 환대의 마음으로 먼 곳에서 녹음되었을 타인의 순간을 불러들이고 손님을 맞는다. 그러나 한국과 독일 어디에서도 이방인이었으며, 이곳 전시장 역시 잠시 점유할 뿐인 이가 타인에게 귀속된 시공간으로 또 다른 타인을 초대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이러한 조건에서, 소리를 녹음한 주인과 초대받은 관객은 손님으로서 안정적이고 순수한 환대를 누릴 수 있을까? 소리의 주인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구성한 이곳에서 오독될 것을 감수하고 있으며, 손님 역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문턱을 넘어 낯선 것을 마주할 담대함으로 자신마저 열어두어야 하기에 이곳에서 환대는 불안정해 보인다. 데리다의 말처럼, 이곳에서 환대라는 행위는 이미 구성된 안과 밖의 구분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호스트의 질서와 언어, 관점 속으로 타자를 포섭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배제와 적대를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 안에서 《EVE》가 여전히 타자와의 만남이 일어나는 문턱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기존 질서와 특정한 이념 아래 이방인을 흡수하는 방식으로서 열려 있음이 아닌, 이방인의 자리에서 또 다른 이방인을 맞아들이는 방식으로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옛 독일어 ‘Gast’가 손님이자 적이라는 상반된 의미를 함께 뜻한 것처럼, 이방인이 적과 손님 사이의 낯선 모습으로 도착할지라도 말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우선, 이방인의 자리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한정된 시공간에 맞추어 언제든 포장하고 다시 풀 수 있는 가벼운 물성으로 작업하는 까닭 역시 점유한 자리에 정착하지 않으려는 유목적 태도를 구체화하는 형식일 것이다. 나아가, 불특정 다수에게 열린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체득한 환대의 운동성, 즉 서로의 불확실성과 위험을 감수하면서 배제와 환대 사이, 경계와 환영 사이를 오가는 운동성을 전시의 조건으로 삼는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도착한 소리는 그러한 운동성을 구체적인 감각으로 옮겨놓는다. 축포처럼 들리던 소리가 다른 장면을 불러내고, 어떤 목소리는 다급함과 들뜬 기색 사이를 오가며, “여기 사람 있어”라는 외침이 순식간에 영화 속 대사로 전환되는 순간, 기대했던 안전한 타자가 아닌 불확실한 타자가 찾아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타자가 경험하는 것이 낙관인지 혼란인지 환희인지 재난인지 분별할 새도 없이, 그 세계를 구성하는 질서 안으로 들어갔다가 튕겨 나오고, 그곳에서부터 또 다른 타자를 떠올렸다가 그들 역시 상상된 타자임을 알아차리기를 반복한다. 여기서 반복은 환대가 감수해야 할 위험을 알면서도 환대를 시도하는 움직임이며, 그 운동성으로부터 닫힌 것처럼 보이던 순간에 타자의 삶과 접속할 틈이 열린다.
이때 종이의 앞과 뒤, 공간의 안과 밖의 경계를 느슨하게 만드는 드로잉은 환대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또 하나의 형식으로 작동한다. 반복되는 청취의 과정에서 벽지를 지지체 삼아 그려진 화면은 타자와의 만남이 번번이 빗나가고, 그곳에서 다시 맺을 수 있는 관계를 가늠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고정된 형상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이미지가 다음 이미지의 조건이 되고 이미 그려진 것을 토대로 또 다른 장면이 이어지는 드로잉의 구성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이는 나에게서 너에게로 단숨에 건너뛰는 일의 불가능성을 알고, 서로가 거주해온 세계를 타자가 들어설 가능성 속에서 다시 검토하고 미세하게 조정해 나가는 일과도 닮아 있기도 하다. 그러니 스스로를 갱신해가는 드로잉처럼, 우리도 각자에게 주어졌던 세계를 초과해 낯선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을까? 그것은 수많은 사람이 전시와 전시 사이를, 분주한 낮과 들뜬 밤 사이를 빠르게 오가는 시간의 틈에서, 각자가 쉽게 지나쳤던 현장을 다시 불러오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타자를 섣불리 재단하지 않은 채 맞이하는 일로부터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EVE》는 그 가능성을 향해 내기를 걸고, 타자와의 만남(encounter)이 예기치 못한 방문(visitation)으로 이어지는 E에서 V로의, V에서 E로의 회문적 운동 속에서 불가능한 환대를 거듭 왕복하고 재구성하는 전야제를 지속할 것이다.
김지율(씨알콜렉티브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참여작가: 이영빈
출처: 씨알콜렉티브
* 아트바바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운영시간
월요일 휴관
화요일 12:00 - 18:00
수요일 12:00 - 18:00
목요일 12:00 - 18:00
금요일 12:00 - 18:00
토요일 12:00 - 18:00
일요일 휴관
휴관: 일요일, 월요일, 공휴일
모든 프로그램은 주최측의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