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갤러리
2021년 6월 1일 ~ 2021년 6월 30일
어른들을 위한 동화
전시 타이틀인 ‘Serendipity’의 유래를 찾아보면 영국 작가 호러스 월폴Horace Walpole의 <The Three Princes of Serendip>이라는 우화(寓話)에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지난 300여 년간 민담, 역사, 사회학을 넘어 이제는 영화, 팝송, IT 분야에서까지 종종 쓰이고 있는 이 말은 이제 ‘운명’에 대한 새로운 무게감과 통찰력으로 세대를 아우르고 있다. 그것은 ‘destiny’나 ‘fate’와는 다르다. 이 두 개념은 무언가 주술적인 구석이 있어, 주어진 운명에 소극적으로 맞추어야 할 것 같은 환상성과 비애가 공존하다. 하지만 ‘serendipity’ 안에는 주체의 순간적인 행동이 하나의 선택으로서 확실한 지위를 갖고, 우연히 얻어진 행운도 자신의 것이라고 더욱 신뢰할 수 있다. 그것은 복잡하고 입체적인 자기 분석을 좀 더 분명하고 재미있게 만든다. 이번 전시는 그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느덧 열 번째 개인전. 공장갤러리에서는 작년 8월 ‘Acceptance :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안아줘’ 이후 두 번째다. 당시 진중한 관람객으로서 오래도록 감상하고 수 년 전 전시서문을 작성했던 인연 그 이전부터 보아온 이윤정 작가에 대한 시선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그와 대화를 나눠 봤다면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발랄함 속에 무섭도록 정직하고 세련된 진지함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대화는 각자가 탐구하는 이상의 것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이 전시를 있게 한 원천이자 부제인 ‘너와 나, 우리들의 우연한 만남 속에서’와 상통하는 지점이다. 좀 더 들어가 보면, 어떤 선택들이 그 우연들을 연속된 만남으로 가져가게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이에 결부될 수 있는 말들은 행동, 실천, 계획 따위일 텐데, 그 하나하나가 정확히 설명해줄 수는 없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작가는 스스로도 무언가를 검색하고, 읽고 들으며, 계획하는 여정 속에서 ‘남이 보는 자신’에서 ‘우리가 보는 우리들’의 영역으로 시선을 확장해 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윤정 작가는 추상 안에서 자유롭게 춤추고, 비정형 안에서 어떤 복합적인 정형을 발견하도록 유도하는 틀을 제안하는 데 능하다. 이는 마치 프렉탈 구조를 만들어가는 복잡성 과학의 한 특성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불균형 상태의 시스템이 구성 요소들 사이의 집합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조직화된 질서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자기조직화처럼 말이다. 예술 안의 과학성을 이야기하자고 하면 으레 나오는 미디어나 기계적 장치와는 정반대에 있는, ‘손맛’ 풍부한 이윤정의 그림에서 왜 이런 복잡성의 과학을 이야기하는가. 그의 작업은 의외로 크기에 따라 계획성 70에 유연한 30, 계획성 20에 즉흥성 80이라는 규칙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의외로 망치기 쉽거든요.”
그렇다면 이렇듯 자기만의 빅데이터를 구축해가는 나름 체계적인 과정 속에서 나온 이 작업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저 다원적 형상들이 우리를 향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어떤 교훈이나 힐링을 제공하기보다는 ‘우리, 각자의 자기 발견’을 획득하게 한다. 에세이를 써나가듯 레터링을 아래에 깔거나 중첩된 이미지로 사람과 동물을 묘사하면서 우리가 정말 ‘우리’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계속되는 만남과 반복된 선택 속에서 만들어지는 각자의 규칙이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이윤정이 말하는 ‘serendipity’의 세계는 시각적 환기를 넘어 하나의 문학적 장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랄까. 누군가 손에 쥐어 주거나 읽어 준 어린이의 동화가 아닌, 자기 스스로가 우연히, 그러나 선택적으로 집어 들었기에 그 자체로도 ‘생각의 책임’을 져야 할 것만 같은!
잠시 특별한 병풍을 보자.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하는 헥스터 작가와의 컬래버레이션이라고 한다. 이길승의 곡 ‘누구나 사는 곳’의 다음 후렴을 차용했다.
구름아래 살기에 자주 아프지만
구름아래 살아서 자주 아름답다
구름아래 살기에 자주 아프지만
구름아래 살아서 자주 아름답다
작품에 반영된 풍경을 통찰하기 위해 훌쩍 석모도를 다녀왔다는 작가의 설명처럼, 종종 귀여우리만큼 간단해 보이는 서사는 사실 깊은 통찰을 은유한다. 복잡한 인생사에 대한 정리가 끝난 것처럼, 어린이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그러나 분명한 어른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는 우연히 그리고 반갑게 만날 때가 있다. 이윤정 작가는 자신의 작업과 지나온 시간들에 대한 바운더리와 딜레마를 다양한 각도로 소화하면서 그림 안에 녹여냈다. 그래서 우리가 삶 속에서 자신만의 습관, 이해와 타협, 분리와 교차 등을 만들어가는 것은 일면 갑작스러운 외부 환경의 결과처럼, 단선적인 선택들의 희미한 조합들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더더욱 복합적인 나를 만들어가기 위해 애쓰는 ‘다양한 관점 갖기’ 훈련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한 뼘 더 성장한 작업 세계는 이번 전시에서 생각할 거리를 여기저기에 툭. 툭. 던져놓았다. 왜 이 사람은 목이 떨어져 있는 거지? 저 얼굴은 어떤 표정들을 담고 있는 거지? 저 동물의 존재는 나와 어떤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거지? 등등, ‘우연히 만날 수 있는’ 질문들은 사실 당신이 순간적으로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예술의 이면에서 정면으로 이따금씩 의도적으로 걸어들어 온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윤정 작가를 처음 만났든, 이미 알고 있었든, 그의 작품 세계에 새삼스럽게 몰입하며 뜻밖에 행운을 발견 하는 사람(serendipper)이 되기를 바라는 강렬한 마음이다. 작품 제목 중 하나인 ‘오춘기’를 앓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글: 배민영(예술평론가)
참여작가: 이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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